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사 동지 우덕순(禹德淳) 등 만나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안중근은 함께 거사할 동지를 규합하고 나섰다. 혼자서 거사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국적(國賊)이 제 발로 여기까지 오는데 이를 포살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서 희생된 영령들께 도리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이토가 노령까지 일본의 손아귀에 넣는데 성공하게 되면 조선의 독립은 더욱 가망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안중근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우덕순이었다. 우덕순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 1908년 7월 안중근과 함께 의병항쟁에 참전한 동지이고 단지동맹원으로서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의 같은 회원이기도 했다. 당시에는《대동공보(大東共報)》의 회계책임을 맡고 담배 가게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안중근은 솔직하게 이토를 처단할 뜻을 전하고, 함께 거사할 의향을 물었다. 우덕순은 안중근의 말을 듣고 두말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자신도 마음속으로 이토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우덕순은 뒷날 일본 경찰의 심문에서 자신이 참여하게 된 과정을 당당하게 진술했다.
“나는 5조약의 이야기를「황성신문」에서 보았고, 또「대한매일신보」·「신민보」등에는 이등(伊藤) 공(公)이 아(我)의 국권을 강탈하고 황실을 속이고 국민을 통틀어 승려로 만들어 인권까지 빼앗으려 한다. 또 이등 공은 일본천황과 정부를 기만하고 한국에 대해 압박을 가하는 자다. 이등 공을 죽이지 않으면 아 동양삼국의 평화유지는 도저히 희망이 없다. 이등 공의 탐학한 대한정책은 천하를 속이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기사 등을 읽고 늘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안(安)의 유인에 응하여 살의를 결심한 것이다.”
우덕순은 뒷날 회고담에서 “안중근은 그때 거기(연추) 가 있다가 전보를 받고 8일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그 신문(이토의 만주방문기사)을 내주니 이등의 기사를 읽고서는 일어서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습니다.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내가 물은 즉 "가야지" "어디로?" "하얼빈으로 가야지"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즉결되고 말았습니다.” 라고, 안중근과 함께하게 된 과정을 증언했다.
동북평원 중앙 혜룡강 최대의 지류인 송화강 연변에 자리잡은 하얼빈은 여진족(女眞族)의 말로 ‘그물 말리는 곳’이란 뜻이라 한다. 19세기 무렵까지는 한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제정 러시아 동청(東淸) 철도의 철도기지가 된 이래 상업·교통도시로 크게 발전했다.
하얼빈은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 의해 건설되었고, 볼셰비키혁명 이후로는 반(反) 볼셰비키적 백계(白系) 러시아인의 최대 근거지이기도 하여 중국의 한족, 여진족, 몽고족, 일본인, 조선인, 러시아인들까지 모여사는 특이한 지역이 되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거사에 뜻을 모은 안중근과 우덕순은 22일 밤 9시 경에 하얼빈에 도착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이들은 도중에 쁘그라니치에 하차하여 유동하(劉東夏)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대동키로 해 일행은 세 사람이 되었다. 유동하는 안중근과 평소 친분이 있는 한의사 유경집의 18세 되는 아들이다. 안중근은 이들 부자에게 고국에서 오는 자신의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일이 탄로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하느라 하얼빈까지 오는 기차 안에서도 따로 앉았다.
하얼빈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이강이 써준 소개장을 갖고《대동공보》하얼빈 주재 기자 김형재를 찾아갔다. 그리고 김형재의 소개로 세탁업을 하는 조도선(曺道先)을 만났다. 유동하가 집안사정으로 중간에 귀향하게 되어 새로운 러시아어 통역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하얼빈에서 일행은 안중근과 친면이 있는 김성백(金成伯)의 집에 여장을 풀고 거사를 준비했다.
이곳에서 발행되는《원동보》에는 10월 20일 밤 11시에 이토가 장춘(長春)에서 하얼빈에 온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오보였다. 며칠간 시간을 번 안중근과 우덕순은 이날 이발을 했다. 정신을 새롭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동안 멀고 험한 길을 여행하느라 머리칼이 자랄 대로 자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동하와 셋이서 생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진을 찍었다. 안중근은 10월 24일 유동하의 뜻에 따라《대동공보》편집장 이강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경과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거사 이틀 전이었다.
