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생 대표, 김 기린."
반쯤 졸던 봉황은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이 근처에선 딱 하나 있는 공학이면서
만만찮은 수준의 걸들이 모이는 곳이라 소문이 자자한 학교다.
기어이 우겨서 간신히 원하던 학교에 들어오게 된 반봉황 군은
매우 흐뭇한 마음으로 스사삭 여학생들을 둘러보다가
지루하게 계속되는 교장의 훈시에
자꾸만 내려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처박았다.
슬슬 잠으로 빠져드는 몽롱한 머리에
희망찬 고교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화려하게 펼쳐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점점 꿈나라와 가까운
망상의 세계로 입성하려는 찰나였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만 끝나면 지겨운 입학식도 끝이다,
나가서 뭘 먹을까, 아니 형이 왔을 테니 백화점에 끌고 가야지.
이번에 새로 나온 타이틀이 뭐더라.
아, 그러고보니 전생도 바꿔야 하는데… 등등의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잠에 푸욱 빠지기 전, 들려온 이름에
봉황은 그만 TPO를 완전 망각해 버린 것이다.
"푸하하하핫! 기린이래, 기린!"
기린이라면 목길고 다리 못 굽히는 그 길쭉한 동물?
갑자기 기린이 물마시는 법이 떠오르면서
봉황은 그야말로 배가 아파 움켜쥔 상태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들은 단상의 괴상한 이름의 주인공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발광을 하는 봉황에게로 쏟아졌다.
심지어 유치원 동기라는 것만으로도 치떨리는데
고등학교마저 같이 오게된 길지 않은 평생의 악우, 재형이도
연민 1%를 섞은 '지랄하네'눈빛으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안 웃겨? 기린이래, 기린!"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말을 힘겹게 토해내며
봉황은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재형은 그런 한심한 원수를 찌릿 째려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왜 이 녀석은 자신의 이름이 반.봉.황. 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걸까.
객관적으로 봐도 기린보단 봉황이 웃긴다.
그것도 사내새끼 이름이라면 확실히 플러스.
그런 주제에 기린을 비웃다니…
더구나 저 기린이 어떤 기린이냐.
용모단정, 성적우수는 기본이요, 어느 모로 보나 완전무결의 결정체다.
찬서리가 풀풀 날리는 저 차가운 눈을 봤다면
웃기는커녕 넌 심장마비로 죽었을지도 몰라, 임마.
하늘의 총애는 물론이거니와 학교장을 위시한
모든 교사 학생들의 아이돌격인 존재란 말이다. 이 촌놈아. 에휴.
분명히 말해두는데…,
"반봉황."
"웃기지? 그치? 에헤헤, 진짜 웃기다. "
"당분간 나 아는척 하면 죽는다."
"에엑?"
"지금부터 유효하니까 웃던 거나 마저 웃어. 생판 첨 보는 놈."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웃고 있던 봉황의 면전에 날아온 것은
여학생들의 엄청난 비명과 노기등등한 교사들의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도륙을 낼 듯 봉황을 노려보던 담임선생님은
봉황의 귀를 잡아끌어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아앗, 이거 봐요, 놓고 말해욧! 아야야, 아악!"
한쪽 귀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봉황의 몰골이 우스웠던지
원망어린 눈초리의 여학생들, 그리고 일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학생들은 그것 참 샘통이라며 킥킥 웃어댔다.
뭐니뭐니해도 이곳은 그 이름도 찬란한
'나리'사립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친
갑부집 애들이 모이는 고등학교 -비록 봉황처럼 간혹 역수입되어 들어오는 녀석들도 있지만.
아, 재형은 예외다. 재형은 바로 이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 출신이시다.-로 유명한 그곳이 아닌가.
감히 자신들의 마돈나를 비웃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얼음공주라는 이름을 가진 한떨기 매화, 김기린이라면 더욱 말이다!
"자, 어서 사과해."
봉황은 얼얼한 귀를 어루만지며 못마땅한 눈으로 담임을 한번 흘겨봤다가
불끈 쥐어지는 주먹에 놀라 얼른 눈을 돌렸다.
그 앞에는 한 여학생이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로 서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고 있어 하얀 볼의 경계와 보기좋게 붙은 귀모양만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이 녀석이 바로 김기린인가 보군.
봉황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니가 김기린이냐?
이름 특이해서 놀림 좀 많이 받았겠다. 만나서 반가워."
