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성도사(石城道使)로 부임하다
평양성(平壤城)은 한 해가 다 가도록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혁명의 뒤처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공신들에게 벼슬과 상을 주는 것만으로 순풍에 돛단 듯 하루아침에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숙청의 후유증이 너무나 컸다. 패수 강변 열병식장에서 1백여명의 친당파 대신을 주살한 것으로 혁명이 끝난 건 아니었다.
조정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정권을 구성한 다음에는 전부·중부·후부·좌부·우부 등 내평 5부의 대인과 군주들을 모두 바꾸었다. 그리고 숙청된 대신들의 일족은 모조리 도성 밖으로 추방하고 그들의 저택과 재산은 압수했다. 그 저택과 재물은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 신흥 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조치에 불복하고 반항하면 노예로 만들었다. 무기를 들고 항거하는 자는 가차 없이 목을 베어 본보기로 저잣거리에 효수(梟首)했다.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울부짖는 소리, 처형당하면서 지르는 비명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친당파를 소탕하고 최고 권력자로 천하를 호령하는 만큼 겉으로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그 아래에서 새 벼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인물들은 아무래도 정치가 서툴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을 장악한 인물 대부분이 군부 출신, 그것도 요동 벌판을 누비던 야전군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벼슬을 얻긴 했지만 글을 못 읽는 자가 절반이 넘었다.
그런데다가 혁명 덕분에 벼락출세를 한 연개소문의 이복동생 연정토와 혁명에 간접적으로 공헌했던 선도해가 새로운 문제아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구악(舊惡)을 일소하니 신악(新惡)이 등장한 꼴이었다.
연수영의 귀에는 그들의 불의와 비리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 그렇다고 해서 국사에 바쁜 오라버니 연개소문에게 일일이 그런 일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요동에서 지냈던 때를 그리워했다.
그런 연수영에게 평양 생활에 환멸을 가져다 준 결정적인 계기가 왔으니 그것은 바로 신라에서 김춘추(金春秋)가 사신으로 온 일이었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眞智王) 금륜(金輪)의 손자로서 처남인 김유신(金庾信)과 더불어 당대 신라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실력자였다. 당시 신라의 임금은 선덕여왕(善德女王) 덕만(德曼)으로서 즉위한 지 11년째였다.
김춘추는 604년에 태어났으니 연개소문보다는 3세 연상, 김유신보다는 9세 연하였다. 그는 진지왕의 맏아들 김용수(金龍樹)와 진평왕(眞平王)의 맏딸이며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天明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한 것은 바로 백제의 침략 때문이었다.
642년 무더운 여름 7월에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40여개의 성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가 당과 교역을 하는 중요한 거점인 당항성(黨項城)도 함락시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백제의 장수 달솔(達率) 윤충(允忠)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켰으며, 성주인 도독(都督) 품석(品釋)과 그의 아내 고타소(古陀炤)는 백제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런데 죽은 품석과 고타소 부부(夫婦)는 바로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사위와 딸의 부고(訃告)를 전해들은 김춘추가 기둥에 의지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 정도로 김춘추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매우 컸다.
얼마 후 김춘추는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 따위를 멸망시키지 못하랴!” 하고 결심하여 당장 선덕여왕에게 가서 고구려에게 백제를 칠 군사를 원조받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렇게 하여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윤허(允許)를 받아 4·5명 정도의 수행원만 데리고 밀사(密使) 자격으로 고구려에 온 것이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오기 전에 이미 승려로 가장해 신라에 밀파된 첩자 덕창(德昌)을 통해 김춘추에 대한 개인 정보와 신라 정계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김춘추가 무슨 까닭에 고구려로 찾아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장안성에 당도하여 객관에 여장을 푼 김춘추는 이튿날 아침 안학궁(安鶴宮)에 들어가 보장태왕(寶藏太王)에게 인사를 올리고 선덕여왕의 국서와 여러 가지 선물을 바쳤다. 물론 그 자리에는 연개소문이 배석하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끝난 뒤 김춘추는 본론을 꺼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뱀이나 돼지처럼 탐욕스럽고 흉포하게도 저희 신라의 국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 국왕 폐하께서 대국 고구려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이렇게 저를 태왕 폐하께 보내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군사를 빌려주셔서 하해와 같고 태산과 같은 성은을 베풀어주소서!”
