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도 뻔히 알 수 있지만 이 영화는 패러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라는 것으로 대표되는 “규범”에 대한... #.1 갓난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아내를 치료하는 남편의 말은 아버지의 법이다. 우리의 불안(anxiety)로 대표되는 입마름, 떨림, 두근거림, 이명현상 같이 우리가 “어찌 할 바 모르게 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들을 통제하여 우리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법이다. 그 아버지의 법은 그러한 안심을 담보로 우리에게 사랑으로 재현되며 그 사랑이라는 기표는 법에 좋음(good)이라는 속성을 부과하고 정당화시킨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남편의 “아버지의 법”이 그녀에게 부과될수록 아내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 안의 두려운 자연으로 점점 빨려 들어간다. 남편은 그 자연(두려움)과의 맞섬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치료의 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치료를 위해 둘은 아내의 두려움이 서려있는 숲 에덴으로 떠난다. #.2 아내는 역사속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여성살해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기독교가 여성살해를 정당화 한 근거는, 기괴한 염소 머리를 한 채 유방을 드러낸 여성의 그림에 집약되어있다. “자연은 사탄의 교회이다.” 인간은 악하다. 그러므로 인간을 낳은 여성은 악하다. 그것은 태초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한 에덴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 종교에 의해 저질러진 여성에 대한 부당한 박해를 파헤치고자 한 아내는 오히려 그것을 공부할수록 역사 속에서 인류를 강박해 온 아버지의 법이 기초하고 있는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한 불안감을 재차 주입받게 되었다. 어머니 대자연으로서의 가이아,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설명되고 예측이 가능하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대상화되고 통제되어야 한다는 인류의 상황구속적 현실을, 아내는 그녀에 대한 남편의 법이 그녀를 해석하고 평가하고 진단할수록 확인하게 되며, 에덴 숲에서 최종적으로 확증한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종용한 여인의 입놀림에 대한 죄의식을 다시 인식하듯... #.3 법으로서의 남편, 그리고 그 법을 만들고 실행하여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으로서의 남편은 세 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비탄,고통,절망-나는 이것들을 해산(사슴), 노동(여우), 죽음(까마귀)과 연결시켜 보았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얻게 된 원죄의 결과는 인간을 그러한 세 명의 거지(begger)-우리의 죄의식과 굴종을 걸하는(beg)-를 통해 자연의 “불확실성”을 설명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도록, 그리고 그 “탓”을 매개로 자신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통제하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잠결에 창밖으로 뻗은 손에 도토리와 떨어진 숲의 이물질에 의해서도 불안함을 느끼는 존재일 뿐이다. 풀밭의 이쪽에서 저쪽 까지를 구획짓고 아내가 그 곳을 겁 없이 지나가기만 하면 치료의 한 단계가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하지만, 막상 자신의 예측과는 별도로 아내가 스스로를 다 나았다고 하며 숲을 껑충 껑충 뛰어다니면 오히려 불안함을 느끼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자신을 자학하거나 성욕에 충만하여 자위하는 아내와 고목나무 밑에서 강간하는(?) 장면에 드러난 무수한 여인들의 손길은, 역사속에서 “아버지의 법”에 의해 죽어간 많은 자연-사탄의 교회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승리는 항상 법에 있지, 자연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4 아내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남편과의 정사 와중에 창밖으로 떨어진 갓난 아들의 죽음을 설명할 논리가 필요하였다. 그 논리의 꼭지는 그녀가 아들의 몽유병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에덴에서 논문을 쓸 시절에 자신이 아들의 신발을 거꾸로 신김으로써 아들의 발에 기형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방관에 의한 아들이 느꼈을 외로움, 그리고 거꾸로 신긴 발로 인해 아들이 느꼈을 아픔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행위는 “예측 불가능”했던 아들의 죽음을 “설명 가능한” 원인과 결과로 구획함과 동시에 기독교 이성(rationality)에 의해 이루어졌던 어머니 가이아의 원죄를 확증하였다. 어머니 자연이 낳은 인간의 원죄는 자연의 불확실한 재앙을 통해 “천벌”을 받음으로써 지속적으로 확인되는데, 그렇게 자연재해를 인간의 죄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인간의 원죄의식은 일면 자연을 설명하고 통제하는 기제를 낳음으로써 인간에게 “안심”을 주었지만, 인류 역사에서 항상 원죄를 구체화시킬 대상을 찾도록 강제하는 강박으로 작용하였다. 마치 아내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을 느끼는 상태에서 아내에 의해 자연적 성욕을 거세당하고 다리에 맷돌이 달려버린 남편처럼.