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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계급의 기원에 대한 푸코의 역사적 접근 방식

hanolduol |2006.11.10 10:52
조회 49 |추천 0

푸코의 역사적 접근 방식

부르주아의 계급 구성이 18세기의 계몽주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라면, 푸코는 그것을 18-19세기의 역사학에서 찾는 입장이다. 물론 17세기 광인들의 대감금 현상 뒤에 데카르트의 광기의 배제 와 이성중심주의가 있었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을 미루어 보면 그가 계몽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기원을 일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아마도 그의 역사학적 접근 방식은 계몽주의적 가설의 바탕 위에서 곁가지의 분야를 추적해 본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거의 기억과 직관으로만 글을 써나가는 사르트르에 비해 푸코는 주변적 자료까지 꼼꼼히 챙기는 세밀한 계보학적 방식을 쓰고 있다.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도시를 부각시킨 브레키니와 샵살의 담론을 제외하고는 18세기까지 제3신분(부르주아지)은 역사에 정치적 기획을 투입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역사를 정치투쟁에 이용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역사를 발굴하여 그 초기의 법이나 세력 균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 안에서 한때 영광스러웠던 자기 조상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을 때 할수 있는일이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침입, 메로빙 왕조, 카롤링거 왕조, 그리고 샤를르마뉴 대제에 이르기까지 중세 이전의 역사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 거기에서는 제3신분 혹은 부르주아지의 질서 비슷한것도 찾아 볼수 없었다. 18세기에 부르주아지가 역사에 거부감을 갖고 역사에 대해 침묵을 지켰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귀족, 그리고 왕정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오래동안 반-역사적이었다. 자연법이니 사회계약론이니 하는것들은 모두 역사를 부정하는것이었다. 18세기말 대혁명 이전과 그 초기에 부르주아지가 열광했던 루소 사상은 권력의 장 안에서 싸우고 있던 귀족과 왕권등 다른 정치적 주체들의 역사주의에 대항하는것이었다. 루소주의자가 되는 것, 미개인을 동경하는 것, 계약에 호소하는 것은 모두 5세기 이래 게르만의 침략 이후 이루어진 귀족과 왕정등의 특권계급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위한것이다.

