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10년 11월 22일 오전 10시 가량.
고물이가 더 없이 푸르른 하늘을 쳐다 보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
그 마지막 고빗길에서 우리의 고물이는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한때 하늘나라에서 제우스신과 함께 우주를 날아다니던 페가수스의 후손.
그 한없는 자부심.
하지만 이제는 어떤 고물상 주인의 레져용 승마마필의 인생 아니 마생을 살고 있다.
물론 고물이는 이것이 자신의 업보에 따른 윤회의 한 국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이렇게 묵묵히 살다 보면 이 다음 생에서는 미국 켄터키 더비에서 미국의 대통령과 엘리자베드 여왕의 박수를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종마로 낙점되어 미국과 영국을 드나들며
수많은 암말들에게 성수를 뿌려주게 될 것이다.
고물이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젖어든다.
그래 이 생에서는 참도록 하자.
수도자 아니 수도마의 자세로 이번 생을 마감하자.
그리고 물을 한입 들이키려는 순간
살짝 벗겨져 있는 빗장이 고물이의 눈에 들어왔다.
360도를 볼 수 있는 말 특유의 광범위한 시각능력.
그것이 이 빈틈을 놓칠 리는 없었다.
코끝으로 문을 슬쩍 밀어본다.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리고 눈 앞에 열려 있는 거대한 세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비록 이곳이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의 어느 이름없는 고물상이긴 하지만
로마 교황청이던 몽고의 울란바토르던
결국은 길이 뚫려 있게 마련이다.
더욱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과는 달리
말에게는 여권이나 출입국 허가가 필요없다.
그렇다. 나는 이 세상 어디에나 갈 수 있는 말이다.
법에서도 모든 도로에서 우마가 최우선 차량으로 간주되어 있지 않은가
자동차 전용도로만 아니라면
말과 소가 먼저다.
고물이의 몸은 이미 고물상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고물이는 지긋이 이 세상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는 멀거니 하늘과 땅바닥만 쳐다보는 마생이었지만
이제는 전후좌우로 인간들이 만들어 놓았다는 이 우스꽝스러운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다리가 네개긴 한데 그것이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앞으로 가는 저 기계들.
어떤 것은 두개로도 앞으로 간다.
도로 빽빽히 가득차서 어쩔 줄 모르고 기름냄새 나는 방구만 빵빵 끼어대는 저 볼썽 사나운 기계들
양보 정신일랑 눈꼽만치도 없어서 틈만 나면 끼여들고
또 끼여들었다고 온갖 상욕을 내뿜는 저 인간들의 입과 혀
그 소리들을 들어보니 인간 스스로도 인간이 개만도 못하다고 하는군
적어도 개보다야 말이 나을 테니
인간이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이 인간을 타야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인간들에게 나의 등을 빌려줄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군.
다음 생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야겠다.
그리하여 마권해방운동을 펼쳐야지
고물이는 자동차들을 피해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쌀쌀한 날씨에도 기를 쓰고 하체를 최대로 드러내고 다니는 여자 인간들
머리 갈기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 인간들
대머리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모자를 많이들 쓰고 다니는지.
어쨌든 비켜라
고물이가 나가신다.
울란바토르를 거쳐
로마까지
너네 인간 마르코 폴로가 지나갔던 길을
이제 이 고물이가 거꾸로 밟아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나폴레옹의 백마가 포효하듯이
앞발을 높이 올려 힘찬 울음소리를
저 하늘 높이 울려 퍼뜨렸다.
순간
몽롱한 정신 속에서 서로 입을 맞추고 있던 두 젊은 남녀 인간들의 눈동자가
말보다도 더 크게 휘둥그레해졌고
그 눈동자 속에는
바로 자기들 앞에서 용트림하고 있는 고물이의 모습이 비쳐져 있었다.
"끼약"
언제 우리가 사랑했느냐는 듯이
혼비백산하며 줄행랑을 치는 남자 인간
그리고 뾰족구두 때문에 뒤뚱거리다 결국 나자빠져 버린 여자 인간.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그 여자인간의 가방
아마도 베네통 짝퉁인듯
드디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물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말이다"
"신고해라"
"112야 119야?"
"요즘 번호가 자꾸 바껴서 어디다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럼 114에 물어보면 되쟎아"
고물이는 말이다
실은 말은 인간보다 훨씬 잘 놀란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놀라지 않고 인간들의 아수라장을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인간들
고물이가 다가가기만 해도 하얗게 질려버리는 저 털 하나 없는 얼굴들
원숭이와 인간은 뺨에 털이 없는 점에서 똑같다.
이러한 인간세계의 특성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고물이는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인간의 도로를 철학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삐뽀 삐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새울음 소린가?
그리고
"왱~"
이 새는 또 무슨 새일까?
아니면 혹시 아시아의 사자 아닐까?
하여간 요란한 소리 때문에 고물이는 뒤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빨간색 차 한대가 고물이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인간들이 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잡아라"
고물이의 본능이 발동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은 동물.
오로지 튀는 것만이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드디어 뛰기 시작했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에서 동쪽으로
고물이는 끝없이 뛰기 시작했다.