“잘 알겠소. 짐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곧 알려줄 터이니 신라의 사신은 객관에 돌아가서 여독을 풀기 바라오.”
그날 밤 연개소문이 고관들을 거느리고 객관에 나타나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이튿날 다시 입궐한 김춘추에게 보장태왕은 이미 연개소문과 상의한 대로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사신도 잘 알다시피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의 영토였다. 그러니 신라가 죽령 서북 땅을 우리에게 돌려주면 군사를 내어 백제를 치는 일을 도와주도록 하겠다.”
김춘추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소신은 다만 저희 국왕의 어명을 받들어 군사를 텅하러 온 것인데, 태왕 폐하께서는 저희 신라의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두 나라가 화친할 뜻은 없고 일개 사신에 불과한 저를 위협하여 국토의 반환을 요구하십니까? 국토는 일개 신하로서 함부로 주거니 받거니 할 수는 없는 중요한 것이오니 소신은 차마 그 명령에는 따를 수 없사옵니다!”
그러자 배석하고 있던 연개소문이 나섰다.
“신라의 사신은 무엄하구려! 그동안 신라가 우리 고구려에게 배은망덕했던 것은 죄다 잊어버렸소? 아주 오래 전에 왜군이 쳐들어와 신라가 망국 직전에 이르렀을 때 아국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영락성제(永樂聖帝)께서 두 차례나 대군을 보내 구원해준 일은 신라 사신도 분명히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우리가 서토의 오랑캐들과 싸우느라고 뒤돌아볼 겨를이 없는 틈을 타서 도둑 고양이처럼 우리 국토를 탈취해가지 않았소? 신라 사신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요!”
“대막리지(大莫離支) 합하(閤下)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을 다시 들춘들 양국 친선에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이번에 군사를 내어주신다면 앞으로 신라는 고구려를 다시 상국으로 모시고 세세연년(歲歲年年) 조공을 바치겠사옵니다.”
“당신네 나라 신라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과 같이 신의가 없으니 믿기 어렵소이다! 그대의 나라 신라는 이른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은 백제의 뒤통수까지 후려친 적이 있지 않았소?”
연개소문이 나제동맹을 파기한 신라의 배반행위에 대해 지적하자 김춘추는 한동안 말문을 잃고 멍하니 연개소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때로부터 120년 전에 백제를 다스리는 군주는 성왕(聖王) 부여명농(扶餘明濃)이었고, 신라의 임금은 진흥왕(眞興王) 심맥부(深麥夫)였다. 당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관계도 쉴 새 없이 서로 치고받는 험악한 상황이었다. 특히 신라가 가야와 손잡고, 고구려는 계속해서 백제를 압박하고 있어 백제가 가장 불리한 형편이었다. 이에 성왕은 신라와의 화친을 모색했다. 그리고 538년에는 도읍을 웅진성(熊津城)에서 사비성(泗沘城)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고치는 등 개혁을 통한 국력의 회복을 꾀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548년에 고구려군이 남침, 백제의 한강 이북 요새인 독산성(禿山城)을 포위했다. 당시 고구려는 양원태왕(陽原太王) 고평성(高平成)이 통치하고 있었다. 다급한 성왕은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진흥왕은 군사를 보내 이를 구해주었다.
3년 뒤인 551년에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그것이 이른바 나제동맹이었다. 그 보복전에서 백제는 고구려 남쪽의 6개 군(郡)을, 신라는 10개 군을 각각 점령했다. 당시 백제가 차지한 6개 군은 한강 하류 오늘날의 서울과 경기도 일대였고, 신라가 차지한 10개 군은 오늘날의 남한강 상류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였다.
