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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스쳐간 스무살, 그리고 봄 < 11 >

푸른문 |2003.11.30 17:23
조회 208 |추천 0

< White snow >

 

 

 

“ 어떻게 해.. 병원 가자 응 ? ”


“ 아냐 괜찮아..원래 편도선이 약해서 겨울철엔 늘 이래 ”


“ 영민아 고집 부리지 말구 차라리 집에 내려가 있어 ”


“ 싫어 ”


“ 그럼 좀 잘래 ? ”


“ 응 ”

 

..............................................................................

 


눈이 내리고 겨울방학이 시작됐지만 우린 여전히 학교에 남았다.

은영이는 학교의 모든 수업이 종강했지만 당연한 듯 도서관으로 등교했고

밤이면 작은 그녀의 방이나 혹은 내 방에서 잠들곤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엔 어딘지 불안정한 느낌이 스며있었고

점점 기온이 떨어질 수록 그녀의 뒷모습도 무척 추워보였다.

 

 

"은영아 집에 안다녀와?"

 

 

유난히 기온이 떨어진 어느날 저녁 우린 이불을 돌돌말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응."

 

"아빠 안보구 싶어?"

 

"...."

 

 

커피잔을 내려놓고 이불을 여미던 은영이는 내 질문에 가만히 머리만 기대어 왔다.

 

 

"우리 아빠.. 일때문에 집에 안계셔."

 

"...."

 

"집에 가도 어차피 혼자야" 

 

 

아빠와 단 두식구라는 은영이.

 

 

"멀리 가셨어?"

 

"응. 해외 출장"

 

 

아..정말 그렇다면 집에 가나마나겠구나..생각했다.

 

 

"영민이 넌 안내려가?"

 

"응.."

 

 

여름방학 에도 집에 내려오지 않는 날 보며 어머님이 화를 내셨지만 억지 고집을 부리며

기어이 남았고 그런 내게 은영이는 말했었다.

 

 

"겨울방학은 부모님이랑 있어."

 

 

하지만 난 남았다. 학교에, 나의 방에, 그녀의 곁에.

 

물론 은영이와 떨어지기 싫은 마음도 있었지만

집을 떠나 처음 맛보고 있는 혼자로서의 자유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것도 같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시간까지, 난 자유로왔고,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

집을 떠나 있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았고 이렇게 지내는 게 오히려 행복하기조차 했다.

 

 

 

......... 그 때 내가 외롭고 힘들지 않았던 건 은영이때문이었는데.

         

          그녀가 곁에 있어 씩씩하고 당당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은영이의 사랑에 너무 취해버린 나머지 그녀의 소중함을 깜빡 잊고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집 떠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그녀였단 것도 잊고 있었다.

         

          바보처럼..

 

............................................................................................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올라 온 몸이 불덩이 처럼 뜨거웠다.

목이 너무 아파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꾸 추워하는 나를, 은영이는 온 몸으로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얼마나 잤을까? 이마에 느껴지는 따스함에 눈을 떳다.

 


“ 깼어 ? ”

 


그녀는 옆에 앉아 이마에 손을 얹고 내려보고 있다.

 


“ 이것 좀 먹어 죽이야 ”

 


자고나니 열도 조금 가라앉았고 하루종일 굶은 배도 고프기 시작했다.

몸을 일키는 내 등뒤로 은영이의 손이 부축해준다.

 

 

"넌?"

 

"생각없어."

 

 

작은 수건으로 이마에 번진 나의 땀을 닦아주며 어서 먹으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목이 부어 열이나 벌게진 눈으로 죽을 먹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 나 모래쯤 집에 내려갈 거야 ”


“ 응 ? 언제와 ? ”


“ 글쎄.. 개학할 때 까지 못 올지도 모르구.. 어쩌면 내년 휴학 할지도 몰라 ”


“ .... ”

 

"...."


“ 그럼 당분간 못보나? ”

 


수저를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 후훗.. 떨어져 있으니까.. 그래도 많이 보고싶음 다녀가면 되지 ”


“ 저기.. 은영아.. ”


“ 응 ? ”


“ 나도 내년에 휴학 할꺼야..”


“ 어머 왜 ? ”


“ 3월에 군대가. 영장 나왔어 ”


“ ..... ”


 

난 서랍에서 3월 입영 이라 적혀있는 영장을 꺼내 보여주었고

그녀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 언제 나온거야 ? ”


“ 지난달에 ”


“ .... ”

 

 

난 학교를 7살에 들어가서 은영이보다 한살 어린 열아홉이었다.

이제 며칠 후면 해가 바뀌고 스무 살이 되면 그녀 곁을 떠나 또다시 새로운 세상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녀를 두고 어디론가 간다는 게 마냥 서운하진 않았다.