최우선 차량의 자격으로 달리는 것이니만큼
도로에서 고물이를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물이의 적수가 있다면 그것은 두발로 달리는 저 오토바이들
하지만 그들도 신호위반 과태료의 공포 앞에서
정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네발로 달리는 저 뒷편의 빨간 자동차는
이리 막히고 저리 막히고 하면서
아예 따라올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
법 위에 군림하는 고물이의 질주가 한 십여분 지속되자
주변은 늦가을의 정취를 풍기는
강변으로 변했다.
그리고 저 앞으로 강물 위로 세워져 있는 다리 하나가 보였는데
그 다리에 인간이 붙인 이름은 팔당대교라 했다.
평생 처음으로 그 다리를 본 고물이
본연의 호기심으로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다리 위로 고물이가 올라섰고
대교에 진입하려는 차량들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휴대폰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교위의 차들 뿐만 아니라
주변 아파트 사는 인간들까지도
고물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가
휴대폰으로 고물이의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결국 팔당대교가 정체가 되고
이윽고
이번에는 2대의 빨간 차들이 저 아래에서 고물이를 향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고물이도 이제는 공포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아시아의 빨간 사자 두마리가 고물이를 잡아먹으려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고물이의 경주마로서의 화려한 복귀가 시작되었다.
팔당 유원지를 오른쪽으로 바라다보면서
고물이는 앞으로 앞으로
전력 질주를 해 나갔다.
터널이 나왔지만
돌아갈 곳은 없었다.
그래서 터널을 몇 개 통과하였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다 보았지만
아시아의 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포기하고 다른 먹이감 찾으러 갔나보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또다시 그 삐뽀소리가 아련히 들리기 시작했다.
고물이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전주집가든을 지나치고
도둑과 시인 카페를 지나
또바기 영양돌솥밥
석가생오리촌
다산 정약용 유적지
인간들은 왜 이렇게 먹는 것을 즐겨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철학산책을 더 이상 즐길 여유는 없었다.
아시아의 사자 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깝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다 보았다.
빨간 차가 이번에는 4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와지고 있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속도가 매우 빨랐다.
고물이의 마음속에 경마장에서 레이스를 하던 그 시절을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인간들이야 돈놓고 돈먹기 하던 말던
말이 그 때문에 최고속도를 낼 이유는 없는 것이다.
경마장 말들은 그래서 자기가 가진 속도의 80% 정도 밖에는 내지 않는다.
그래서 간간이 999가 터지는 것이다.
아무리 한물간 말이라 하더라도
최고속도를 내게 되면
이를 따라올 정상적인 말은 한마리도 없다.
미쳐야만 그 속도를 내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속도처럼 말이다.
눈앞에 양수대교가 나타났고
고물이는 여전히 이를 향해 달려나갔다.
양수리로 진입해서
그 동네 사람들을 멍하게 만들어 놓고는
양평까지 달려버렸다.
그리고 그 도시속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가
해질녁이 되어서야
고물이는 아시아의 그 빨간 사자들에게 잡혔다.
일단 인간들은 고물이를 가로수 나무에 묶었다.
고물이에게 한번만 걷어차여도 사망이지만
의외로 인간들은 용감했다.
그래도 고물이를 잡아먹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일단 마음은 놓였다.
하지만 인간들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주인은 누구인지
뭘 먹고 사는지
혹시나 목말라하지 않는지
도대체 어디다 돌려줘야 하는지
가면 갈수록 갑갑해했다.
이즈음 국내유일의 승마장 여사장인 조성옥 원장은 노래방에서 그의 18번을 열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업가적인 촉각은 언제나 그녀의 휴대폰을 향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조원장 "여보세요."
119 "네 혹시 건국승마 사장님이십니까?"
조원장 "예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통상 조원장이라 부르죠."
119 "오늘 그곳 휴일입니까?"
조원장 "네 휴일이예요."
119 "죄송하지만 휴일이라도 지금 말 한마리 입고시킬 수 없겠습니까?"
조원장 "무슨 일인데요?"
119 "네 그러니까 …."
119 대원들은 그 동안의 사건 이야기를 설명했고 특히 경기도의 모든 승마장들이 월요일을 휴무로 하는 바람에 말을 맡아줄 승마 시설이 없음을 하소연하였다.
조원장 "그러시다면 저희 마장으로 데리고 오세요."
119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하나요?"
조원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원장 "그럼 제가 그리로 가지요."
119 "감사합니다."
조원장은 평소 그녀가 거래하던 마차 운영자에게 연락을 하여
경기도 양평으로 마차를 한대 대라고 하였고
그녀 역시 양평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해 본 즉
나무에 묶여있는 말 한마리와
그 주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차량들과 대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능란한 솜씨로 말을 풀고 이끌어
현장에 도착한 마차 속으로 집어 넣고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에 위치하고 있는
건국승마 마장에
안전하게 고물이를 입고시켰다.
이것이
동원차량 총 4대
동원 소방관 총 8명
2010년 11월 22일 오전 10시에서 시작하여
당일 오후 10시까지
총 12시간 동안 이어진 고물이의 기나긴 여정이었다.
ps
고물이의 주인은그날 하루종일 고물이를 찾아다니다가
저녁 늦게서야 고물이가 건국승마 마장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다는 연락을 받고
그 다음날 그곳으로 자기 부인과 함께 찾아와
조성옥 원장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고물이를 다시 찾아갔다.
고물이의 주인은
고물상과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라서
따로 마차를 부르지 않고
직접 고물이를 타고 갔으며
그 부인만 승용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상은 2010년 11월 22일에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기초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