그러나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라가 동맹을 배반했던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군 총사령관 거칠부(居柒夫)에게 명령하여 백제가 천신만고 끝에 70년만에 되찾은 옛 서울 한성 지역의 6개 군을 기습하게 해서 빼앗아 버렸다. 백제는 한성 탈환이라는 눈앞의 성취에만 만족하여 신라의 음모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아무 대비책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었다.
극도로 분노한 성왕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마침내 성왕은 554년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대가야(大伽倻)와 왜(倭)의 군사들까지 모아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했다. 진흥왕은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澯) 탐지(眈知)로 하여금 적군을 막도록 했으나 서전에서 신라군이 패퇴했다. 그러나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군대를 이끌고 관산성을 구원하러 달려왔다.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성왕은 일선에서 싸우는 태자 부여창(扶餘昌)을 격려하기 위해 밤중에 보병과 기병 50명만 거느리고 이동하다가 구천(狗川)에서 신라 삼년산군의 하급관리인 고간(高干) 도도(都刀)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이에 김무력이 이끈 신라군은 국왕이요 총사령관인 성왕을 잃은 백제군에 대한 총공세를 펼쳐 좌평(佐平)급 장수 4명을 비롯한 3만여명의 백제군 장병이 전멸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성왕은 서라벌로 끌려가 진흥왕 앞에서 온갖 모욕을 받고 참수형(斬首刑)을 당했으며, 진흥왕은 성왕의 시신 중에서 몸통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머리는 북청이라는 관청의 계단 밑에 묻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관청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백제 국왕의 머리를 지근지근 밟도록 하여, 신라인들이 백제의 우위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고 자부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연개소문은 그런 사실을 상기시켜준 것이었다. 누구보다 언변에 있어서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김춘추가 얼굴이 벌개져서 할 말을 못하자 보장태왕이 한 마디 했다.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절대 군사 지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그대가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면 평양성에서 절대 나갈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그날부터 객관에 연금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이 가고 달이 흘렀다. 그러나 고구려 국왕도 부르지 않았고, 집권자인 대막리지로부터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젠 스스로 살 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는 연개소문의 측근들을 구워삶기로 작정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뇌물이 통하는 인간은 있게 마련이 아닌가? 그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배다른 아우인 중외대부 연정토와 중리대부 선도해가 포섭대상으로 적합할 듯싶었다. 두 사람은 연개소문의 혁명동지로서 최측근이긴 했지만 유난히 물욕이 많다고 하니 잘만 공작을 하면 걸려들 가능성이 높았다.
김춘추는 먼저 접대를 맡은 관리에게 뇌물을 듬뿍 집어주고 중리대부 선도해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뇌물로 사용할 금은보회는 충분했다. 이럴 경우에 쓰려고 서라벌을 떠나기 전에 재물을 충분히 준비해왔던 것이다. 진귀한 보물을 받아 챙긴 선도해는 이틀이 지난 뒤 어스름 저녁에 김춘추의 객관에 나타났다. 인사가 끝나고 간단한 술자리가 마련되자 김춘추가 말했다.
“국사에 바쁘신 대인을 이렇게 뵙자고 해서 송구스럽습니다. 대인께서 고구려에서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큰 인물이시란 말을 들었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선도해가 염소수염을 배배 꼬면서 대꾸했다.
“귀공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길게 말씀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소이다. 에헴, 귀공께서는 혹시 귀토담(龜兎談)을 들어 보신 적이 있소이까?”
“토끼와 거북…이라니요?”
김춘추가 어리둥절해 하자 선도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귀공은 그렇게 놀랄 것 없소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도 있으니 내 길게 말하지는 않갔소이다. 이 몸이 비록 중리대부라고는 하나 위로 대막리지 합하가 계시고, 또 그 위로는 태왕 폐하가 계시니 사사로이 귀공을 돌려보낼 힘은 없소이다. 그 대신 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리다. 이야기를 들으면 귀공이 신라로 돌아갈 방책이 보일 것이오.”
선도해가 술을 한잔 쭉 들이켜더니 가만히 이야기했다.