‘본월 6일(양 10월 22일) 오후 당지에서 내착하여《원동보》를 본 즉, 이등(伊藤)은 내월 12일에 관성자를 출발하여 러시아 철도국 총독 특별열차로 하얼빈에 도착한다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조도선과 함께 가족을 출영하는 것처럼 꾸며 관성자역으로 향할 것이다. 동역과 상거하기 전 몇 개 역쯤 되는 어느 역에서 이등을 기다렸다가 거사할 계획인데 일의 성공은 하늘에 있는지라. 요행히 동포의 선도(善禱)를 기다려 도움을 받을 것을 바라나이다. 당지 (김성백) 씨에게서 돈 50원을 빌어서 여비에 사용하였으니 갚아줄 것을 희망함, 대한독립만세!’
김성백에게서 돈 50원을 빌어 여비에 사용했으니 갚아달라는 내용은 소크라테스(Socrates)를 연상케 한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외상 닭 한마리’ 값을 갚아달라고 유언했다는 철학사의 한 대목이다.
안중근은 거사에 필요한 여비가 부족할 것 같아 우덕순에게 김성백에게서 50원을 빌려오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빌리지 못했다. 이 편지는 돈을 빌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쓴 것이다. 차용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50원을 갚아 달라는 안중근의 마음씀씀이를 살필 수 있다.
○ ‘장부가’ 지어 의기 높이고
두 사람이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집밖으로 나간 저녁에 안중근은 만감이 교차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세칭「장부가(丈夫歌)」다.
“그때 나는 홀로 방안의 희미한 등불 아래, 차디찬 침상 위에 앉아 장차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길 길 없어 시 한 수를 지었다.”
〈장부가(丈夫歌)〉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어느날에 과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기하여 한번 지나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룰지어다
쥐도적 이등박문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동포로다.’
이날 우덕순도「보구가(報仇歌)」를 지었다.
〈보구가(報仇歌)〉
‘만났도다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런고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 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노청(露淸) 양지 지날 때에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라 간악한 노적(老賊)아
우리 민족 2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소리없이 뺏느라고
궁흉극악 네 수단을 …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갑오 독립 시켜놓고 을사 늑체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시 몰랐도다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네 뿐인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5천만을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 씩 보는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거사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중근과 동지들은 결의를 새로이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안중근은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는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처단하려는 생각이었다. 동청철도의 출발 지점인 남장춘(南長春)과 관성자(寬城子) 그리고 이토의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에서 결행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안중근은 이토가 10월 25일 아침에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채가구의 계획은 처음부터 악재가 따랐다. 우덕순과 조도선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러시아군 병사들이 밖에서 잠가버려 두 사람은 한동안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을 떠난 이토는 10월 18일 대련(大連) 부두에 상륙해 러시아 측에서 보낸 귀빈열차를 타고 10월 21일 여순의 일본군 전적지를 시찰한 다음 봉천(심양)으로 가서 일본이 조차한 무순의 탄광지역을 돌아보고 10월 25일 밤 장춘에 도착했다. 이토는 이날 밤 청국이 주최한 환영회에 참석한 뒤 이 열차편으로 하얼빈역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었다. 안중근은 이런 사실을《원동보》의 기사를 통해 자세히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 을사늑약 이래 희소식, 10월 26일
마침내 역사적인 1909년 10월 26일의 새날이 밝았다. 김성백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안중근은 6시 30분경에 일어났다. 새 옷을 낡은 양복으로 갈아입고 권총(拳銃)을 휴대하고 7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지난 밤에는 권총을 꺼내어 깨끗이 닦고 소원의 성취를 기원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일본인처럼 환영식장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많은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입장하여 별다른 제재나 검색 같은 것은 없었다. “일제는 사건예방을 위해 동양인들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검문요구를 일본인의 출입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런 연유로 안중근도 아무런 제재 없이 역내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 그야말로 하늘의 도움이었다.
‘정거장에 이르러 살펴보니 러시아 고관들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를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차를 두세 잔 마시며 기다렸다. 아홉 시 쯤 되어 드디어 이토가 탄 기차가 도착했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상황을 살펴보며 언제 저격하는 것이 좋을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때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군대가 경례를 붙이고 군악대 연주가 하늘을 울리며 귀에 들어왔다.
그 순간 분한 기운이 터지고, 삼천길 업화(業火)가 뇌리를 때렸다.
"어째서 세상일이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저렇게 날뛰고 도무지 거리낌이 없는데, 왜 죄 없고 어질고 약한 민족은 오히려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국적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탄 기차는 9시 15분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역전에는 러시아 경위병, 각국 영사단, 일본인, 구경 나온 러시아인 등 수천명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때를 맞춰 군악대의 환영곡이 울려 퍼지고 일장기를 높이 든 일본인들의 만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토는 러시아 채정대신 코코프체프의 안내로 동청철도 총재 등 귀빈들의 영접을 받으며 러시아군 수비대의 열병과 사열을 받고자 의장대의 정면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