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도(海圖)를 들여다보던 고건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초전(初戰)에서는 안개를 이용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역시 적의 전력은 너무나 크다는 것을 확인했네. 다음 전투는 더욱 어려워질 게야."
"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비밀병기라 할 수 있는 충각선도 저들이 이미 알았습니다. 벌써 대책을 세웠을 것입니다. 또한 안개를 다시 이용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적이 언제쯤 올 것 같은가?"
"빠르면 미시(未時) 쯤에는 비사성 앞에서 다시 보지 않겠습니까? 안개가 벗어날 시각에 말이옵니다."
"저들의 다음 작전은 어떨 것으로 보는가?"
"상륙함대와 보급함대를 모두 끌고 한꺼번에 밀려 올 것이옵니다. 아군의 함대를 만나면 많은 숫자를 이용해 학익진(學翼陳)으로 날개를 벌려 단숨에 우리를 삼키려 할 것입니다."
고웅백의 예측은 고구려군의 상황에서는 매우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렇겠지. 학익진에 붙들리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볼 수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하지가 않아.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희생이 너무 크고....."
고건무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고웅백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생각해 두신 전략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육지책(苦肉之策)이야. 우리의 살과 피를 내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거든."
"비책이 계시다면 말씀해주시오소서. 어차피 모든 장졸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나온 전쟁터가 아니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작전이야. 내가 생각하는 전략에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네. 하나는 저들을 해가 질 때까지 묶어두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학익진을 쓰고 있는 저들의 진형을 밀집대형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는 것일세."
고웅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허... 대체 무슨 작전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 소인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박명(薄明)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우리는 적을 볼 수 있는 반면 적은 우리를 볼 수 없다네. 마치 청맹과니처럼 말이야. 눈을 멀쩡히 뜨고도 우리를 못 보는 게야. 그걸 이용하면 적군에 상당한 타격과 손실을 줄 수 있지."
"세상에... 그런 것이 있사옵니까?"
"해가 떨어질 무렵에 지평선이나 수평선에서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세."
"오..."
고웅백은 고건무의 기발한 책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고건무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문제는 그 상황 속으로 어떻게 저들을 끌어들이느냐 일세. 우리는 워낙 열세인지라 전면전은 아니 되네. 계속 저들의 전력을 있는 대로 부수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세."
"사실이 그렇사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전법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습니다. 그러한 전법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사옵니까?"
"이 사람아... 평생 바다를 접해온 내가 아닌가? 지금은 감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실전에 제대로 이용하여 성공시킬 수 있는가 일세. 지금 제장들을 부르게."
"알겠습니다."
고웅백의 호출에 따라 장수들이 고건무의 주장선 선실로 들어와 작전 지시를 기다렸다.
고건무는 장수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 제장들도 이미 확인하였듯이 적군은 우리의 세배가 넘는 전력이오. 하지만 우리가 죽기를 각오한다면, 그리고 하늘이 우릴 돕는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오. 내가 군사와 의논한 전략이 하나 있소. 이 전략이 맞아 떨어진다면 우리는 적의 절반 정도를 때려 부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는 전략이오. 하지만 우리 역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오."
고승이 굳건한 의지를 보이며 말했다.
"장수가 전장에 나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무슨 명이든지 내려만 주시옵소서."
"제장들의 결의를 보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하구려. 잠시 개요를 설명하게."
"예, 전하."
고웅백이 고건무의 말을 받아 장수들에게 설명을 시작한다.
"오랫동안 바다를 연구하며 심혈을 바쳐오신 전하께서 어려운 때에 참으로 신묘한 계책을 내놓으셨습니다. 그야말로 잘만 되면 우리가 안고 있는 수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올시다."
"....."
"전하께서 생각하신 것은 박명으로 땅과 바다, 즉 수평선과 지평선에서는 해가 질 무렵 착시현상이 일어난다고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 시진 가량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합니다."
문걸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호, 그럴 리가...?"
"분명히 그런 현상이 있소이다. 자연의 조화요."
장수들이 서로 놀라는 모습으로 웅성거린다. 고건무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실전에 응용하기는 아마 이번이 처음이 될 게요. 문제는 우리가 노리는 사정거리 안으로 저들의 대선단을 끌어들이는 일이오. 그래서 고육지책이 된 게요. 누군가가 나아가 저들의 진을 깨고 밀집대형으로 묶어 우리 쪽으로 유인하여 끌고 오는 일 말이오. 죽음이 아니고는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문걸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전하, 듣고 보니 이처럼 영광된 자리가 없겠사옵니다. 소장을 보내주시오소서. 각 전함에 있는 조의들을 선발하여 함께 가겠사옵니다."
