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동성전투(遼東城戰鬪)
수장(隨將)들은 많은 군사를 동원해 끊임없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했지만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성벽에서의 공방전(攻防戰)이 한참 벌어지고 있을 때, 수(隨)의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이 거느린 군사들이 충차(衝車)를 앞세우고 남문으로 밀어닥쳤다. 하지만 요동성의 문은 옹성(甕城)으로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쉽게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옹성은 입구만 남겨 놓고 성문을 항아리처럼 둘러싼 형상으로 적군이 안으로 들어서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형원항은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군사를 물려야만 했다.
한편 중랑장(中郎將) 토만서(吐萬緖)의 부대는 전호피차(塡壕皮車) 밑에 몸을 숨긴 채 성벽 밑의 땅을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 또한 그리 순조롭지가 않았다. 위에서 쏟아지는 날벼락들을 피하며 힘겹게 작업을 했는데, 한 장 정도 파 내려가자 물이 새어 나왔다. 놀랍게도 성벽 아래로 물길이 나 있었다. 이는 태자하(太子河)와 연결된 물길이었다. 굴을 파던 수군(隨軍)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까지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이었다.
이들로부터 작전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좌군의 주장인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지휘하던 군대 역시 성벽을 넘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으므로 우문술은 일단 군사를 물렸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전투를 치뤘기에 수군 가운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사한 자들 역시 피로로 인해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었다.
우문술은 일단 군사들을 물려 성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친 후에, 육합성(六合城)에 있는 양제(煬帝)에게 가서 전과를 보고했다. 양제는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육합성을 지은 후,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제는 노기가 충천하여 당장 장수(將帥)들을 불러들였다.
“고작 요동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하다니, 그러고도 짐(朕)의 장수들이라 할 수 있는가?”
좌중에는 침묵만 흘렀다.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이 나섰다.
“요동성은 견고하고 빈틈이 없을 뿐 아니라 고구려 군졸들의 저항이 예상보다 훨씬 거세옵니다. 단기간에 성을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듯 하옵니다.”
“저들보다 수십 배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그깟 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한단 말이냐?”
양제의 질타가 쏟아지자, 우문술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때 좌후위대장군(左侯衛大將軍) 단문진(段文振)이 나서며 아뢰었다.
“요동성은 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약점을 보완해 왔기 때문에 일거에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이곳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요동성을 놓아두고 바로 평양성을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성을 빼앗고 고구려왕을 사로잡는다면 나머지 성들은 자연 항복해 올 것입니다.”
단문진은 수군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그들이 수백만을 헤아리는 대군이라는 점은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만큼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이미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쳐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성안으로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수군이 현지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오로지 후방에서 운반되는 식량에만 의존해야 하는데 그 많은 식량을 먼 거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대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오랫동안 이어진 무리한 토목사업과 원정으로 인해 수(隨) 국내의 상황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전쟁을 오래 끈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단문진 장군이 내놓은 작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요동의 많은 성들을 그대로 남겨 놓고 진군한다면 항상 후방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고, 보급선이 끊길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비해 궁여지책으로 군사들이 식량을 소지하고 간다면 진군의 속도가 떨어져 고구려군이 미리 대비할 여유를 줄 뿐 아니라 오랜 행군에 지친 군사들이 무거운 식량을 몰래 버릴 지도 모릅니다.”
우중문은 과거에 고구려를 침공했던 나라들이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에도 결국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요동의 고구려 성책들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장군들 사이에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오고 가는 동안 양제의 가슴속에는 분노만 쌓여 갔다.
양제는 참다못해 서슬 푸른 명령을 내렸다.
“전군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라. 우중문의 우군은 동문을, 우문술의 좌군은 남문을 치도록 하라. 그리고 중군은 서쪽과 북쪽 성벽을 압박하도록 하라. 만약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너희들 목부터 치겠다.”
양제는 요동성을 점령하고 후방의 안위를 확보한 후에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정면 돌파로 고구려 성들을 모조리 굴복시킴으로써 천하에 본때를 보이겠다는 양제의 오기가 작용했다.
