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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야 왜 그 신의 섭리를 깰려고 하냐 악마야

카사노바 |2011.04.18 11:39
조회 130 |추천 0

물론, 비유상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가치적 수준 자체로서는 등가이다.
크고작은 단위의 모든 현실들에서 비평적인 가치를 담지하는 구조적인 평가는
크고작은 단위의 모든 생명들에서 비평적인 의미를 담지하는 구조적인 통찰이다.


신과의 측면에서 약속을 깨는 상징적 일과
인간간 측면에서 약속을 넘는 역사적 일은
동시적으로 통과되어버린 원래적 죄악이라 하겠다.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이든, 실제로 처음 성관계를 해버려서이든지 간에
두 가지 측면은 엄연하게 동시적으로 존재했다.
존재라고 지금에 다시 말하는 나는
그 때의 시인들처럼 다시 영적인 작가이다, 기술자이다.


그것이 죄악이라 일컬어지는 까닭이란 정확히
인간 의식이 신을 등지고 자연으로 즉 자기 아래로 내려갔기 때문이었고
그 이후 인간은 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영원히 있지 못하게 됐다.
자연보다 이후에 가장 나중에 창조되어 신에게 최고 기쁨이었던 인간들이
자기들보다 우월하지 않았던 자연으로 그것의 일부로서 존재를 하게 되었다.
몸이 죽고 다음 세대가 출현하고 다시금 죽고 또 다음 세대를 낳고
이러한 과정들은 분명히 신과 함께한다기보단 자연 속에서 생멸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서만 몸으로서만 그러하고 몸 속의 영혼은 여전히도 신에게 속하지만.


어떻든지 간, 몸의 역사가 시작됨으로써 신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자신들의 역사 즉 인류사에 몰두하게 됨으로써
당연히 신과 멀어진다는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둘이 인류의 세대들을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이제까지 그들은 신과 잘 지내고 있을 것이며
우린 존재도 않아 원죄를 말하지도 않고 있겠다.
그러나 이미 신은 역사를 작정하고 계셨고
그 점을 옛 영적 시인도 선악과 얘기 이전에 선포한다.
천명하는 대의는 문제적인 인류의 역사이며
그 빌미이자 세부사항이며 선결사건으로서 선악과 일이 예정되었다.


에덴에서의 죄악으로 우리는 알게된다
인간이 자연과 신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류가 자연의 부분들에 몰두할수록 인류는 신에게서 멀어진다.
자연의 부분들은 기본적 의식주에 필요한 것들 뿐 아니라
물적자원들과 개발해가는 기술들과 현대에 들어서는 인간의 몸까지도
확실히 자연의 부분들이라는 사실을 우린 깨닫고 있다.


사람이 죽고 장차에 언제인가 부활을 할 때엔
자연의 부분들인 몸들이 부활함이 아니라
최소한에 신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의 몸이 부활해야 하겠다.
결국 이러한 믿음 속에서 옛날 영적인 시인들도 신의 의도들을 적었던 게다.
단순히 자연의 부분들로서의 존재가 아닌 영적인 인간 존재를
염두하여 당시의 시인들도 인간의 신적 의식을 본래적으로 적었다.
인간의 신적 의식은 간단하게 말해서 신과 대면을 하던 의식이었다.
자연과 인간 역사에 치어박힌 의식이 아닌
현상적 수준 이상의 의식을 즉 초월적인 의식을 잊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본원적 의식들을 기억하고자 그들은 기록했다.
인간의 본원적인 의식은 결코 자연에 속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는 기술만능주의 시대로 보이고는 한다.
인간의 몸은 철저히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것으로 간과되곤 한다.
자원과 물자들처럼 사람의 몸도 그렇게 교환가치적으로 살펴지곤 한다.
그러나 사람 몸에는 자연 속 다른 것들과의 상관적인 가치만 들어있지 않다.
사람의 몸 속에는 영혼이, 자연에서 가장 활발한 의식이 살고있다.
그 의식의 존재 범주는 이미 자연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자연에서 최소한 인간관계 만큼은
단순하게 교환적이거나 치환적인 가치로서만 다뤄질 수 없다.
신과 대면을 하던 본래적 인간 의식을 자연 속 무엇으로 치환할 수 있는가?


설령 힘 있는 이들이 다른 이들을 임의대로 취급한다고 해도
취급되는 그 다른 이들의 의식 속에선 신이 관찰을 하고 있다.
인간 의식은 기본적으로는 신의 의식이 꿰뚫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의식은 어느 것이나 신의 의식이 활용중인 것이다.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을 신은 그 의식 속으로 꿰뚫고 있다.
자연의 모든 것 가운데서 인간의 의식이 가장 확실히 신에 꿰인다.
그것의 징표라면 간단히 말해 가치관적인 삶의 향유다.
구체적인 물자적 가치 수준이 아닌 정신적이고 비평적인 가치의 세계
이것을 말함이다, 더 간단하게 추상적 자세라고 부른다.


