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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병마대원수 을지문덕 전기』2. 제1차 여수전쟁의 개전 (1)

대모달 |2011.01.02 17:56
조회 77 |추천 0

 

● 수(隨) 문제(文帝)의 등극과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통일

 

6세기말 중원 대륙은 여전히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져 있었는데,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인 돌궐(突厥)과 거란(契丹)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고구려는 남북조의 국가들과 등거리 외교를 벌이고 유목민족들과 힘을 겨루며 옆구리에 붙어 있는 말갈(靺鞨)을 거느렸다. 동북아시아는 이때 팽팽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주(北周)가 575년 북제(北齊)를 아우르고 중국의 북쪽지역을 거의 통일하였다.

 

북주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양충(楊忠)은 문제(文帝) 우문태(宇文泰)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수국공(隨國公)이라는 공신 칭호를 받았고, 양충이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양견(楊堅)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양견은 무장(武將)으로서 북주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수훈(殊勳)을 세우고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 재위기에 자기 딸을 태자비(太子妃)로 들여앉혔다.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양견의 사위인 선제(宣帝) 우문윤(宇文贇)은 용렬하고 어리석은 황제였기에 폭정을 일삼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양견은 선제를 끼고 모든 권력을 휘어잡아 정사(政事)을 제멋대로 처리했다.

 

선제가 죽자 양견의 외손자인 정제(靜帝) 우문연(宇文衍)이 제위에 올랐다. 양견은 한점 꺼릴 것 없이 국정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581년 2월 양견은 어린 정제를 협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隨)로 정했다. 그가 제위에 오를 때 일부 반대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만큼 북주가 나약하였고, 양견이 오랫동안 자기 세력을 키우며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황(隨皇)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북주(北周)의 흔적을 싫어하여 북주의 수도(首都)였던 장안(長安)을 파괴해버렸다. 그리고 원래 위치를 약간 틀어서 새 수도를 건설한 뒤 이름도 장안에서 대흥(大興)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부역을 감면하고 법령을 간소하게 만들었으며,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상당히 안정되었다. 그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약 400년 동안 온갖 부역과 형벌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문제는 또 돌궐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쪽의 장성을 수리하였다.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 585년에 동돌궐(東突厥)과 서돌궐(西突厥)로 분열되자 수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켰다. 이제 강남에서 수(隨)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왕조는 진(陳)뿐이었다.

 

문제가 대신들을 불러모아 진국(陳國)을 칠 대계를 의논하였다. 이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熲)이 이렇게 말했다.

 

“진국(陳國)을 치려면 먼저 진국이 저장해두고 있는 식량부터 없애버려야 합니다. 강남의 집과 식량창고들은 거의 참대나 볏짚으로 되어 있기에 불만 놓으면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그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벼 수확을 할 때 우리는 군사를 풀어 그들을 교란하고, 그들이 병력을 집중시키면 우리는 군사를 거두어들입니다. 몇 번만 이렇게 거듭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진짜로 싸우려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방비를 늦추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기회를 봐서 장강(長江)을 돌파한다면 강남 땅의 절반은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군사를 풀어 강남을 교란하도록 하는 한편, 개봉자사(開封刺史) 양소(楊素)에게 전쟁에 쓸 배를 정비하여 강을 건널 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진국(陳國)의 군주인 후주(後主) 진숙보(陳叔寶)는 대대적으로 공사를 벌여 정자와 누각을 건축하고, 옥석으로 깐 층계와 황금으로 된 벽으로 궁전을 치장하고는 온종일 자기가 사랑하는 장귀비(張貴妃)·공귀빈(孔貴嬪)에게 파묻혀 지냈다. 그는 누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담벼락을 둘러싸고 있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사람들을 시켜 담벼락 부근의 귤나무들을 베어내게 하였다. 꿈에 여우를 보고는 요귀의 작당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절간의 노예로 팔려가는 광대극을 벌이고는 겨우 재앙을 면했다고 좋아했다.

 

588년 10월에 문제는 후주의 죄악을 낱낱이 폭로하는 조서(詔書)를 내리고 그것을 30만부나 베끼게 한 다음 강남의 여러 지방에 살포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진왕(晋王) 양광(楊廣)을 대원수(大元帥)로 임명해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국(陳國)을 정벌하게 했다.

 

급보를 알리는 글이 눈송이처럼 건강(建康)에 날아들자 당황한 후주는 대신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도관상서(都官尙書) 공범(共犯)이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장강은 예로부터 천연요새로 알려져 있으므로 날개가 돋치지 않는 한 수나라의 군사들이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변방을 지키고 있는 장령들이 상금을 타먹기 위해서 적국의 정세를 거짓으로 보고한 것이니, 그 몇 놈의 목을 잘라 버린다면 다시는 거짓말을 꾸며대지 못할 것입니다!”