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낳은 자연-죄의 궁극으로서의 자신의 음핵을 잘라낸 아내처럼. #.5 세 거지가 출현하면 한 생명이 죽어야 한다. 3일의 죄의 결과-사망-을 맛보았을 때 크라이스트는 뱀의 머리를 부수고 부활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음핵을 자르고 실신한 아내 곁에 찾아온 사슴, 여우, 그리고 바닥을 깨부수었을 때 튀어나온 까마귀 밑에는 인간의 원죄를 발에서 떼어낼 수 있는 렌치가 있었다. 3일 동안 크라이스트는 렌치로 인간의 발에서 멧돌을 떼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멧돌을 떼어내자마자 인간이 느낀, 자기 자신안에 내재된 “어찌 할 수 없는” 자연(입마름, 떨림, 두근거림, 이명현상)으로서의 불안감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탓하듯, 자신의 멧돌을 떼어내는 것을 방해하는 자연-사탄의 교회의 창시자인 사탄을 목메고 죽였을 것이라고 해석될지도 모른다. 남편은 아내의 목을 조르고 중세의 화형식을 재현한다. 그리고 목발을 집은 채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그 언덕에는 인간에 의해 역사 속에서 무수히 죽어나간 자연-사탄의 교회의 창시자인 여성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다. #.6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얻은 인류는 자신의 역사를 시작한다. 서양의 역사가 BC와 AD로 나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라이스트 이후 새천년을 얻은 인류는 그들의 죄 많은 조상들이 그랬듯 자연의 열매를 취해 자신의 배를 채운다. 열매를 따는 행위는 일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떨어져가는 도토리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게 자연을 개척해 나간 인류-크라이스트는 언덕의 한 지점에서 자신을 따르는 익명의 여인들을 만난다. 어머니 마리아와 촌부 마르다, 그리고 귀신들린 창녀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기도 하였던, 그리고 오천명을 먹일 때 셈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인간 취급도 당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따랐던, 당시의 서발턴(subaltern)으로서의 수많은 여성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대속한 인류에 의해 죽어나간 여성들 말이다. 이런 면에서 크라이스트는 인류에 의해 해석되었던 수많은 크라이스트로서의 안티 크라이스트와 중첩된다. 흔히 그들은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라는 명제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진짜 크라이스트를 도용한다. 그리고 그 크라이스트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기업교회주식회사를 세우고, 헌금 횡령하고, 은퇴한 몸으로 당회 개입하고, 대내외적으로 비판받다가도 무릎 꿇고 회개하는 퍼포먼스 하면 성도들은 그를 다시 추대한다. 성도들에게는 그러한 법-초월론적-존재로서의 “법”이 필요하니까. 아니, 그러한 법-초월론적-존재가 있어야만 법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법을 확증하는 크라이스트라는 기표나, 그 기표에 대응하면서 인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크라이스트가 억제해야하는 사탄이라는 기표처럼... 그리고 그러한 기표들은 역사속에서 교회-비교회, 국가-개인, 이성-자연, 민족-타민족, 우리-타자, 이성애-동성애 또는 양성애로 구체화 되어온 것은 아닌지... #.7 이성과 비이성, 선과 악, 남자와 여자, 그리고 기독교와 비기독교... 이분법 가정에 대한 수많은 비판의 재탕으로 읽는 식으로 영화의 깊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떠한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해야 하기에 비이상적인 상태를 외설스럽게 강박하는 각종 법규들의 변태적 도착을 비꼬는 영화도 아닐 것이다.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해, 그 대상의 진실된 입장을 알 수 없기에 설명 불가능하나 설명 되어져야 하는 실재계 속의 자연으로 유비되는 연인을 사랑해야 한다면, 그 사랑이 어떠한 특정 형태를 취할 때 그 형태가 연인에게 가하는 피해에 대한 요란스러운 표현이라고도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사랑-안심-좋음이라는 이름으로 대상화하고 설명하고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하는 모든 시도들이 결국 그 이름을 “안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안티 크라이스트가 사랑-법으로서 연인-자연을 대상-사탄화 하였다면, “예수는 사랑입니다.”라고 할 때 일컬어지는 예수-크라이스트는 사랑을 사랑으로 칭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칭함으로써 사랑의 대상과 자신을 구분하지도 않았고, 그저 옆에 있어주고 공감하여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神)인데도 불구하고 외설스럽게끔 우리 옆에서 폭식하고, 술마시고, 질질 짜고, 끝에는 십자가에 못박히기기나 하면서...
ps. 여기서 '여성'이라는 기표는 흔히 생각하는 생물학, 해부학적인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구분하는 남/여성 역시 문화적, 그래서 담론적인 효과로서 나타나는 젠더에 의해 구획된다. 거시기를 가진자는 남성, 그것이 없는 자는 여성, 이도 저도 아닌 자는 이상한 것이라 칭함을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이라는 기표는 "모두가 거시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님(not all needs Thing)"을 일컬으며 "거시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로 하지 않는 특별한 어떠한 자가 있는 것도 아님"을 맞짝으로 하고 있다. 거시기가 있다/없다로 결정되는 법의 지배의 논리와는 별개인 자. 거시기를 가지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아버지의 법을 넘어선 실재의 향유가 가능할 수도 있는 자. 그래서 아버지의 법을 위협하는 자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져왔고, 안티/크라이스트-기름부음 받은자-호명된 자-주체/신민(subject)들의 희생양이 되어온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