<지금에야> 너무도 내 안 깊숙이 그녀가 들어와 있어서 못 느꼈다는 걸 알지만

그땐 정말 괜찮아서 아무렇지 않다고,  아니 너 없이 2년 쯤은 견딜 수 있어..라는 생각마저

했던 것 같다.

 


“ 왜  말 안했니 ? ”

 

하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어서 얘기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막상 군대 가는 얘기를 하려 할 때마다 은영이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렸으니까

 

하지만 그 날 어이없게도 이렇게 말했다.

 

 

“ 그 냥 ”


“ ... ”

 

 

그렇게 무덤덤한 척 말한 내 모습은 뭐였을까?

그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별 의식없이 해버린 건.

 

 

그 이후로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다음날도 변함없이 나와 함께 있었고

그 다음날 집으로 가는 오후까지도 나와 함께 있었다.

 

터미널 까지 바래다 주려했지만 아픈데 나올 것 없다며 눈 쌓인 거리로 혼자 떠났고,

 

작은 가방을 매고 두꺼운 하얀 잠바를 입고선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게 추운데 들어가라며 자꾸만 손짓하며 멀어져 가던 그녀..

 

저 멀리 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 전

다시 한번 뒤돌아 큰 몸짓으로 손을 흔들고 밝게 웃던 은영이.

 

온통 거리엔 하얀 눈이 소담스레 덮여있었고

 

저 멀리 길 모퉁이에선 하얀 잠바를 입은 그녀가

내가 그토록 사랑스러워 했던 하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맨발에 슬리퍼만 끌고나온 난, 덜덜 떨며 서둘러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 은영이는 그렇게 떠났다. 

 

다시 난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고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 샤워를 하고,

목 아픈 데 피지 말라며 그녀가 감춰둔 담배를 꺼내 피웠으며

새벽녘 허전한 품이 그리울 쯤 그녀가 보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다시 날이 밝고 일상 속에 문득 그녀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애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무덤덤함..


<늘 그녀는 내 곁에 있었고 내 여자며, 내가 원하면 언제든 머무는 여자니까.

  떨어져 있지만 곧 다시 만날 것 이며, 군대에 간다 해도 그녀는 기다릴 테니>


서둘 것은 없었다.

난 그저 덤덤히 일상을 살면 되었고 그녀를 위해 내가 뭘 해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 어리석은 스무살.>

 

 

해가 바뀌고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고 싶다며 투정부리는 그녀에게 나도 보고 싶다고, 조만간 만나자는 말을 한 후 끊었으며

또 하루 이틀이 흘러갔지만 2월쯤 서울 올라온다던 그녀로부턴 아무 소식도 오지 않았다.

 

3월이 다 되가는 어느 날 에서야 그녀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막상 입영일이 다가오자 못 견디게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하루 종일 그녀가 적어준 번호를 들고 전화를 걸었지만 끝없는 신호음만 들리다가 끊어지기만 했다.


그제 서야 난 조금씩 애가 타다가는 원망과 신경질로 변했고

급기야는 될 대로 되라 너 말곤 여자 없냐 식 감정까지 품고 말았다.


그리고 입영 하루전날 에서야 석훈과 혜민이랑 어울려 진탕 마시고 늦게 방으로 들어와

아픈 속을 달래는데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 영민이니 ? ”


“ .... 응 ”


“ 내일 간다며 교수님께 들었어 ”

 

................교수님? 교수님이랑은 연락하구 나랑은 안한거야?


“ 그래 전화 했었는데 안 받더구나 ”


“ 응..미안해..너 많이 보고 싶었는데 사정이 좀 있어 ”


“ 사정 ? 그게 뭔데 ? 그렇다구 전화 한통 못해주니 ? ”


“ ...... ”

 


내가 먼저 그녀를 찾았다면 가능했을 일을 괜히 심술이 나 그녀를 몰아세웠다.

 


“ 영민아 미안해 ”


“ .... ”


“ 군대생활 열심히 잘하구 아프지 말구 교수님께 편지해 ”


“......... ? ”


“ 우리 집이 편지 받기가 좀 그래서.. 교수님께 주소 알려오면 내가 편지 쓸께.. ”


“... 집에 무슨 일 있어 ? ”


“ 응..뭐.. 나중에 얘기해 줄께..  저기 영민아 ”


“ 응 ? ”


“ 사랑한다 말해줄래 ? ”

 

 

문득 가슴 깊은곳이 아려왔다. 내게 사랑한다 말해달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까지 밀려오는 그녀의 텅 빈 듯한 공허함에.

 

 

"사랑해 은영아"

 

"고마워..나도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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