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네이버에서 펌):
도시를 위협하는 열차 폭탄 테러 사건 해결을 위해 호출된 콜터 대위. ‘소스 코드’에 접속해 기차 테러로 희생된 한 남자의 마지막 8분으로 들어가 폭탄을 찾고 범인을 잡아야 하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이 임무가 성공해야만 6시간 뒤로 예고된 시카고를 날려버릴 대형 폭탄 테러를 막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직감을 이용해 사건의 단서와 용의자를 찾아야 하는데……
review :
5월 3일 왕십리CGV에서 진행된 제이크 질렌할, 미셸 모나한 주연, 던칸 존스 연출의 <소스 코드> 시사회에 다녀왔다.
2009년에 던칸 존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더 문>을 과천에서 열린 제1회 SF과학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관람한 적이 있다. <더 문>은 극중 모니터 상으로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과 목소리 출연을 제외하면, 단 한명의 배우 샘 락웰이 1인 2역을 연기하는 작품이었다. 공간을 한정시키고 CG를 최소화하면서 대신 아이디어와 서사를 고밀도로 농축시킨 <더 문>을 나는 흥미로웠던 SF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한국 관객에겐 우주복에 태극기 도안이 성조기와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나, 극중 달 기지의 이름이 한국어 사랑(SARANG)이라는 점도 이채로웠으리라 본다.)
던칸 존스의 두 번째 장편 <소스 코드>는 3천 2백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어졌다. 5백만 달러로 제작한 <더 문>에 비하면 규모가 늘어난 편이지만, 보통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비가 1억 달러 이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저예산 영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대신 - <더 문>과 마찬가지로 - <소스 코드>는 배우의 응축된 연기와 아이디어의 힘이 저예산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소스 코드>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SF액션의 진화’라기에 보았는데 실망한 관객들이다. 그들은 불만의 원인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소스 코드>는 헐리우드 SF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시각적 상상력에 기반한 찬란한 비주얼이 지극히 부족하다. 액션 씬은 독창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그 분량이 많지도 않다. 과거로 돌아가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것은 필름의 낭비라서 영화를 지루하게 만든다. 양자역학과 평행우주론 따위의 머리 아픈 얘기들에 나는 관심 없다. 그런 현학적인 얘기들로 있는 척 하면서 만들었지만, 돈 안들이고 싼 티 나는 이따위 SF를 8~9천원 내고 보기엔 너무 아깝다.
물론 다 틀린 말들은 아니지만, 이런 불평은 작품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SF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식의 과장된 마케팅과 장르에 대한 지나치게 부풀려진 기대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영화보실 분들은 관람 후 읽으실 것을 추천합니다.
두 번째 부류로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이미 써먹은 설정들이 반복되어서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관객들이다.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모티브는 <레트로액티브>, <사랑의 블랙홀>과 유사한데, 특히 반복해서 과거로 돌아간 콜터(제이크 질렌할 분)가 기차 안에서 벌어질 사소한 일들을 기억하고 하는 행동들은 <사랑의 블랙홀>의 필 코너(빌 머레이 분)의 그것과 쏙 빼닮았다. 2004년의 화제작이었던 <나비 효과>와 토니 스콧 감독의 2007년작 <데자뷰>도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점 때문에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소스 코드>는 기차 폭발 희생자 중 한명인 숀의 마지막 8분 동안의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라서, 이전 영화들의 시간 여행 아이디어가 다르게 변용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고 본다. ‘새롭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새롭게 보인다’라는 것이 <소스 코드>의 성과일 것이다.