“옛날 옛적에 동해 바다 속에 용궁이 있었소.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소. 그래서 널리 의원을 구하니 어느 유명한 의원이 와서 토끼의 간을 먹으면 완쾌될 것이나 하였소. 용왕은 거북이를 시켜 육지에 올라가서 토끼의 간을 구해오라고 했소. 그래서 거북이는 육지에 올라가 감언이설로 토기를 꼬여서 용궁까지 데리고 왔다고 하오. 용왕이 기뻐서 토끼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려고 하였소. 이때 토끼가 용왕에게 ‘나는 간을 종종 빼놓고 다니는데, 갑자기 오는 바람에 간을 미쳐 뱃속에 넣고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를 다시 보내 주신다면 육지에 돌아가 간을 갖고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말하였소.”
김춘추는 이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래서 토끼는 무사히 생명을 구한 거지.”
선도해는 큰 소리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다음날 김춘추는 보장태왕에게 ‘고구려의 국왕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목령과 죽령 서쪽은 과연 고구려의 영토가 분명합니다. 소신이 귀국하는 대로 저희 국왕께 아뢰어 즉시 고구려에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는 내용의 글월을 써서 올렸다.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계속 붙잡아두고 있어봐야 대세에 별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여 김춘추의 귀국을 허락했다. 물론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조정이 김춘추의 거짓 약속을 믿어서 풀어준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굳이 김춘추를 불모로 잡아 신라를 자극해서 유사시 아래위에서 협공을 당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연개소문은 신라를 포기하는 대신 백제와 손을 잡기로 했다.신라보다도 한층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백제가 유사시 당과 손잡고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면 신라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위협이 되리라는 전략적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김춘추는 범의 굴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돌아가는데 성공했지만 고구려에서는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비밀은 없는 법, 모든 사람을 언제까지나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선도해가 김춘추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기고, 이를 다시 연정토와 나누어 먹은 대가로 김춘추를 살려 보냈다는 말이 은밀히 돌고 돌아 연수영의 귀에도 들어갔다. 심지어는 연개소문의 두 아내 고불리화와 여희에게도 진기한 보물을 바쳐 환심을 샀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왔다.
연수영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태위군의 군주 해철주가 요소요소에 거미줄처럼 쳐놓은 정보망 덕분이었다. 물론 직속상관 해철주가 연수영에게 알려주기에 앞서서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먼저 보고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런데 연수영이 이런 사실을 알고 펄펄 뛰며 노하더라는 사실을 들은 선도해와 연정토가 연수영을 찾아와 김춘추로부터 받은 뇌물의 일부를 주면서 입막음을 시도하고 나섰다. 연수영은 그들의 추악한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이런 자들과 한솥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역겨웠다.
연수영은 작심을 하고 대막리지의 정무소로 찾아가 연개소문에게 따졌다.
“오라버니! 선도해와 연정토가 김춘추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그를 풀어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요?”
“그래, 나도 태위군의 해철주 군주에게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덮어두기로 했다. 아직도 처리해야 할 나라 안팎의 난제가 켜켜이 쌓여 있는데 공연한 평지풍파는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웬만한 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아!”
“아니, 큰오라버니답지 않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옳지 않은 짓을 알고도 그냥 덮어두자는 거에요? 이러려고 우리가 목숨을 걸고 군사를 일으키고 태왕을 바꾸었나요? 큰오라버니에게 정말 실망했어요! 나라에 해가 되면 형제나 자식이라도 용서해선 안 되는 법인데……”
“어허, 넌 정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구나! 정토가 비록 뇌물을 받아 풀어주었다고 해도 김춘추는 더는 붙잡아둘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인물이다. 지금 당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신라든 백제든 남쪽 나라들과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야! 전선(戰線)을 양쪽으로 확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김춘추는 어차피 놓아줄 것이니까 보내준 거야. 그런 이유도 있고, 어쨌거나 지금은 자중지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야!”
“제가 알기에 김춘추는 신라 여주(女主)의 조카이며, 또 신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유신이란 자와는 처남매부 사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거물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도 그냥 살려서 돌려보낸다는 것이 정말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것도 내 피붙이가 더러운 뇌물을 받고 풀어주었으니…”
“그 문제는 그만 이야기하자! 이후에 예상되는 일들은 이 오라비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네가 맡은 일이나 잘하는 게 좋겠다. 그만 나가 봐라!”
