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2상무정신 (1)

대모달 |2011.02.14 21:38
조회 109 |추천 0

 

 

○ 동학군(東學軍)에 맞서 담대한 용기 보여줘



역사기술에 있어서 가끔 정(正)과 사(邪)가 뒤바뀌거나 의(義)와 불의(不義)가 전도되기도 한다. 동학혁명운동(東學革命運動) 과정에서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오늘날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일어난 민중혁명이었다고 평가받는 1894년의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매천(梅泉) 황현(黃玹)은《매천야록(梅泉野錄)》과《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대단히 부정적으로 기술하였다. 동학도를 ‘동도(東徒)’·‘동비(東匪)’ 등으로 표현하면서 이들 중 일부의 비행을 상세히 썼다. 박은식(朴殷植)도《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서 ‘동학당은 호미와 곰방대와 가시나무총을 들고 밭고랑에서 분기하여 우리의 관군과 왜병을 상대하여 교전한지 9개월여 만에 드디어 항복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역사의 기술이 이러할 때 역사현장의 경우는 더욱 심한 편이다. 여기서는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 안태훈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안중근 일가는 동학혁명운동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갑오년(甲午年), 나는 열여섯 나이에 김씨(金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지금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 무렵 이 나라의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지금의 일진회의 근본조상)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지르며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했다(이것이 장차 이 나라가 위태롭게 된 기초가 되었으며, 일본, 청국, 러시아가 이 나라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관군은 그들을 진압하지 못해 드디어 청국 병사들이 건너오고, 또 일본 병정들이 건너와,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하여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때 나의 아버님은 동학당의 폭행을 참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키고, 포수들을 불러 모으는 한편, 처자들까지 행렬에 편입시켰다. 그렇게 하여 모인 정병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어 청계산 중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하였다.’



안중근의 회상에서 안태훈과 그 가족이 ‘동학당’을 치기 위해 의병대를 조직한 정황이 잘 나타난다. 당시 안태훈 가문의 위상은 ‘기득권층’이었다. 동학혁명운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와 함께 “횡포한 부호를 엄히 징벌한다”,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를 징벌한다”는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12개조를 내세우면서 봉기한 민중항쟁이었다. 안태훈 일가는 ‘횡포한 부호’나 ‘불량한 유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계층의식’만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안태훈 가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실제로 공격을 시도했다.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난 것은 안중근이 열다섯살 되던 해다. 동학혁명운동은 처음에는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됐으나 곧 삼남지방으로 번졌고, 이어서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찍이 한국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황해도 지역에도 동학혁명운동의 불길이 번졌다.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는 동학의 황해도 도접주(道接主) 원용일(元容日)의 지도 아래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해주 감영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각처의 양반 부호들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은 다수의 포수꾼들을 기식(奇食)시키며 청계동에서 상당한 사병을 기르고 있던 안태훈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다. 정현석은 일찍이 1883년에 원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세운 개화파 인사였다. 때문에 개화파 인사인 안태훈은 정현석과는 이전부터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래서 정현석으로부터 요청을 받은 안태훈은 포수꾼과 민병 등 70여 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에게 위협을 받던 해주감영을 구제한 일이 있었다.’



안태훈이 동학혁명군에 맞서게 된 전말이다. 안태훈은 청계동에서 70명 정도의 포수를 식객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이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사격술 등 훈련을 시켰다. 동학혁명운동에 비판적이었던 박은식은 “이때는 동아시아 전체의 사정이 급변하는 시기였으며 안중근의 활동 초기이기도 하였다. 동학당의 무리들이 각지에 세력을 뻗치고 함부로 살인약탈을 감행하였는데 그 기세는 대단히 사나웠다. 오랫동안 태평세월을 지내온 백성들은 모두 겁을 먹고 뿔뿔이 도망칠 뿐 감히 그 예봉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어서 안중근이 아버지가 조직한 의병대에 참여하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태훈이 의병을 일으키자 중근도 따라 나서려 하였다. 태훈은, "싸움판은 죽음터인데 어린 놈이 어디라고 함부로 덤비는 거냐?"라고 꾸짖었다. 중근은 "어른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않고 적당을 토벌하는데, 자식된 저로서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총을 메고 나섰는데, 싸울 때마다 앞장섰다.



몇 달 동안에 수십 차례의 전투를 겪었지만 번번히 승리하였으므로 태훈은 기특하게 여겼다. 적당들은 이 말을 듣고 대로하여, "안씨 부자가 감히 우리와 맞서다니?"라고 말하고는 격문(檄文)을 띄워 원근의 동당을 소집하니 그 무리가 무려 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청계동으로 쳐들어와 사방을 포위하고서 모조리 죽이겠다고 고함쳤다. 적당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 그때 의군은 백 명 미만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비도 튼튼하지 못한 데 대적이 갑자기 쳐들어왔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놀라 모두 도망치려 하였다.

