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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2상무정신 (2)

대모달 |2011.02.16 21:09
조회 64 |추천 0

○ ‘갑오의려’의 개화적 시대인식



황해도 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이 평정되고 난 뒤 신천군수는 안태훈을 황해도 소모관으로 삼을 것을 청하는 공문을 조정에 올렸다.



‘신천군수의 첩보. 감영이 임명한 의려장인 본군 진사 안태훈이 포군 70명과 촌정 100여 명을 모집하여 적진의 영장 3명을 포살하고, 조총·환도·갑옷 등을 습득하여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안태훈의 유능한 일처리와 기묘한 공훈은 참으로 지극히 가상하므로 그에게 격려를 내리고 포상을 내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본도의 소모관으로 임명할 일을 아뢰어 처리해 달라는 뜻을 보고하는 바입니다.’



황해감사 정현석이 안태훈과 노제석이 의병을 모아 동학군을 진압한 공로를 포상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뜻으로 중앙정부에 건의한 내용이다.



안태훈이 조직한 ‘갑오의려(甲午義旅)’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안태훈은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고, 동학군이 황해도까지 밀려오자 지역의 산포수와 청년들을 모아 ‘갑오의려’를 조직했다. 갑오년에 조직한 일종의 민병이었다.



이 무렵 안태훈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갑오의려’가 조직됐다. 주로 봉건사회의 양반계층이 주도한 ‘갑오의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동학의 ‘민란(民亂)’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자위의 수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번 기회에 동학군을 토벌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안태훈의 경우는 달랐다.



안태훈은 일찍이 개화파 세력에 가담한 경력의 인사였다. 그리고 이후의 일이지만 천주교로 개종하고 적극적으로 전도사업을 벌일만큼 서구문물의 수용에 앞장섰던 개화파였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안태훈의 반동학적(反東學的) 입장은 개화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개화와 동학이 이념적 지향을 달리함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화와 동학의 상반된 입장은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서 오는 피치 못할 갈등이기도 했다. ‘반봉건(反封建)’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반봉건’의 실천논리에서 이들 양자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개화와 서구의 논리를 수용하고 이를 추구했던 것에 비해,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고 전통논리에 의해 반봉건의 구현을 모색했다. 때따라서 양자의 현실적 대응은 상반된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동학의 입장에서는 개화세력이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개화세력의 입장에서는 동학군의 봉기가 민란 내지는 폭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역사 인식의 문제에서 개화사상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안태훈의 ‘의려’는 그러한 개화적 인식이 깊게 반영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갑오의려’는 안태훈의 인덕과 재력에 의해 조직되었고 큰 전공을 세웠다. 여기에는 안중근의 역할도 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안중근은 16세의 소년으로서 전략을 짜고 부대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을 하였다. 수완과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 떡잎부터 남다른 ‘될성부른 나무’



동학혁명운동이 진압되자 안태훈은 의병대를 해산하고 다시 농사를 지으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번 전란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그는 새로운 구국운동(救國運動)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글만 숭상하고 무예를 폐지한 결과 백성들은 무기를 쓸 줄 모르고 국력은 약할대로 약해졌습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동학당이 몇 해 동안이나 화를 끼쳤지만 관군이 즉시 난당을 진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큰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러고 있다가 강한 외적이 우리가 약한 틈을 타서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총 한방 못 쏘고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산 속에 살면서 비록 사람의 수효는 매우 적지만 총 쏘는 연습을 자주하고 무덕을 숭상하는 기풍을 배양하며, 우리 국민을 인도하여 문약(文弱)한 습성을 개변시키고 상무(尙武)의 풍기를 점차 키운다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듯이 안중근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 시절부터 남달랐다. 글공부를 통해 과거를 준비하는 것이 당시 양반층 자제들이 밟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과거시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익힌 무예와 병법, 여기에 담대한 용기와 탁월한 지략으로 상무의 기풍을 키우고 동학군과의 전투에 앞장섰다. 그리고 16세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줬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칭찬이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동학군과의 싸움을 경험하면서 안중근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나라에서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업신여겨 백성이 군사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라가 점점 약해져, 만약 갑자기 외국 열강이 우리의 약함을 노려 침략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약(文弱)에서 벗어나 무강(武强)의 기풍을 조성함으로써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무정신에 입각한 구국의식이었다. 그는 우선 마을의 청년들을 규합해 무예를 단련시키는 한편 점차 다른 지역의 청년들까지 합류시켜 이와 같은 의지를 실천해갔다. 또 의협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감개한 이야기로 국사를 논하며 의기를 나누기도 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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