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나라 빼앗은 것을 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
일제(日帝)는 1909년 12월 19일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에서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정근(安定根)과 안공근(安恭根)을 소환해 심문했다. 이때는 검찰관 미조부치[講淵孝雄], 서기관 다케우치, 통역촉탁 소노키[圓木未喜]가 심문을 맡았다. 심문은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안중근은 감방에서 두 동생과 만났다. 고향을 떠나 만주와 러시아 땅을 전전하며 의병항쟁을 벌이고 마침내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여 연일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만난 것이다.
‘11월 경이었다. 정근과 공근, 두 동생이 한국 진남포로부터 이곳으로 면회를 왔다. 작별한 지 3년만이라 이렇게 만나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반가왔다. 그 다음부터는 항상 4~5일, 또는 열흘에 한번 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동생들에게 한국인 변호사를 청하는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 성사를 받을 일 등을 부탁했다.
두 동생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미조부치 검찰관은 비교적 친절하게 대했다. 닭과 담배 등을 차입해주었다. 간수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하게 하고, 솜이불과 고급 담배, 서양과자를 넉넉히 넣어 주었다.’
동생들이 다녀간 뒤부터는 미조부치의 말투와 행동이 크게 바뀌었다. 안중근을 ‘동양의 의사(義士)’라고 표현하고, 비교적 예의를 갖춰 심문해오더니 곧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안중근은 이때부터 일제가 자신을 처형하리라는 예상을 하게 되었다.
‘그 후의 어느 날, 검찰관이 또 와서 신문을 하는데 말투와 행동이 전과는 전혀 달랐다. 압제도 하고, 억설도 하고, 모욕도 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검찰관의 생각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아마 본심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큰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도심(道心)은 희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롭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니로구나."
나는 분통한 마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이 비록 백만 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천만 문의 대포를 갖추었다 해도 나 안응칠의 목숨 하나 빼앗는 권한 말고 또 무슨 권한이 있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나는 더 대답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이때부터 다가올 나의 앞날은 크게 잘못되어, 공판도 틀림없이 그릇된 판결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말할 권리마저 금지되어 내가 목적했던 의견을 진술할 방법도 없었다. 모든 사실을 감추고, 또 속이는 기색이 분명했다.’
일본 정부는 미조부치의 그 ‘충성심’을 높이 인정해 안중근 재판이 끝났을 때 가장 많은 보상금을 지급했다. 미조부치 검찰관의 태도가 크게 바뀐 가운데 심문이 계속되었다.
미조부치 검찰관 : “러시아 관리로부터 취조를 받을 때, 피고 때문에 이토 공작이 사거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
안중근 : “듣지 못했다.”
미조부치 검찰관 : “러시아에서 작성한 서류에 의하면, 피고는 이토 공작이 사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에게 감사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인가?”
안중근 : “나는 듣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심문을 받을 때 한국인 통역이 있었지만, 그의 러시아어 수준이 너무 낮았고, 또 한국어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을 중간에서 전해 주지 않고, 내가 진술하면 "그런 말은 필요 없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냥 "모른다"라는 대답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모른다.”
미조부치 검찰관 : “이토 공작은 피고가 발사한 총탄 세 발이 명중하여 15분 만에 사거했다.”
안중근 : “병원에 가서 죽었는가? 또 한국인 때문이라는 것은 알았는가?”
미조부치 검찰관 : “그때 피고가 발사한 총탄에 가와카미 총영사가 손을 부상당해 불구자가 되었다. 또 이토 공작의 비서관 모리는 탄환이 왼쪽 허리를 관통하여 복부 안에 박혀 있는데, 알고 있는가?”
안중근 : “그렇다.”
미조부치 검찰관 : “또 남만주철도회사의 다나카 이사는 총탄이 왼쪽 다리 관절을 관통하여 바지 오른쪽에 박혔다.”
안중근 : “음…….”
미조부치 검찰관 : “한 사람을 죽이고, 세 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두 명에게 위험을 미치게 한 피고인의 행위를 잘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이토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미조부치 검찰관 : “이토 공작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했던 것이므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조부치 검찰관 : “암살 자객은 예로부터 동서 각국에 그 예가 적지 않다. 그리고 한 나라의 정치와 관련하여 생기는 경우가 많다. 훗날에 이르러 생각하면, 피해자나 가해자가 목적은 같은 데, 다만 그 수단을 달리했을 뿐으로, 이러한 비참한 사태가 생긴 뒤에야 비로소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잘 생각해보면 피고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도리에 반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그 그릇됨을 깨닫지 못하는가?”