중근은 "적들은 비록 사람의 수는 많지만 전술이 없고 기율이 없었으므로 두려울 것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며 맹사격을 하였는데 헛방을 놓은 적이 없었다. 적군은 사상자가 늘어나자 대경실색하여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 의군이 노획한 말과 총알은 부지기수였다. 당시 중근은 키가 다섯자 미만이었고 붉은 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겁을 먹은 적당들은 그를 하늘이 내려보낸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알았다. 본시 한국 풍속에 붉은 저고리는 아동들이 자주 입는 의복이었다.’



○ 40여명의 정병으로 1천여명의 동학군을 물리쳐



동학농민혁명군이 비록 오합지졸의 ‘군대’이기는 했어도 정신과 용맹에 있어서는 어느 군대에 못지 않았다. 또 자신들의 계층적 위화감 중 어떤 부분은 ‘계급해방’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그렇게 쉽게 물러설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황해도의 동학도 접주 원용일과 부접주 임종현은 청계동에 집결한 반(反)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1천 7백여 명(혹 2천명)의 동학군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 이미 동학군은 장연군·신천군·장수산성·수양산성 등 신천군의 인근 지역을 모두 점령한 터였다. 11월 14일 동학군은 청계동에서 북방으로 10여 리 정도 떨어진 박석골까지 육박하여 야음을 틈타 청계동을 기습하려고 하였다. 급보를 전해들은 안태훈은 대책을 강구한 끝에 박석골의 동학군을 선제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포군 영수 노제석에게 40명의 정병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남은 병정들로 하여금 청계동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노제석은 포군을 이끌고 동학군을 공격하여 18명을 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갑오의려의 승첩에 접한 신천군수는 노제석에 대한 포상을 해주감영에 상신하였다.’



다음은 안중근이 회상한 동학군과의 전투 당시의 상황이다.



‘그날 밤 내 아버지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의논하기를 "만일 내일까지 앉은 자리에서 적병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되면, 적은 군사로 많은 적군을 대항하지 못할 것은 필연한 일이라, 오늘 밤으로 먼저 나가 적병을 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곧 명령을 내렸다.

닭이 울자 새벽밥을 지어먹고 정병 40명을 뽑아 출발시키고 남은 병정들은 본동(本洞)을 수비하게 했다.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전진 수색하면서 적병 대장소(大將所)가 있는 지척에까지 다다랐다.

숲 사이에 숨어 엎디어 적진 형세의 동정을 살펴보니 기폭이 바람에 펄럭이고 불빛이 하늘에 치솟아 대낮 같은데 사람과 말들이 소란하여 도무지 기율이 없으므로 나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이르되 "만일 지금 적진을 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다"고 했더니 모두들 말하기를 "얼마 안되는 잔약한 군사로써 어찌 적의 수만 대군을 당적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대답하되 "그렇지 않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고 했다. 내가 적의 형세를 보니 함부로 모아 놓은 질서 없는 군중이다. 우리 일곱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기만 하면 저런 난당(亂黨)은 비록 백만 대중이라고 해도 겁날 것이 없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뜻밖에 쳐들어가면 파죽지세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망설이지 말고 내 방략으로 쫓으라"고 했더니 모두들 응락하여 계획을 완전히 끝내었다.

호령 한마디에 일곱 사람이 일제히 적진의 대장소를 향해 사격을 시작하니 포성은 벼락처럼 천지를 진동하고, 탄환은 우박처럼 쏟아졌다. 적병은 별로 예비하지 못했기에 미처 손을 쓸 수 없었고, 몸에 갑옷도 입지 못하고 손에 기계도 들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밟으며 산과 들로 흩어져 달아나므로 우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했다.’



안중근 부대의 기습공격에 동학군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날이 밝으면서 동학군은 자신들을 공격한 부대가 예상과는 달리 적은 숫자인 것을 알고 사면을 포위하여 역공을 취하였다. 이번에는 안중근 부대가 위급해졌다. 동학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공격해왔다. 안중근은 앞장서서 동학군을 물리치면서 활로를 찾고자 했지만 인해작전으로 몰려오는 상대를 막아내기가 어려웠다.



실로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포성을 울리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달려와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깜짝 놀란 동학군은 피해를 입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추위에 떨었던 병사들이라 싸울 기력을 잃고 패주한 것이다. 안중근 부대를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준 구원병은 본진에 남았던 후원병들이었다.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하였다. 안태훈 일가는 전리품으로 다수의 총기와 군마, 특히 1천여 포대의 군량미를 획득했다. 나중에 이때 노획한 군량미를 때문에 안태훈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안중근의 부대원은 단 한사람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었다. 평상시 닦은 군사훈련 덕택이었다.



안중근과 부대원들은 크게 승리를 이룬 데 대해 하늘에 감사드리고 만세를 부르며 노획물을 수거하여 ‘갑오의려(甲午義旅)’의 본대로 돌아왔다. 황해도 관찰부에 사실을 보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싸움이 끝난 뒤에 안중근은 여러 날 동안 심하게 앓았다. 전투가 그만큼 격렬했던 것이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