"야 이자식아! 사과하라니까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얼굴이 시뻘개서 날뛰는 담임원숭이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봉황은 기린에게 자기 할말만 하고 있었다.
"실은 나도 이름이 좀 특이해. 봉황이거든, 반봉황.
그래서인지 이름이 특이한 애한텐 나도 모르게 동병상련의 심정이 되지 뭐야.
그런데 기린은 처음이라서… 너도 상당히 고생 많았겠다. 김기린."
그리고 기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봉황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로 봉황을 지나친 시선은 선생님에게 머물러 있었다.
박력있는 미모에 놀란 자신이 괜히 창피해서
봉황은 허세를 부리며 기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기린은 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기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에 기린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물같았다.
겨울산 바위틈바구니에서 졸졸 흐르는 눈덮인 개울물.
아름답고 깨끗하지만 차갑디 차가운 물.
너무 맑아서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그런 슬픈 물.
봉황이 혼자서 그런 망상을 하고 있을 때
담임의 손은 봉황의 머리를 눌러 기린에게 절을 하게 만들었다.
"익! 이거 안 놔요? 이 폭력교사!"
"너야말로 빨리 사과해!"
둘이서 악다구니를 써가며 티격태격하는 광경을 기린은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받은 걸로 할 테니까 됐습니다. 이제 올라가도 될까요?
시간이 너무 지체됐네요. 그럼 먼저 실례합니다."
기린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단상으로 다시 올라간 이후로도
남겨진 두사람은 여전히 시끌벅적 다투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도 사람들의 눈길은 봉황을 향해 있었고
그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지만 둔하디둔한 봉황이 알아챌 리 없었다.
그는 기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나를 무시한다 그거지?
그런데 말야, 어쩌냐. 난 네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봉황은 한참 동안 기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한번도 느끼지 못한 생소한 기분이었다.
너무 완벽한 것을 보면 부서트리고 싶다던가.
그러나 봉황은 기린의 가면 같은 얼굴에서 완벽함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린의 차가운 미모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표면만을 보지만 봉황은 기린에게서 그림자를 감지해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뒤에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손을 내밀어 달래줘야 할 것만 같은, 너무나 가련한 작은 몸.
그리고 봉황은 확신했다.
자신이 기린과 만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그래, 바로 너야. 네가 나의 운명이었어.
김기린.
넌 앞으로 내가 접수한다. 오케이?
봉황은 자신의 앞에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기린이 자신을 보게 하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처음으로 사람 자체에 갖는 관심이었다.
늘 부유하는 유령들처럼 떠다니던 현실이라는 공간이
갑자기 봉황의 앞에 찬란한 색을 가지고 펼쳐졌다.
"김기린, 넌 이제 내꺼야. 캬캬캬캬캿"
때아닌 웃음소리에 다시 한번 째릿 시선이 몰렸지만
이미 망상에 빠진 봉황은 그딴것엔 전혀 아랑곳없이
혼자서 상상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미래를 떠나니고 있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행복의 성에 들어선 봉황을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유치원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엄마가 저 새끼 부모님한테 끽 소리도 못한다고 해서
3년만에 보는 옆집놈 수발을 하게 된 재형은
골치가 아파 신경질을 내며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 씨발. 저 새끼는 그냥 미국서 끼대살지,
한국엔 왜 온다고 지랄을 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엄마는 왜 하필 저 새끼네 부모님의 직속후배란 말인가!
난 정말 의사같은거 안 할란다.
진짜 3D란걸 의사 같은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더럽게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진짜로 더럽다.
더구나 학교선후배, 인턴선후배, 레지선후배 등등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의 계급까지 엄연히 존재한단 말이다!
암턴 이 새끼 머리통을 한번 흔들어 줄 필요는 있다.
그 뒤에도 꼴통짓을 한다면 진짜 굿바이다.
집안의 친분땜에 고등학교 왕따가 될 순 없단다.
재형은 아무도 듣지 못한, 혹은 들었더라도 안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만,
봉황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호언장담을 들은 네 명 중의 하나로서 조용하게 내뱉었다.
"새꺄, 김기린이 그렇게 쉬운줄 아냐?
봉황(鳳凰)은 금(禽), 기린(麒麟)은 수(獸).
니들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야."
진지한 재형의 충고에도 봉황은 왜에? 하는 멍청한 눈으로 재형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목(木)이고 토(土)라고 해도 난 기필코 기린이랑 결혼할 테다!"
"…… 아까 내가 한 말, 절대 잊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