현실 속에서 설령 구체적 자세들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인간 의식은 누구나가 항상 추상적 자세 만큼은 유지하고 있다.
어떤 가치관적인 태도를 그저 수용적으로 담고 있거나
어떤 가치관적인 태도를 능동적으로 추구하고 있거나 한다.
그런 가치관적인 태도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일은
구체적인 현실적 계기들이 있음으로써 발생한다.
신과 대면을 하던 신적인 인간 의식이 추상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현실 속 계기들에 접하여 발생하는 의식은 구체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 구체적인 의식과 추상적인 의식은 모두 가치관적인 자세들을 취한다.
자연에 대해서는 철저히 구체적인 가치판단적 태도들을 취하는 인간 의식이
허나 인간간 관계에서 만큼은 마땅히도 추상적 태도들을 검토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확하고 최소한적인 경우로서
에덴의 원래 이브와 아담처럼 숫처녀 숫총각인 인간들의 의식들에게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권고사항이다.
왜냐면, 숫처녀 숫총각이었던 이브와 아담 사이엔
그 어떤 인류문화적 사고방식이 끼어있지 않았고
오직 신의 의식이 개입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의 의식이 개입하여 있었던 그 둘 사이에
마치 지금의 것과 같은 구체적 가치판단의 자세들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연을 측량하거나 자신들을 자연의 일부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물간의 비교를 활발하게 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교환가치에 밝지 않았다.


지금의 사람들이 심지어 자신들의 몸들을 다른 사물들에 상대적으로 가치매김하여
소위 자신의 가치 및 의미들을 찾아 알게 된다는 것은 오로지 저주스런 결과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사람간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에 유사하게 비유되어 진행됨도
인간 의식의 본래적인 신성에 위배되는 타락하고 비천한 일의 대표적인 것이다.
사물들 간에 어떠한 추상적인 가치체계가 있겠는가? 있지를 않다.
인간 의식의 정신적인 자세와 판단가치들은 결코 사물의 세계에서 얻을 수 없다.
인간 간에는 신의 중재가 항상 있어야 마땅하다.
최소한 말해, 숫처녀 숫총각의 경우에 이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시대든 모든 숫처녀와 숫총각은
원래의 이브, 아담의 되풀이이기 때문이다.


한 갓난아기가 과연 고유한 태초세계 속에서 태어나는가
아니면 그저 단순히 인류역사 와중에 끼어 태어나는가?
한 갓난아기에게 이 두 가지 상황중 한 가지가 정해진다.
이는 당연히 아기의 부모가 신성한가 아닌가에 따른다.
태초의 원죄 과정을 통해 태어나는 아기는, 즉
숫처녀 숫총각이 신의 중재 속에서 만드는 아기는
추상적인 정신과 가치판단적 자세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에 비교해 그저 인류역사의 단편 속에서 태어나는 아기는
구체적인 가치판단의 자세와 의식만을 유지할 것이다.
인류역사의 단편이란, 반복된 행위들을 말한다.
처음이지 않은 행위는 바로 역사적 단편이다.


최초라고 일컬어지는 에덴에서 그들이 지은 원죄는
결코 인류역사의 단편이지 않다.
그 죄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자기 의식을
신에게서 자연으로 돌리고 인류 역사를 시작한다.
인류 역사는 사물들의 평가와 교환으로 점철된 것이다.
그 자신들이 자연의 짐승들과 똑같은 일을 시작했기에
그 몸으로써 자연의 사물들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들을 분별해봤자 사물들은 자연의 일부이다.
비록 자연에 자기들의 의식을 지향전환시켰지만
여전히 그들의 의식 자체는 자연에 속하지를 않는다.


인류역사 속에서 인류문화는 마땅히도 자연에 존재한다.
역사의 시작이 신에 반해서 자연을 향하게 되었음이고
그런 변경된 지향 속에서 지금까지 일궈온 모든 문명이
바로 자연의 일부이자 연장으로 계속돼 오고있다.
문명이란 간단히 말해 인류의 환경 관리라 부를 수 있다.
그 속에서 사물들을 개발 및 편성, 교환 및 배치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몸은 섣불리 교환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선 신이 관찰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역사의 지배자일 수는 없지만
모든 인간을 통해 신은 역사를 관찰한다.


