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할일없이 씨네21을 뒤적이다가,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영화에 대한 기사를 봤다.
그 특유의 암울함 때문에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고편에서의 아름다운 영상과 불교영화라는 호기심때문에
일부러 찾아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자친구와 나까지 포함해 8명밖에 없던 영화관, 늦은 시각 영화를 끝나고 나오면서
여자친구가 나에게 물었던 말이 기억난다.
" 오빠는 오빠가 지고 있는 돌이 뭐라고 생각해?"
그 영화의 "봄" 부분에서 돌은 어린 동자승의 業을 상징한다.
여자친구는 나보다 똑똑하고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했었기 때문에,
원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면 조심스러웠었지만,
이 질문은 특히 대답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나의 업..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 무게가 무거워짐을 느끼지만,
딱 무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타인(?)과의 관계에 그리 능숙한 편이 아니었던 나는
항상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그런 인간이었던 듯 싶다.
내 자신이 지닌 컴플렉스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것으로 감추려고 전전긍긍해왔다는 편이 옳으리라.
언제나 잘나보이려, 남들보다 나아보이려 애써왔고,
그 부분이 곪아 터졌었던 고등학교 시절,
세상이,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웠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며, 내 자신이 그리 특별할 것 없다는 것과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갈수록
내 자신을 호되게 무너뜨렸던 그 때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었다.
김기덕의 말을 빌리자면 그 시절이 나의 '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형성되어간 내 모습이 내가 지닌 업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를 감추는데 급급했던 내 자신이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정신없이 빠져들어갔던 것은 아마 그런 나의 업 때문이었을게다.
처음부터 불가능할거라고 시작했던 한 여자와의 시작,
사랑보다 더 큰,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집착에 떠밀려,
나는 나와 함께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던 듯 싶다.
막 여름이 시작되던 5월 말부터 시작되었던 나의 모험은
100일이 넘는 시간동안 계속되며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은
이제 더이상의 기력이 남아있지 않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사랑보다는 내 자신에 대한 집착과 한 사람에 대한 커다란 증오만을 남긴채
오도카니 서있는 나를 발견할수록 참을 수 없는, 그러나 뭐라 말할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김기덕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여름'이 상징하는 사랑, 그리고 집착...
그것이 왜이리도 나의 27살 여름과 닮아있는지...
나와 그녀를 연결해주던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는
그녀와의 공간적 거리를 연결해주는 가교같은 존재였었다.
이미 그녀의 일과 나 자신의 문제로 무너지기 시작했던 나를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그녀의 친구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한동안 외면해야만 했었다.
내 집착으로 인해 가운데서 괴로워했었던 그 친구와,
나의 변해감을 감지하고 역시 괴로워했던 그녀 사이에서
나 역시 한 동안을 방황하고 있었던 듯 싶다.
내가 처음 그녀에게서 발견했던 놀라움과 사랑스러움을 그 친구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내가 보지 못했던 그녀의 또 다른 일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녀와 이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낄수록,
내 마음은 점점 그 친구에게로 돌아서고 있었다.
나를 한 눈에 반하게 만들었고, 모든 일의 시작이기도 했던 한 조각의 글이,
사실은 그녀가 아니라 그 친구에 의해 씌여졌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때,
나는 그녀에 대해 더이상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그 친구를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 친구를 나의 애인으로, 그리고 결혼 상대자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의 여름이 끝나길 정말 간절히 바랬었다.
그리고 이젠 가을이 시작된 듯 하다.
김기덕 영화에서의 분노와 괴로움으로 상징되는 가을이.
나는 아직도 나와 처음의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은 어떤 사람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가 없고,
처음의 그녀는 나의 돌아섬과 자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어떤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나의 여자친구는 그 때문에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겨울처럼 모든 것을 놓고, 해탈에 이르진 못하겠지만,
나는 어서 빨리 겨울이 오기를 절실히 바란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나도 나의 증오를 벗어던지고,
처음의 그녀도 하루빨리 괜찮아져 자신을 어서 빨리 찾아가기를.
그리고 나의 겨울같은 지금의 여자친구가 나를 보며 하루하루 행복해질 수 있기를.
또한, 피폐해진 나를 보며 괴로워하던 많은 사람들도 안심하며 웃을 수 있기를.
이 가을의 끝이 김기덕의 가을의 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이 이야기의 진정한 해피엔딩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