세 번째 부류로는 이 작품이 선사하는 쏠쏠한 재미와 아이디어를 만끽하긴 하지만 불친절한 설명과 허약한 과학적 설정에 의문을 표시하는 관객일 것이다. 뇌만 살아있는 콜터와 폭탄 테러의 희생자인 숀을 연결해, 숀의 마지막 8분의 기억 속으로 콜터를 보내서 범인을 잡아내려는 설정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숀에게 남아 있는 잔상의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되고 편집되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소스 코드’가 아무리 대단한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까지 완전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와 <오! 수정>(홍상수 감독)이 참고가 될 것이다.) 잔상의 기억은 숀의 마지막 활동 반경을 초과할 수 없음에도 콜터가 ‘새로운 기억의 창조자’처럼 기능해서 범인을 색출해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소스를 재생하는 프로그램이 원래의 소스 그 이상을 발견해낸다는 내용은, 비유하자면 음악 CD가 삽입된 CD롬이 CD에 원래 없던 음악까지 만들어낸다는 것과 같다.
이런 무리수를 극복하기 위해 <소스 코드>는 (고차원의 양자역학 이론에 근거했다는) ‘평행우주론’(우주가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과 조건에 의해 통상적으로 갈래가 나뉘어,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는 우주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이론)을 빌려오고 있다. 그러나 ‘평행우주론’은 이전의 ‘다중우주론’과 이름만 다를 뿐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라는 말과 같아서, 관측과 실험을 통한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적 엄밀성에 위배되는 이론이다. ‘사이비 과학’의 일종이라는 얘기다. 철학이나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언정 빈약한 근거의 ‘평행우주론’을 차용한 <소스 코드>는 과학적으로도 명쾌한 설명을 바라는 관객에게는 단점을 크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네 번째 부류로는, 위의 세 번째 관객들이 지적한 과학적 근거의 박약함과 불친절함을 ‘영화적 상상력’과 ‘예술적 가치로서의 모호함’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작품이 전해주려는 메시지에 좀 더 주목하려는 관객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전사한 채 뇌만 살아있는 콜터는 테러 예방을 위해 강제로 ‘소스 코드’에 투입된다. 국가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개인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아니면 다른 많은 개인들을 살리기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은 오히려 영광인 것일까. (이 주제는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에서도 다뤄진 것이 있다.) 후반부, 굿윈(베라 파미가 분)은 콜터가 원했던 대로 그를 ‘진짜로’ 죽게 해준다. 죽음을 통해 일말의 휴머니즘을 실현하는 것이 아이러니컬하다.
이미 현실에서 기차는 폭발하고 크리스티나(미셸 모나한 분)는 죽었지만 콜터는 ‘소스 코드’ 속에서 테러범을 잡아내고 크리스티나를 살려낸다. 마지막 8분의 끝에서 콜터와 크리스티나는 키스를 나누고 화면은 정지된다. 생의 마지막, 정지된 시간 속에서 기차 안의 사람들을 훑어가는 카메라에 담기는, 행복하고도 인간적인 모습들은 <소스 코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 마지막 8분이 지나간 후에도 콜터, 크리스티나, 그리고 기차 안 사람들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콜터와 크리스티나가 죽어버린 이쪽 세계와 별개로 저쪽에 있는 또 하나의 우주에서 콜터는 ‘숀’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콜터가 ‘소스 코드’ 내에서 보낸 문자는 콜터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굿윈의 핸드폰으로 전달된다. 이것은 <소스 코드>가 ‘평행우주론’을 소재의 기반으로 삼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우주가 서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평행우주론’의 가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영화니까’라는 말로 넘어가면서 이해한다면, 콜터(또는 숀)가 ‘소스 코드’ 프로그램의 비인간성과 국가주의를 경고하고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의미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그 이후의 ‘콜터’의 삶을 나는 생각해 본다. 자신을 ‘숀’으로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와는 아무 문제가 없을까. ‘콜터(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숀’에 대한 죄책감은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했던 콜터라면 ‘숀’으로서의 삶도 그저 소중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언제든 위기가 올 때,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실험을 통한 증명도 없지만
크리스티나의 위력적인 이 한 마디가 있다면.
‘Everything's gonna be ok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