<바람난 가족>의 문소리
2003.08.18 / 한승희 기자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문소리 벗은 거 누가 보고 싶어하겠어?’ 별로 기분 나쁠 것도 없어요. 영화를 눈요기로 생각하고 보든 아니든, 나는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벗은 거니까. 벗은 의도가 명확하다면 나부터 당당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그걸 어떻게 견뎌요? 엄마, 아빠 생각나서.”
<오아시스>의 출연 결정이 났을 때, 문소리는 가족에게 이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시나리오를 볼까 꽁꽁 숨겨놓고, 장애 연기를 연습할 때는 방문을 잠갔다. 그래도 불안하고 집중이 안 되서 영화사 건물로 짐을 옮겼다. 햇반에 3분 카레 얹어 먹으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바람난 가족>이 <마지막 연애의 상상>이라는 온건한 제목을 달고 있었을 때, 문소리는 집을 나와 독립했다. 이번에는 홀딱 벗고 찍는다니까 문소리의 아버지가 호적에서 판다는 말을 했다. 출연을 반대했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다. <바람난 가족>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 명필름에서 해외 마케팅용으로 찍은 다리 벌린 포스터를 국내에서도 쓰겠다고 했다. 문소리는 그러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날부터 인터넷과 스포츠 신문을 끊었다.
어디까지나 문소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배짱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사실 저는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 쓰고 괴로워하는 스타일이에요. 혼자 뒹굴뒹굴하면서 죽으려고 하죠. 남들이 뭐라고 하는 거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해요.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밤에 잠을 못 자고.” 하지만 누군들 안 그러랴. 나신으로 춤을 추고, 열심히 자위를 하고, 절정의 순간 통곡을 하다가, 포스터에까지 벗고 나왔는데. 다들 이불 뒤집어쓰고 고민하지만 결국 하는 사람은 하는 거고, 못 하는 사람은 못 하는 것 아닌가.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하면서 철저하게 배웠어요. 제가 장애인 연습을 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을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오지혜 선배가 따끔하게 혼냈죠. ‘너 감독님 못 믿냐? 어차피 감독은 맘에 안 들면 OK 안 낸다. 장애인 흉내내기 대회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 거기에만 집착하냐. 니 욕심 부리지 말고 영화를 생각해라.’ 이번에는 <바람난 가족>에서 무용 지도를 맡으신 안애순 선생님 무용단의 ‘하얀 나비의 비명-아이고’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각오는 했지만 노출 신 촬영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했던 문소리는 공연을 보고, 벗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숨을 죽이고 벌거벗은 무용수의 몸짓에 집중하자 가슴이 어떻고, 엉덩이가 어떻고 하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녀의 눈에는 무용수의 의도만 보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려고 딴 마음을 먹고 있으면 분명히 그걸 보는 관객이 있다. 영화에는 다 보이게 돼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대충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하여 문소리는 벗네, 안 벗네 하는 그 흔한 실랑이 하나 없이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문제는 ‘호정’이라는 한국영화에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냐였다. 바람피우는 남편에게 “그래 너 풀구 살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줌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입양한 아들에게 “아무도 신경 안 써. 너만 떳떳하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엄마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임상수 감독은 솔직하고 쿨한 여자 호정을 지지했고, 문소리도 그런 쿨한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지만 시원하게 벗고 나온다고 해서 ‘쿨’한 연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저는 호정이가 굉장히 피상적으로만 쿨하게 보일까 걱정했어요.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여자로 안 보일까봐. 감독님께 ‘관념적인 얘기는 그만두고 실질적으로 신 바이 신 얘기를 해보자’ 그렇게 파고들었어요. 초반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니까 결과적으로 잘 찾아갔다고 생각해요."
문소리의 세번째 풀 베팅은 성공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지독한 배우, 영리한 문소리에 대한 칭찬이 장안에 자자하다. 이제 문소리의 걱정은 딱 하나뿐이다. “관객이 많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선택하고 말고 할 거는 아니지만 베니스에 갈래, 아니면 흥행할래? 그러면 흥행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 한번 갔다 왔다 이거지, 라고 말꼬리를 잡으려는데 문소리가 선수를 친다. “지금은 내가 홍보의 최전방에 서 있으니까 책임감이 느껴져요. 전에 배우는 현장에서 결판난다, 스탭들에게 인정받는 게 진짜 배우다,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영화가 5월에 완성됐는데도 개봉을 못 하고 많이 기다렸잖아요. 그 기간 동안 마음이 많이 상했어요. 50~60명이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다른 유명한 배우와 일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사범대를 졸업하고 우연한 기회에 응모한 <박하사탕> 오디션에서 이창동 감독의 눈에 든 배우 문소리. 영원히 김영호의 첫사랑으로만 기억될 줄 알았던 문소리가 사지를 비틀면서 배우가 되고, 온몸을 불사르면서 배우가 됐다. 지난해 어느 영화상 시상식에서 “여배우라고 해서 꽃이 되기보다는 한국 영화계의 줄기와 뿌리가 되고 싶다”고 야무지게 말했던 문소리가 <바람난 가족>으로 거듭 큰 배우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