a) 귀족의 권리 주장

처음으로 역사를 권력 투쟁의 장 안에 끌어들인 것은 귀족이었다. 때는 루이 14세 시대인 17세기였고, 그 중심 인물은 불렝빌리에였다. 그때까지 역사는 곧 왕조사였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로마사였다. 유럽의 모든 왕정은 자기들의 시조가 트로이성의 피난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이 희랍, 로마의 법통을 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역사는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역사,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남에게 시키는 역사였을뿐이다. 그것은 권력에 의한 권력의 역사였다. 불렝빌리에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는 이러한 역사적 기능에서 벗어났다. 역사를 기술하는 새로운 주체가 떠올랐으며, 그 역사 기술의 대상인 새로운 주제가 부상했다. 이제부터 역사에서 발언권을 얻어 말하게 될 사람은 왕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머나먼 과거의 역사 속에 공동의 시조를 갖고 있는 비슷한 신분의 한 계급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이라고 말하면서 유구한 역사 속의 온갖 법과 불의, 패배, 승리들을 자신들의 운명 주변에 자기들 관점으로 재배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17세기에는 귀족이었고, 19세기에는 부르주아지였다. 그 이래 역사학은 현재의 힘의 관계를 수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불렝빌리에 이래 역사학은 단순히 여러 세력들을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그것을 수정하는 틀이 되었다. 즉 역사적 앎의 질서를 통제하고 그 안에서 자기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것이다. 한 마디로 역사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은 계급의 헤게모니 장악에서 결정적으로 전략적인 고지를 점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단은 루이14세의 손자이며 왕위 계승자인 부르고뉴공(公)을 교육하기 위한 텍스트 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왕세자가 나중에 국정을 담당할때를 대비하여 루이14세가 자신의 행정부와 감독관들에게 요구한 프랑스의 정체(政體)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이다. 왕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앞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될 지식으로서의 프랑스 명세서,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풍속, 제도, 경제, 사회에 대한 일반 연구였다. 이 보고서가 나온후 부르고뉴공의 측근들은 왕세자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할수 있도록 이 방대한 자료를 줄여서 요약하는일을 불렝빌리에에게 일임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력과 정치적 권력을 손상시킨데 대해 루이 14세의 체제를 심하게 비판하는 반동적 귀족들이었다. 마침내 불렝빌리에는 수많은 비판적 성찰과 담론을 곁들여 이 방대한 자료를 추리고, 중요한것만 골라 두 권의 두꺼운 해설서로 요약했다. 이 불렝빌리에의 텍스트는 귀족들에게 유리한 가설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난한 귀족에게 불리한 매관제도를 비난하고, 귀족들로부터 사법권 및 그와 연관된 이득을 박탈한것을 항의하며, 왕의 참사원에 귀족도 한 자리 차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고, 지방 행정부에서 행정감독관들이 수행하는 역할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왕과 왕자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바로 그 행정 조직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왕이 자기 국정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전적으로 이 행정감독관들이 정의하고, 처방하고, 가로채고, 식민화한 정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왕이 만든 거대한 행정조직은 그의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의지의 소산이므로 그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관료인 신하들이 그에게 거역할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군주는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간에 이 행정부가 그에게 다시 전달해주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정보에 의해 자신의 행정부와 밀착되어 있다. 행정부는 왕이 무제한적인 의지로 온 국민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반대로 행정부는 자신들이 왕에게 제시하는 정보의 성격과 질에 의해 왕을 지배한다. 이것은 푸코의 앎-권력 이론에 딱 들어 맞는 이야기이다. 푸코가 1976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에서 왜 불렝빌리에에게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지 우리는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불렝빌리에 이래로 모든 귀족 역사학자들의 진정한 공격 목표는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 조직을 연결하는 이 앎-권력의 메카니즘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탕진하고 부분적으로 권력 행사에서도 밀려난 귀족 계급이 그들의 반격과 재반격의 목표로 삼은 것은 권력의 즉각적이고도 직접적인 재탈환이나 잃어버린 부(富)의 회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 조차 소홀히 했던 권력 체계의 한 중요한 고리, 즉 앎을 챙기는 것이었다. 귀족 계급에 의해 무시되었던 이 전략적 부분은 옛날부터 교회, 성직자들, 법관들, 부르주아지, 행정가들, 그리고 재정가들에 의해 차례차례 소유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불렝빌리에가 귀족들에게 정해주려는 전략적 목표와 다시 차지해야 할 지위, 그리고 모든 앙갚음의 조건은 군주의 시혜 가 아니라 바로 왕의 앎이었다. 왕의 앎, 또는 왕과 귀족들이 공유하는 어떤 앎, 다시 말하면 그 옛날 왕과 귀족의 상호적 약속이었다. 그동안 경솔하게 내버려졌던 귀족의 기억과 그리고 아마도 악의적으로 감추어졌던 군주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일이 그들의 목표였다.
왕의 앎에 다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 귀족들의 가장 큰 적, 다시 말해서 제거해야만 하는 앎은 우선 법률적 앎, 즉 재판관, 검사, 법률가, 재판소 서기들의 앎이었다.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앎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이해할수 없는 궤변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 넣은 앎이며,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사법권과 재산 마저도 앗아간 앎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왕과 신하 사이를 오가는 순환적 앎이므로 더욱 가증스러운것이었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알아보기 위해 서기와 법률가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물론 판사와 검사의 시각에 의해 수립된 앎이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는 왕 자신이 만들어낸 직위이므로 왕은 그들로부터 자기 권력에 대한 찬사만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앎에서 왕은 자신의 권력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귀족들에게 저질렀던 횡령의 총체는 법이라는 합법적 양상 속에 은폐된다. 이 앎에 대항하여 귀족들이 내세운 전혀 다른 앎이 바로 역사였다. 이 역사는 왕이 자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찬사(다시 말해서 언제나 로마에 대한 찬사)만을 듣는 재판서기들의 앎이 아니라 권리의 역사적 공정성의 근거를 부각시키는것이었다. 종래의 역사 뒤에서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들, 공식문서나 텍스트를 남기지 않은 충성의 서약들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다. 왕을 위해 뿌려진 귀족들의 피를 상기시키고, 잊혀진 가설들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귀족과의 계약을 파기한 왕권에 의해, 그리고 왕권과 귀족의 권한을 동시에 침해했던 법관들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불공정, 부당, 남용, 박탈, 배신, 불성실등의 결과가 현재의 법률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의 의지에 따라 법조문을 작성했던 재판서기들의 앎에 대항하여 이제 역사적 앎은 배신당하고 모욕받은 귀족들의 무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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