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이제 막강한 답을 상기제목상의 질문에 드립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사회 속에서
그 많은 정보들 탓에 우리는 서로 정확히 이해하며 살아가는가?
답은 회의적이죠.
또한 서로가 타인들에 대해서 많은 정보와 지식들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만, 자신이 이해하고 있다는 타인들을 에워싼 정보들을
즉 타인들의 주변을 이해하고 있을 뿐, 정작 타인을 핵심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타인들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얻고 있지만
타인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죠, 여전히도.
그 타인들의 생명의 중심이자 주관의 가운데인, 의식의 자리 그 자리까지 파악하지는 못하므로 그렇습니다.
설령 뛰어난 스토커가 그 어떤 사람을 평생 스토킹 해도 그 평생 헛짚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님께서 어떤 표현을 골라야 할지 물으셨는데
그 선택의 기준이 단연 있습니다.
표현과 내용을 선택함에서 모두
그 여자분의 의식의 관점 가운데에서 (님의 관점의 중심은 다만 보조로 두시면서)
마치 그 여자분의 일부인 듯이 (그 여자분의 성품의 어느 한 측면인 듯이)
그 여자분의 관심사에서 님을 향하여 관계지향적인 생각을
적는 겁니다.
이러한 적어감에서 자연스레 표현과 내용 모두가 선택될 것입니다.
만일 신에게 물어보신다면
신께서도 이러한 식을 권하실 것이라고 전 예상합니다.
이미 그 여자분의 일부인 님이시라면, 불연 친하게 발견되는 님을 그 님이 애써서 멀리하려 하지는 않겠지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의식의 흐름을 지니면서 또 같은 의지의 발현까지 예상된다면
외모나 배경이나 그 외의 모든 조건을 넘어
누구든 간과할 수 없는 극적인(?) 발견의 관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헌데, 질문이 있습니다.
가령 수 일 전의 하루에 그 여자분이 무엇에 대해 초점을 두고 어떠한 자기현실을 어떤 규모와 방식으로 고민했는지
가령 기억이 나십니까?
요런 질문을 드렸으니, 이제는 구체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정령 현실적으로 짚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여자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걸 알아야
님께서 그 여자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겁니다.
그 여자분의 주변과 또 주변과의 관계가 그 여자분의 현실은 아닌 것이죠.
물론 그러한 그림같은 상황을 겪으면서 느끼고 반응하고 있지만
INTJ의 현실이란 건 사실 겉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가능성들이 실제의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발현하는가 아니 발현하는가 따위 생각들 속에서
이렇게 다뤄지는 그 가능성의 모습들, 아직 존재치 않는 그것들이
이미 INTJ의 '현실' 속에서 넘쳐나고 있는데
아무도 그런 현실은 보질 못한답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실현되지 않은, 실현되지 않을 것들이
가령 본인에게도 매우 현실적이랍니다.
그런 것들 속에서 평생 살아갈 가능성도 농후하지오.
고려치 않는, 개의치 않는 현실이라는 것은 없는 것과 다름이 없고
있지도 않은, 그러나 항상 다루는 가능성들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님이 이해한다면 님은 이미 그 여자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즉 그 님의 '마음에 든' 겁니다.
자, 이게 현재 님의 현실인가요?
님과 그 여자분 간의 현실을 읽고 보고서 제출하면
그 여자분이 평가해 주십니다,
제대로된 보고서이면 그것 자체가 여자분께 뇌물로 작용합니다.
어쩌면 님의 머릿속에서 파악되는 두분 간 현실이라는 것이
그 여자분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일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그럼 두 분 사이 관계는 망상인 것이지오.
사람의 의식 속에서 다뤄지는 인간의 삶에서는 크게 몇 가지들이 있습니다.
첫째, 나라는 존재가 어떤 구조의 세계 속에서 어느 지점에 처해 있는가
(어떤 관계들 속에 처해 있는가)를 개인은 평소 상기하지오.
둘째, 더 큰 범주에서 의식하는 건, 바로 현재의 현실과, 그리고
여러 변화들을 통해서 실현이 가능한 다른 현실들(가능한 다른 현실들)을
개인은 아주 크고 또 여러 겹인 그림으로서 상기하곤 합니다.
그 여러 겹들 중에서 한 겹이 앞으로 실현되는 현실이 되는 것이죠.
셋째, 개인이 상기하곤 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세계의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크고 작고 상관 무관한 것들에는 '이러저러한 바뀜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셋째가 미래를 구현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죠. 이 세번 째 것은
간단히 달리 표현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어떻게' 이룰 것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설령 가능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실이 있다 하여도 그 현실화의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따라서
정작 그 미래 현실은 여러 다른 의미와 현실성을 지니게 됩니다. 또한, 현재에 있는 현실의 구조라는
건 바로 그 '어떻게'들의 결집인 것이고요. 인간사에서 치뤄지는 수많은 일들은
과거에서 있었고 현재와 미래에도 있지만 그 차이라는 것은 곧 이 '어떻게'에 있는 겁니다.
같은 일도 어떻게 하면 훌륭한 일이요, 달리 어떻게 하면 범죄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오.
이 '어떻게'는 바로, 그 어떠한 '무엇'을 향해가는 길입니다.
어떤 웃기는 인간은 '어떻게'를 기다리는데, 실현하려 하는 그 '무엇'을 애써 떠올리지도 않습니다.
목표가 없는 게 아니라, 향해 가는 길만을 찾는 것이죠.
아마, 가능한 모든 목표엔 열린 마음일 것입니다.
'어떻게'는 정령 길이며, 자체가 세계 구조조정이기에, 심혈을 기울여서 예민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실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하며 또 당위를 따르는데, 가장 까다로운 당위는 가장 느린 걸음을 보장하죠.
한 사람의 길가는 걸음걸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과 그 의미, 이것을 판단하는 주관성은
사람의 의식마다 참 다를 겁니다.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며, 그 과정은 바로 자체로 세계 구조입니다.
나의 걸음걸이로 타인들에게 의미를 드리웠을 때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파악되는 의미
그것은 내게 곧 나의 거울입니다. 헌데 타인들이라는 나의 거울이 온전하지 못할 때
나는 꼼짝할 수가 없다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거울이 제 구실을 해야
내 왼편인지 오른편인지 동작 구별도 되는 것이겠지오. 이것 참 좋은 얘기로군요?
가령, 애인이 있는데 내게 그 애인이 자기 자신을 비춰주고 있는지 아님 세계를 비춰주고 있는지에
따라서 나는 애인을 상대할지 세계를 상대할지 유도되는 겁니다.
만일 애인은 꼭 점과도 같고 세계는 커다란 항아리 같다면, 애인과의 일들을 예견하기보다는
세계를 뜯어고치든지 아니면 차라리 신을 향해서 제로(0)와도 같은 은총을 꿈꾸겠죠.
이 문장들은 비유가 아닙니다, 문자그대로이죠.
친근감이 없는 타인들도 이처럼, 마치 각각의 규모와 양태를 보여주는 거울들로서
허나 나와는 상관없는, 파악이 되지 않는 규모나 구조로서 존재합니다.
초점과 범주가 먼저 인식되어야 하겠지오.
하여간, 무언가를 원한다 해도 그것이 반드시 목표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어떻게'라는 길이 우선 목표가 돼버리는 상황 때문입니다.
걸어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는데 저기 먼 곳에 어찌 도착하랴?라는 것이죠.
이런 쯤이면, 보기좋게 제안되는 목표도 농담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