고승도 일어나면서 말했다.
"아니옵니다. 소장을 보내주시오소서. 설명을 들어 뫼시고 보니 이 전투는 1천년 역사에 남을만한 일 같사옵니다. 소장의 이름을 역사에 오르게 해 주시오소서."
전담도 나섰다.
"무슨 말씀을...? 전하, 소장이 가겠사옵니다."
고건무는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제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소. 모두 고맙소. 그러면 우선 자원한 순서대로 제장들을 선임하겠소. 제1돌격주장은 문걸 장군이 맡고, 제2돌격주장은 고승 장군이 맡으시오."
문걸이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백골난망(白骨難忘)이옵니다, 전하! 기필코 고구려의 영광을 위해 죽을 것이옵니다."
"고맙소. 두 장군에게 각 2백척의 소전투함을 내어주게 될 것이오. 정탐선의 보고에 따르면 주라후는 우리의 예상대로 전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편 채 이리로 오고 있소. 이에 맞서기 위해 문달 장군의 제1돌격선이 적이 형성한 학익진의 중앙을 파고 들어갈 것이오. 그리고 적의 진형을 깨고 흐트려야 하오."
"예, 전하! 키필코 임무를 완수할 것이옵니다."
"제1선이 산화하고 나면 다시 제2선이 저들의 중앙에 쐐기를 더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대략 해가 지게 될 시각에 이를 것이오. 그 다음엔 우리가 있소이다. 저들은 고승 장군의 뒤를 쫓아 한꺼번에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들 것이오. 그리고 그때즘 해가 지게 될 것이오. 바야흐로 우리들의 시간이란 말이오. 그렇게 되면 적어도 7월 그믐까지는 적어도 비사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
제장들이 일제히 비장한 각오로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고건무는 잠시 문걸과 고승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 박명작전은 우리가 희생한 것의 열배, 아니 수십배의 타격을 저들에게 주게 될 것이오. 저들이 가지고 있는 전력의 절반을 빼앗는다는 것이 나의 계획이오."
"참으로 놀라운 계책이옵니다. 전하께서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는 바다의 신장(神將)이시옵니다."
"벌써 오전 참이 지나고 있소. 안개가 벗겨지고 있소. 저들이 이쪽으로 출항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오."
"무슨 말씀인지 알겠사옵니다. 바로 출전하겠사옵니다."
고건무는 눈물을 참으면서 문걸과 고승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오. 문걸 장군, 그리고 고승 장군....."
"영광의 길이옵니다. 죽어서 영원히 살 것이옵니다, 전하!"
"고맙소. 고구려는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고건무는 두사람의 어깨를 잡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한편, 비사성을 향해 출항하는 수나라의 수로군에서는 주라후가 선실에서 부장들과 진격을 의논하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화공으로 전함 2백여척이 불타고 보급선과 상륙선이 50여척이나 가라앉았어. 게다가 전투 기능을 상실한 함선이 3백여척이야. 상륙을 기다리던 장졸들이 부지기수로 죽었고..... 이게 첫 전투의 결과야."
주라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무참히 깨졌다는 것이야, 무참히...! 일단은 다 내 책임이다. 그러나 그까짓 안개가 두려워서 군사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뒤를 보인 너희 장수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잘들 들어라! 우리는 다시 비사성으로 항진하고 있다. 다시금 전투에 임해 군령을 받지 못하거나 이탈하는 자가 있으면 불문곡직 목을 벨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저들보다 많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선두의 전투함대를 맡은 장수들은 대오를 제대로 갖추도록 하라. 알겠는가?"
"예, 총관 어른!"
"이번에는 고구려의 충각선도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 안개가 걷힌 상황에서 싸우면 무조건 저들이 불리하다. 우리가 비사성에 상륙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문책을 받을 것이다. 한왕 전하도 실패하셨는데, 우리까지 잘못돼 봐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죽으나 사나 우리는 뜻을 이루어야 한다. 알겠는가?"
"예, 총관 어른!"
낭장(郎將) 상관요(上觀曜), 별장(別將) 단천향(段天響)을 비롯한 수나라의 장수들은 주라후의 엄명에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수나라의 대선단은 마치 송사리떼를 한 입에 삼키려는 상어처럼 무섭게 이빨을 드러내며 비사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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