이튿날부터 수군의 맹렬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성으로 돌격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군사들은 가차 없이 목이 베어졌다. 수군은 더 많은 발석차(發石車)를 동원하여 쉴 새 없이 돌덩이를 발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요동성 수비군을 괴롭혔다. 곳곳에서 바위에 맞아 깨지고 터져서 죽거나 다치는 군사들이 늘어났고, 성곽의 일부가 부서지기도 했다. 하지만 요동성 수비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체와 부상자는 곧바로 안치소(安置所)와 군의(軍醫)에게 보내졌고, 부서진 성곽은 임시방편으로나마 재빨리 보수가 되었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더 많은 수병(隨兵)들이 성벽으로 오르는 사다리에 매달렸지만, 완강한 방어에 막혀 꼭대기에 이르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어져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동안에 요동성의 군사들 또한 화살에 맞아 줄기 꺾인 국화처럼 고꾸라졌다.
치열한 접전이 한 달도 넘게 지속됐다. 60만의 수군(隨軍)은 쉴 틈도 없이 줄기차게 요동성을 몰아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5만명 가까이 이르는 사상자만 내고 있었다. 요동성을 지키는 4만 6천여명의 고구려군 역시 피해가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5천여명의 전사자와 2천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는데, 전사자 가운데는 요동성의 동쪽 방어를 담당하던 대사자(大使者) 온준(溫俊)도 포함돼 있었다. 요하(遼河)에서 수군(隨軍)의 도강작전(渡江作戰)을 저지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냈던 온준은 그의 아버지 온달(溫達)이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군인 답게 전장(戰場)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쳤다. 온준의 부하 장수인 대형(大兄) 해승유(解昇裕)는 왼쪽 다리에 적군의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양쪽 군사들이 모두 지쳐 있었지만 적은 수로 싸워야 했던 고구려 군사들의 피로가 더욱 심했다. 하지만 요동성주(遼東城主)인 대형(大兄) 고연탁(高連卓)은 이미 전쟁에 대비해 포노(砲弩)와 강노(强弩) 같은 무기를 많이 만들어 두었고 군량도 충분히 비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수성전(守城戰)을 성공적으로 이끌 확신이 있었다. 군사들의 사기 또한 드높았다. 그에 비해서 수군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수십만의 대군이 번갈아 가면서 공격을 했는데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요동성에 대해서 경악을 넘어 경외심(敬畏心)을 가졌다.
수십여 일 동안 이어진 교착상태는 자부심이 강한 우중문에게 치욕이었다. 별달리 뾰족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성을 함락시킬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질 것이었다. 더구나 임유관(臨渝關)에서 요하에 이르는 길에 난데없이 출몰하는 거란병(契丹兵)과 고구려군(高句麗軍)으로 인해 벌써부터 보급선(補給線)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성 주위의 성들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우중문은 수하의 장수들을 소집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방법으로는 성벽을 넘어서기 어려울 듯하오. 다른 방책이 없겠소?”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우익위장군(右翊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이 의견을 개진했다.
“태자하의 모래를 이용해서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성 높이만큼 쌓은 후에 이를 밟고 성벽으로 오르면 됩니다. 비록 많은 노고를 감수해야겠지만 완성만 된다면 대군이 일시에 쇄도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通路)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리 된다면 아무리 질긴 고구려군이라도 두 손을 들게 될 것입니다.”
우중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을 틈타 은밀히 일을 진행한다면 큰 희생을 피하고도 모래주머니 언덕을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우중문은 설세웅에게 모래주머니 만드는 작업을 지시했다. 그리고 요동성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수일에 걸쳐 수백만 개의 모래주머니가 완성되자, 설세웅은 어둠을 틈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군사들은 입에 매를 물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모래주머니를 날랐다.
그러나 요동성주 고연탁은 이미 수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설세웅이 이끄는 수군이 성벽에 다가올 때나 모래주머니를 쌓을 때도 모르는 체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주기 위해 그들이 충분히 함정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것도 모르고 설세웅의 군사들은 성벽 위에서 파수 보는 군사들의 눈을 피해 성벽을 따라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렸다. 차츰 작은 언덕이 생겨나더니 산더미로 변해갔다. 모래주머니가 성벽 꼭대기에서 한 길 정도 밑에까지 쌓였을 때, 설세웅의 군사들이 모래주머니로 만든 길을 따라 성벽 위로 오르자 고구려 군사들이 느닷없이 커다란 기름 항아리를 들고 나타났다.
