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매미가 지나간 다음부터 모처럼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큰 키를 자랑하며 도로 가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던 억새풀이 어느덧 여리디 여린 하얀 수염
을 살며시 내어놓고서 지나가는 잠자리를 부르는 듯 흔들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빨간 잠자리 한 마리가 억새의 수염 옆으로 다가가지만 자꾸 고
개를 흔드는 억새의 움직임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 어디론가 멀리 날아갑니다.
지금까지 푸른색의 옷을 입고 들판에 서있던 벼들도 밝은 햇살을 받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누런 색으로 바뀌어갑니다.
그러나 지난번 태풍 매미가 쓰러뜨리고 지나간 논에는 쓰러진 벼들을 세우느라 농부들의 분
주한 손길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면 언제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오늘도 마을의 빈터에는 고추 말리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토란 대를 말리기도 하고 또 참깨를 터는 작업을 하는 농부들의 미소에
는 어느덧 수확하는 기쁨이 어려있습니다.
저는 전남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 화전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화전마을은 노동면의 소재지입니다 만 여전히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합니다.
화전마을 염옥순 할머니 댁의 우편물을 가지고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께서는 토방에 앉아
서 무엇인가를 다듬고 계시다가 "아제 또 뭣 왔어? 이 옆집이 것도 있으문 나를 주고가 으
디 서울인가 으딘가 갔다가 온다고 하드만 당아도 안온당께!" 하시며 저를 반기십니다.
"예 그러면 옆 집 할머니 우편물은 여기 우편 수취함에 넣어둘까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
는 "그란디 편지가 으서 왔으까?" 하시며 묻습니다.
"보성 읍내로 약을 사러 나오시라는 것 같은데요" 하고 제가 대답을 하자 할머니께서는 갑
자기 "아이고! 나 그것 소용업응께 도로 가지가 부러!" 하십니다.
"아니 할머니 왜 편지를 도로 가져가라고 하세요?" 하고 묻자.
"그 사람들 순 나쁜 사람들 이드만 먼자 참에 이 옆에 노인하고 나하고 거그를 갔는디 무슨
약이 아~조 잘 듣고 그란다고 사라고 그리데 그래서 샀는디 누구한테 물어본께 한 5만원 아
치나 되꺼인디 늙은이들이라고 20만원이나 받어 묵고 그란디 약이 통 안들어 그래서 무단히
손해만 봐 부렇어 그란디 나보고 또 오라고 나는 절대로 안 갈랑께 그냥 그것 도로 갖다줘
부러!" 하시며 역정을 내십니다.
"할머니 그러시면 편지 그냥 찢어버리세요! 그런데 이 옆집 할머니에게 편지가 올 줄은 어
떻게 아셨어요?" 하고 제가 물었더니 할머니께서는
"편지가 오문 항상 우리 것하고 그 집 것하고 같이 오데 그랑께 내가 알아!" 하십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도시의 건강보조 식품회사에서 무슨 안내장을 발송할 때면 전
화번호부에 적혀있는 전화 가입자의 주소와 이름을 모두 다 적어서 발송을 합니다.
그러면 시골마을의 모든 가정에 우편물이 빠짐없이 배달이 되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그런 말
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시골마을에서 살고 계시는 할머니들에게 우편물이 오면 얼마나 오겠습니까?
멀리 도시에서 할머니의 자녀분들께서 용돈이나 보내오는 것 외에는 거의 우편물이 없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할머니 나중에 옆집 할머니 오시면 편지 뜯어보시고 저한테는 화내지 마세요! 저는 심부름
한 죄밖에는 없으니까요! 아시겠지요?" 하는 저의 말에 할머니께서는 저를 바라보시다 빙긋
이 웃으시며 "아따~아! 누가 아제한테 화 냈간디? 그냥 무단히 내가 해본 소린께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씨요 잉!" 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하고 나서 할머니 댁을 나오는데 할머니께서는 "아제 금방
내가 한말 아제한테 한소리가 아닝께 무담시 오해하지 말어 잉!" 하시며 저에게 오해를 하
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할머니 말씀에 오해를 하겠어요? 할머니도 저의 어머니 같
으신데!"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그때서야 안심이 되시는지 다시 빙긋이 웃으십니다.
저는 다시 노동면 용호리 쪽으로 향하여 달려갑니다.
용호리 쪽으로 가면서 들판 여기저기서 쓰러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는 농부들을 바라보며 도
와드릴 수 없는 저의 마음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태풍 매미의 피해가 경상도 쪽의 피해에 비하면 이곳은 그래도 피해가 아주 적은 편이지만
작은 피해라도 피해는 피해인데 어찌 피해가 전혀 없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태풍 피해는 없으셨어요?" 하며 안부나 물을 뿐이지요!
이윽고 저는 용호리의 우편물 배달을 모두 끝을 내고 용호리 마지막 마을인 용동마을에서
옥마리 마산마을로 향하여 천천히 달려가고 있는데 용동마을 마지막 집 앞에 경찰관들이 타
고 다니는 흔히 말하는 닭장차라는 버스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상하다! 왜 저 차가 여기에 있지? 이 마을사람들이 데모를 할리는 만무하고 그런데 왜
저 차가 여기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버스 앞으로 가까이 가보니 버스 앞에는 '이동파출소' 라는 표시가 걸려있습니다.
"참! 이런 산골마을에 무슨 이동파출소는 이동파출소 여~어? 산골마을에 무슨 파출소 못간
사람이 있어서 저 차가 여기까지 왔나? 그 시간에 쓰러진 벼나 세워주면 농민들이 무지 고
맙다고 할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버스 앞을 지나쳐 가는데 얼마가지 않아 저의 생각이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버스 옆을 지나 약 300m 쯤 지나가자 도로 위쪽 논에서 도란도란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그
쪽을 쳐다보았더니 짙은 감색 상의를 입은 청년들 여러 명이 자꾸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벼가 쓰러진 논에서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겁니다.
자꾸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은 쓰러진 벼를 세우려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봐야하
고 세운 벼를 묶으려면 일어서야 하기 때문인데 논 아래쪽에서 바라보니 그저 앉았다 일어
섯다 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찰관들이 버스를 타고 봉사활동을 하러 온 것인데 저는 엉뚱한 이동파출소 생각
을 한 것입니다.
"경찰관 여러분! 제가 괜히 잠시 오해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빌어드립니다. 경찰관 여러분 힘내세요! 여러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