신이 기억하시는 가장 친근한 인간 의식은
당연히도 이브와 아담, 곧 숫처녀와 숫총각이다.
비록 역사의 모든 문화가 처녀 총각을 이리저리 휘둘러대도
그들 사이엔 항상 태초의 신이 중재를 하고있다.
모든 문화의 처녀 총각은 인류역사와 신의 중재 사이에 있다.
물론 누구나 알듯 어느 처녀도 어느 총각도 신은 아니나
모든 문화의 처녀 총각은 원죄 이전의 인간 의식들이다.
비록 힘있고 지배적인 이들은 대개 인류의 토종일원
즉 이미 알것 다 아는 유부남녀들이지만
자신들의 그 세속적인 권력의 한계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 한계라는 건 바로 추상적 태도 수준에 있다.


이미 사물들의 질서에 예속되었음이 세속성의 증표이고
저 유부남녀들은 언제나 추상적인 정신적 가치판단들을 배제하고는 한다.
인류 역사를 통채로 배제할 수 있는 신의 개입을 빼고
추상적인 정신적 가치판단을 취급하진 못한다.
즉, 초자연적 초월성 이걸 제외시키고 추상적인 태도를 다루지는 못한다.
초자연적 초월성이 다른 무엇이겠나?
이것은 바로, 집단역사 이전의 의식이다.
신에게 철저하게 예속된 진리를 배경으로 인간의식이
비록 이미 시작된 인류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양심을 짚어 고려를 하노라면
결코 인간의 몸은 자연의 사물들과 등가로 교환되기 위해서 주어지지 않았다.
인류역사의 모든 문화들 속에서 모든 인간의식은 바로
사물들과의 등가적인 치환가치로 평가됨으로써 고통받았다.


의식주의 필요에 더하여서 배우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들의 근원을 여지없이 가리켜준다.
사물들의 편성에 몸을 더하여 편성함은 곧 인격모독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인격은 바로 신적인 의식 활동을 유지하는 정신적 그릇이다.
신적인 의식 활동은 다름아닌, 기본적으로 신을 상상할 수 있는 의식이다.
신을 왜 상상하는가?
자연 속 사물들에 끼어서 함몰되기 이전에, 바로 인간집단역사 이전에
그 한 몸으로 다른 홀몸의 순수 타인과 또한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신이
온전히 인간 속에서 의식지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을 상상하는 까닭은 바로 최소한
모든 집단을 넘어 순수히 남을 의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타인과 또 다른 타인을 제대로 의식함은
신적인 의식 활동을 유지하는 정신적 그릇인 인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격이 아닌 짐승들의 의식은 다른 존재들을 떼로 인식할 뿐이다.
그리고 인식되는 떼, 집단 속에서 모든 각자가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 다른 인간들의 집단을 떼로 몰아서 취급함은
그 속의 수많은 인격들의 희생을 유발한다.


누군가 다른 이들을 하나하나 소중한 인격으로 일일이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이들의 많은 하나하나가 마치 짐승떼 속의 각자처럼 추락한다.
특히, 힘있는 누군가의 그러한 편협한 자세로 인해
인류 전체의 모든 각자가 그런 형국에 쉽게 처한다.
그러나 오직 양심에 손을 얹고서 생각하기 바란다.
적어도 모든 문화들 속의 숫처녀 숫총각들은
모든 권력자들의 세속적인 편협성에서 제외되어야 하지 않는가?
가장 추악한 권력자들은 바로 처녀와 총각들을 해치는 자들이다.
인류의 토종 일원도 아닌 추상적 태도들의 그 각자들을 해치면
과연 어떠한 세속적인 산출이 가능한가?
에덴에 사는 인격체들의 신성들을 침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브들과 아담들을 위해하는 존재는 바로 뱀이라 한다.


이브들과 아담들은 만일에 원죄 짓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신의 중재 속에서 그들끼리 행하여
온전하게 태초적 조건 속에서 다음 세대를 생산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의 신의 중재 그것이 바로 차세대에겐 은총이다.
이렇게 결코 세상이 그들 사이에 없고 오직 태초의 신이 있다면
그들 소산인 다음 세대는 아브라함과 노아일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모든 이브와 아담은 분명 아브라함과 노아 이전에 존재한다.


결국 원죄의 최종 결말은, 직접 전신을 지음받은 아담에게 있다고 한다.
만일에 이브가 아담까지 연루시키지 않았다면 결정적 원죄는 없는 것이었겠고
이브와 아담 사이에 자연 법칙이 끼지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브와 아담 사이에 불륜이 있었기에 자연법칙이 저주로서 개입하였고
그 태초에서 불륜은 바로 최초의 인류역사 태동이었다.
인류역사는 자연법칙의 개입으로 개시되었고
그 자연법칙은 바로 생식의 법칙이었다.
성행위라는 욕심으로 그들은 인간집단을 이룩하게 되었으나
자연의 법칙은 출생과 사망 모두를 수호한다.
누군가 태어나면 누군가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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