안중근 : “나는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거나 또 이에 반하는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유감인 것은 이토가 이곳에 없는 관계로, 내가 이토를 죽이려고 한 목적을 말하고 이에 대해 의견을 토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조부치 검찰관 : “피고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안중근 : “그렇다.”
미조부치 검찰관 : “그렇다면 피고는 사람의 도리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안중근 : “교(敎)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 국면에 직면한 사람밖에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나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성서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 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일 뿐이다.”
검찰관 : “피고가 믿는 홍 신부가 이번 범행을 듣고, 자기가 세례한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며 한탄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피고는 자신의 행위를 사람의 도리나 종교의 취지에 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 ‘묵묵부답.’ (제10회 신문조서)
일제는 처음에는 동양의 정세를 내세워 청국과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정치’를 한다고 내세웠다. 그래도 ‘설득’이 안 되자 종교의 교리를 들어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힐책했다. 안중근은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 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일 뿐이다”라고.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자크 엘룰(Jacques Ellul)은 자신의 저서인《폭력》에서 “알제리아 전쟁이 한참 계속되고 있을 때, 신학교수 카잘리스(casalis)는 '폭력에는 자유케 하는 폭력과 속박하는 폭력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많은 지성인들(뒤베르제, 도메나 등)의 입장을 총결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알제리아 전쟁 동안에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의 식민지 해방에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는 폭력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폭력은 정죄되어야하는 것이지만, 이 특수한 폭력은 묵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는 사람들을 속박하는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봉사를 추가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 유치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소회의 일단을 적어 일본 관헌에게 주었다. 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경에 쓴 글이다.
〈한국인 안응칠의 느낀 바〉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기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만,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을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며 서루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 사회의 고등 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오로지 사람 죽이는 기계뿐이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형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 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 앞에서 늙은 도둑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 잔혹한 조사 끝에 재판 회부
미조부치 검찰관은 1910년 2월 1일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를 일본 관할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부에 송치했다. 미나베 주조가 재판장이었다. 미조부치는 1909년 10월 30일부터 11월 26일까지 한달여 동안 7차례에 걸쳐 조사하고, 한국통감부에서 특별히 파견한 사카이 경사가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보름동안 11차례나 조사했다. 그것도 모자라 미조부치는 또 1910년 2월 20일 이후 4차례나 더 조사를 진행한 끝에 2월 1일 공판청구를 했다.
사카이가 보름동안 별도의 조사를 한 것은, 안중근의 하얼빈의거에 국내 연루자가 더 없는지를 철저히 캐서 반일운동 종사자를 색출하려는 통감부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는 이 기회에 국내 반일세력의 뿌리를 뽑겠다는 작정으로 안중근에 대해 잔혹할 정도의 조사를 실시했다.
미조부치가 적시한「사실의 표시」라는 이름의 기소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고 안중근은 추밀원의장 공작 이토 히로부미 및 그의 수행원을 살해하고자 결심하고 메이지 42년 10월 26일 오전 아홉시가 지나서 러시아 동청철도 하얼빈역에서 미리 준비한 권총을 발사하여 공작을 살해하고, 또 공작의 수행원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의 각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 등에 총상을 입혔다. 이 세 명은 살해되지 않았음. 피고 우덕순 및 조도선은 안중근과 공동의 목적으로 이토 공작을 살해하고자 동청철도 지야이지고역에 체류하며 예비행위를 했으나, 러시아 위병의 방해를 받아 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한 자임. 피고 유동하는 안중근 등의 결의를 사전에 알고 통신 및 동역의 역할을 담당하며 그 행위를 방조한 자임.’
안중근과 연루자 3명을 여순지방법원으로 송치한 일제는 여순감옥은 물론 지방법원 주위를 삼엄하게 경계했다. 한국의 의병들이 이들을 탈취해갈지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감옥에서 법원까지 압송하는데 필요한 호송용 마차를 특별히 일본에서 제작해 들여올 정도로 경계에 철저했다. 여순항에는 일본에서 급파한 여러 척의 함선이 해안경계에 나섰다.
《만주일일신문》1910년 2월 5일자 기사에는 ‘피고 4명을 감옥에서 법원으로 압송하기 위해 새로 만든 마차가 내지(內地)에서 도착하였는데 차내는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후부에는 간수 2명이 탈 수 있다고 한다. 피고 등은 일단 마차로 법원 구내의 경무계류장에 수용하고 감시원으로 간수 2명을 두고….’ 하고 보도하였다.
일제는 또 재판에서 일반인의 방청과 보도를 통제하기 위해 방청객이 지켜야 할 의무사항을 새로 만들고, 여순지방법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등법원 제1호 법정을 재판 장소로 지정해 좌석배치와 각종 보안시설 등을 정비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