 

미련한 후주는 공범의 말에 기가 살아나서 가슴을 쭉 내밀며 머리를 쳐들고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구나! 건강은 자고로 제왕의 도읍이었으니 하늘의 명을 받고 황제가 된 짐(朕)은 두려울 게 없다. 이전에 북제(北齊)가 세 번이나 쳐들어왔으나 매번 패배했고 북주(北周)도 두 번이나 침입했으나 두 번 모두 실패했거늘 오늘 하잘것없는 양견이 다 무엇이냐!”

 

589년 정월이 되자 하약필(賀若弼)과 한금호(韓擒虎)가 인솔하는 수군(隨軍)의 선봉부대가 빠른 속도로 장강을 건너 건강성을 포위했다. 그 때 건강성에는 전투가 가능한 진국(陳國)의 병력이 10만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성의 지세가 험준하여 조직력을 잘 정비하고 적극적으로 수비만 했다면 건강성은 적군에게 쉽사리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적병들이 성 밑에 들이닥치자 후주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이 때 표기장군(驃騎將軍) 소마가(蕭摩訶)가 수나라의 군사들이 발을 튼튼히 붙이기 전에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격퇴시켜야 한다고 제의했다. 공범도 후주에게 “신(臣)은 군대를 출동시켜 결전을 벌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다.

 

후주는 마침내 출전을 허락했고, 소마가는 중랑장(中郎將) 임충(任忠)과 함께 진군(陳軍)을 이끌고 성 밖에 나가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진군(陳軍)의 병사들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수군(隨軍)의 한 번 공격에 대열이 무너지며 꽁무니를 뺐다. 임충은 수장(隨將) 한금호에게 투항하여 건강성의 정문인 주작문을 통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진국(陳國)의 문무백관들은 저마다 꽁무니를 빼고 후주만은 여전히 궁전에 앉아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수군(隨軍)이 성 안으로 쳐들어온 것을 뒤늦게 알고 겁에 질려 보좌에서 뛰어내려 후당에 달려가 장귀비와 공귀빈의 손을 잡고 궁전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다. 그들이 경양전에 있는 말라빠진 한 우물가에 이르렀을 때 앞에서 함성이 울려왔다.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한 후주는 두 명의 첩과 함께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월 스무 이튿날에 진왕 양광이 건강에 입성함으로써 진국(陳國)은 수국(隨國)의 침략을 받은 지 넉달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검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중(關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겨에 콩가루를 섞어 먹는 것을 알고 황족들 뿐만 아니라 대신들까지 재해가 끝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또 셋째 아들인 진왕(秦王) 양준(楊俊)이 수하의 사람을 사주하여 고리대를 놓게 하고 협잡을 일삼게 하여 많은 하급관리와 백성들의 재산을 탕진시키고, 궁전을 화려하게 지어 외국에서 공물로 바친 향료를 벽에 바르는가 하면 황금으로 층계를 장식하고 궁전의 벽마다 체경(體鏡)을 걸었으며, 수많은 미녀들을 불러모아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생활을 즐기는 등 국법을 어기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을 일삼자 문제는 양준을 파직하고 감옥에 가두게 하여 음식도 대주지 못하게 했다. 대장군(大將軍) 유승(劉昇)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양소(楊素)가 양준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권유했으나 문제는 듣지 않았고 결국 양준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문제는 진국(陳國)을 정벌할 때 얻은 전리품을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고 진국(陳國)의 영토를 떼어 신하들에게 식읍(食邑)으로 주지도 않았으며 약탈도 금지시켰다.

 

진국(陳國)의 멸망으로 중원 천하는 이제 수국(隨國)의 것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위덕왕(威德王)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수국(隨國)에 사신(使臣)을 보내 중원 통일을 축하하고 고구려(高句麗)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遼東) 지역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실에 대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제3장에서 “저 신라와 백제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생각지도 않고 수국(隨國)에 고구려 침벌(侵伐)하기를 청하러 가는 사자(使者)가 길 위에 연속하였으며, 고구려의 동정을 염탐하는 간첩들이 사방에 늘어섰다…… 아, 슬프다. 형제가 집안에서 다투다가 감정이 상하여 밖의 도적을 청해 와서 보복하려는 것은 진실로 더할 수 없이 애석한 일이다”고 비판하였다.

 

그 무렵에 동돌궐의 한 세력인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수국(隨國)에 투항하여 문제(文帝)는 중국 북방의 초원지대도 자국의 세력권에 거의 편입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였다. 문제는 동방의 맹주를 자처하고 있는 고구려를 복속시키지 않고서는 수국이 진정한 ‘천하의 중심’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만들려고 골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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