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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신사참배를 안했다구요????

영월소나무 |2011.02.09 00:05
조회 230 |추천 1
아래 댓글에 일제 때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안 한 게 기독교라는 웃지 못할 글이 있어 올립니다.
어떤 목사가 또 그런 헛소릴 하는 지 모르겠지만 신사참배를 계획적으로 앞서서 했던 게 기독교입니다.
나중엔 헌금을 모아 전투기까지 사서 일본에 바쳤죠.

조선장로호에 대한 글...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0

아래에 기독교의 친일행위에 대해 짧게나마 올립니다.

장로교회의 변질과 부일협력 활동은 신사참배 수용에서 시작되었다. 1938년 초부터 일제는 일반 기독교인들에게까지 경찰력을 동원하여 신사참배와 국가의식을 강요하고, 개 교회는 물론 노회와 총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강요하였다.

가장 먼저 노회 차원에서 신사참배 실시를 가결한 곳은 1938년 2월 3일부터 9일까지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였다. 당시 노회장 김일선 목사 사회로 열린 노회에서 노회 종교교육부가 제안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임을 시인하기로 한 일”을 여타 제안과 함께 가결하였던 것이다.(「기독교보」1938년 5월 10일자, “평북로회 제53회 촬요.”)

변질과 부일협력, 신사참배 수용으로 시작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제34회 평양노회에서는 특별순서로 “1.국기게양 2.황거요배 3.출정군인 위한 기도와 헌금 일금 100원 4.애국예배, 5.출전황군 위문문 발송” 순서를 가졌다.(「기독교보」1938년 4월 19일자, “평양로회 제34회 촬요.”)

이 노회는 노회장이 박응률이었고, 부노회장이 주기철 목사였으며,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개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노회에서 신사참배문제가 상정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상정되었더라도 주기철 목사의 영향으로 보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기철 목사는 이 노회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평양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었다. 그리고 이 노회록 촬요에 교섭위원으로 이승길, 장운경, 오문환을 선임하고 있는데, 이들은 김응순과 함께 그해 5월 말경부터 6월 초순에 걸쳐서 평양노회 파송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정신과 기독교의 실제”를 견학시찰하고 돌아왔다. 「기독교보」1938년 7월 5일자, “富田滿씨 일행을 평양에서 열렬히 환영”).

4월 25일부터 28일까지 구례읍교회당에서 열린 순천노회에서도 “교회가 국가의식으로 국기게양, 황거요배, 신사참배 등을 하도록 노회는 지도할 일”을 결의하였다.(「기독교보」1938년 6월 7일자, “순천노회 제22회 촬요.”)

그리하여 1938년 2월 9일부터 8월 31일 사이에 국내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조 선총독부경무국,『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1938, p. 392 ; 신사참배 결의 날짜를 알 수 있는 노회는 평북노회(1938.2.9), 용천노회(1938.4.17), 순천노회(1938.4.25), 제주노회(1938.4.27), 전남노회(1938.5.6), 경성노회(1938.5.6), 충청노회(1938.5.8), 전북노회(1938.6.8)이다(이만열 엮음,『신사참배문제 영문자료집 Ⅱ』,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년 영인, p. 304, “Presbyteries taking Action in Favor of Obeisance at National Ceremonies”).

그리고 일제 경찰의 강압에 못 이겨 개인적으로 이미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 해 9월 9일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기 전에 이미 신사불참배를 부르짖는 노회는 찾아볼 수 없었다. (1938 년 5월 말 현재로 총독부 경무국에서 파악한 기독교인의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 신사참배 실시율은 다음과 같았다. 국기에 대한 경례 실시율 93%, 동방요배 실시율 94%, 신사참배 실시율 53%(森浩, “사변하에서의 기독교,”「朝鮮」1938년 11월호, pp. 57~71, p. 392)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경찰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회 총회에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 대표 박응률이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포”를 제안하여 당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선교사들의 반대 발언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가결을 선포하였다. (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하기 위해서 일제 경찰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당시 회의장 안팎에 깔려 있던 정사복 경찰관들의 살벌한 분위기와 -이만열 엮음,『신사참배문제 영문자료집 Ⅱ』,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년 영인, pp. 301~303, “An Account of the Meeting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Held at Pyengyang from September 9th, 1938 insofar as it relates to Action on the Question of Obeisance at National Shrines”, 이 일의 성공에 대한 공로로 9월 30일에 경찰관 28명에게 경찰부장 표창, 41명에게 특별상여, 20명에게 특별승급을 하여 무려 도합 89명을 포상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매일신보」1938년 10월 2일자 “신사참배문제 해결 공로 경찰관 표창, 평남도경찰부에서”).


강요 굴복에서 적극 전쟁협력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부회장과 각 노회장들이 총회를 대표하여 즉시 평양신사에 참배를 실행하기로 가결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7회 회록』, 1938, p. 9.)

더욱이 이 때 가결한 성명서는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힘써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이라 하여 적극적인 전쟁 협력을 약속하였다. 이후 장로교는 일제의 교화기구와 전쟁 협력 단체 중 하나로 전락하여 거듭되는 파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10월 17일에는 서울에서 ‘시국대응기독교장로회 신도대회’를 개최하여 경기노회와 경성노회 소속 신도들과 학생 등 3,000여 명이 모여 총독부 광장에서 미나미[南] 총독의 격려사를 듣고, 행렬을 지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오건영 목사가 대표로 옥관(玉串)을 바쳐 이른바 ‘황군의 무운장구’를 빈 다음 남대문소학교 운동장에 모여 시국대응 선언을 발표하고, 오카모토(岡本) 소장의 시국강연을 듣는 등 행사를 치렀다.(「매일신보」1938년 10월 19일자, “장로교도 3000명이 신상제에 애국행진, 본부 대광장에서 남총독의 격려를 밧고 신궁에 참배하야 무운기원.”)이어 1938년 12월 12일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와 부회장 김길창이 감리교 총리사 김종우와 전 총리사 양주삼, 성결교 이사장 이명직과 함께 일본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쓰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참배하려고 일본으로 떠났다.(「기독신문」1938년 12월 15일자, “기독교대표 5씨 이세신궁 참배차 내지행.”)

1939년 9월 8일부터 신의주 제2예배당에서 열린 제28회 총회에서는 총회 중인 11일에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총회장이던 윤하영 목사가 이사장으로, 총회에 참석한 각 노회장이 이사로, 나머지 총대들은 평의원으로 임명되고, 총간사는 정인과 목사가 맡게 되었다.

이 때 김길창 목사가 낭독한 선언은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하는 것은 황국 부동의 국시다. 우리들은 이에 더욱 단결을 공고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 전능력을 발휘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고 또한 복음 선전 사업을 통하여 장기 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함”이라고 되어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 회록』, 1939, pp. 16~17.)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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