수백 개는 족히 됨직한 큰 항아리가 모래주머니를 밟고 올라오는 수군 병사들을 향해서 일제히 들이부어졌다. 천지사방에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앞서서 비탈진 길을 오르던 수병(隨兵)들이 기름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들에 밀려 뒤에 따라오던 군사들도 덩달아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수병들은 온통 기름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때 성벽 위에서 일제히 횃불과 불화살이 날아올랐다. 모래주머니 길 곳곳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성벽을 향해 달리던 설세웅의 군사들은 졸지에 불길에 휩싸이는 처지가 되었다. 온몸에 기름을 칠하고 있는 수병들은 화마(火魔)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불길은 수많은 수군 병사들을 집어 삼켰다. 불길이 타 들어가면서 수군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 뜬 별무리가 놀라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끔찍한 참상이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그 위에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부하들이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본 설세웅은 급히 퇴군을 명했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살아남을 목숨이 하나도 없을 듯했다.
수군 병사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전우들을 뒤로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설세웅도 그 무리에 섞여 간신히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우중문은 성벽 아래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우중문이 군사들을 이끌고성벽 가까이로 달려가 보니 살이 타는 냄새와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여기저기 몸에 불이 붙은 수병들이 불구덩 속에서 뛰쳐 나왔다. 설세웅도 온통 불에 그을린 참혹한 몰골로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쳐 오고 있었다. 우중문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 마지막 작전조차 실패로 돌아갔기에 요동성의 함락이 더욱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처럼 고연탁이 지휘하는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수군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힘으로 막아내고, 꾀로 승부하면 꾀를 내어 대응하는 공방전을 벌이며 3개월이 넘게 잘 버티고 있었다. 양제로서는 요동성에 붙잡혀 허송세월한 셈이었다. 양제는 화가 나서 제장을 다그쳤다.
“내가 직접 요동에 오는 것을 반대하더니, 너희들의 무능함을 들킬까봐 두려워해서 그랬구나. 지금 여기 와서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니 모두 다 목을 베고 싶을 따름이다. 너희들이 그토록 죽음이 두렵다면 힘을 다해서 싸우지 말라. 내가 너희 모두를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가?”
수군 장수들은 두려워 벌벌 떨면서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미 탁군에서 출정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속전속결(速戰速決)은 애초부터 어긋나 있었다. 궁지에 몰린 양제는 결국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평양성(平壤城)을 직접 공격하기로 했다.
“우중문, 우문술은 정예 병력 삼십만을 선발하여 그들을 이끌고 천산산맥을 넘어 곧장 평양성을 쳐라. 이미 동래를 출발한 내호아의 수군(水軍)이 평양성으로 향하고 있을 테니 협공(挾攻)을 펼쳐 고구려 태왕을 잡아라.”
우중문이 양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문제는 보급이옵니다. 이곳에서 평양까지는 수천 리 길이옵니다. 그곳까지 가는 내내 고구려의 영토이고, 그 안에는 이미 한 톨의 곡식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결국 군사들은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짊어지고 가야 하옵니다. 휴대해야 하는 식량과 무기의 무게로 볼 때, 별동대(別動隊)의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사옵니다.”
물론 양제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양성 공략이야말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물론 양제에게도 믿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바로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이끄는 해군이었다. 그의 해군이 예정대로 움직였다면 이미 패수구에 이르렀을 것이었다. 평양성은 패수구에서 지척이니 양제의 예상이 맞는다면 고구려 영양태왕은 졸지에 뒤통수를 얻어맞을 처지였다.
왕명은 지엄한 법이었다. 이미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기에 우중문도 더는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을 비롯한 아홉 명의 장수가 각기 자신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별동대에 참여했다. 이들은 고구려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각기 다른 길로 흩어져 나아가 압록수 서안에서 집결할 계획이었다. 양제는 친히 떠나는 장병들을 배웅했다. 이제 수군의 운명은 그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양제는 떠나는 우중문에게 보검(寶劍)을 내리며 격려했다.
“그대의 뛰어난 지략과 용맹이라면 반드시 큰 전공을 세울 것이라 믿는다.”
우중문은 양제가 가장 신임하는 장수였다. 비록 이번 원정에 있어서는 견해가 달랐지만 그 또한 신중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별동대라고는 하지만 이 역시 삼십만 오천 명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기세 좋게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들이 앞장서서 나아가고 그 뒤로 대열이 꼬리를 물고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우중문은 군마(軍馬) 위에 앉아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