“오라버니에게 청원할 일이 있어요! 저는 뇌물이나 받아 챙기고 온갖 비리를 일삼는 탐관오리들이 가득한 이 황성에는 더 있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저를 요동벌로 보내주세요.”
“그 말이 정말이냐?”
“진심이에요. 멀리 떨어진 바닷가로 보내주세요! 앞으로 당적들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바다로도 몰려올 거에요. 전 바다를 지키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이 오라비도 수영이 네가 평양에 남아서 이것저것 남의 뒤를 캐면서 분란을 일으키는 걸 원치 않아. 하지만 너 또한 고구려의 국록을 먹는 장수가 아니냐? 내 마땅한 수군기지가 있나 알아보고 너를 그곳에 보내줄 터이니 며칠만 기다려보아라.”
“…그런데 큰오라버니! 원덕(元德)이는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중리소형이란 10품관 벼슬을 내리셨나요? 대막리지 합하의 아들은 어린아이라도 벼슬을 내려주는 법이 새로 생긴 건가요?”
“뭣이, 어째? 이런 발칙한 년! 당장 여기서 나가라우!”
그 소리를 듣자 연개소문은 고리눈을 부릅뜨고 불같이 화를 냈다. 원덕이란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男生)의 자호(字號)였다. 연수영이 지적한 대로 연개소문은 그 해에 맏이 남생이 겨우 아홉 살에 불과한 데도 중리소형이란 관직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며칠 뒤에 연수영은 요동반도 남쪽 바닷가에 있는 수군기지인 석성(石城)의 도사(道使)로 임명되었다. 연수영이 석성으로 부임할 때 혁명동지이며 친자매와 같은 해란봉과 금화를 비롯하여 그녀의 친위군인 12낭자군이 그녀를 수행했다.
비사성과 장산군도 서쪽 벽류하 상류의 석성은 제6품관인 대사자(大使者) 도사(道使)가 다스리는 중성이었다. 따라서 제5품관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군주(軍主)가 다스리는 대성의 지휘에 따르게 되어 있었고, 석성을 관할하는 대성은 비사성(卑沙城)이었으며, 성주 겸 군주는 조의두대형 우소(于炤)였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거친 사내 장수들이 판치는 군지(軍地)에 아직도 미혼인 이십대 후반의 젊은 여자가 대사자 벼슬을 달고 성주로 부임하자 석성의 분위기는 술렁거렸다. 자고로 선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입 달린 사내들마다 우리 석성은 이제 암탉이 우는 성이 됐다는 둥, 장차 우리 고을에서는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보다는 둥 온갖 소리로 여자 성주의 부임을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평양성 대막리지부에서 사람들이 파견되어 석성 점장대 뒤쪽에 연수영과 그녀의 친위대인 12낭자군을 위한 소장루(梳壯樓)를 건립해주자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한결 잠잠해졌다. 연수영은 장수요 성주이기에 앞서서 여자였기에 근무 시간 외에는 남자 장수들과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소장루란 특별한 누각을 지어 생활공간으로 사용했으며, 또 그곳에 기거하면서 공무를 보기도 했다.
그녀는 성주로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성민들의 생활난을 덜어주기 위해 농업과 어업을 장려하기도 하고, 장삿길을 열어주기도 했으며, 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면 공평무사하게 처결해주기도 했다. 또한 벽류하 건너편에 오고성을 새로 쌓고, 관할 수군기지마다 낡아빠진 부두 시설을 수리하고, 수군의 강화에 주력했다.
수군의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력 증강과 전함 건조가 급선무였다. 연수영은 먼저 군데군데 무너지고 낡은 성벽을 수리하여 방어력을 강화했으며, 부임 당시 1천명에 불과하던 군사를 석달만에 2천여명으로 갑절이나 증원했다. 빈둥빈둥 놀고먹는 젊은이들, 배가 없어 고기잡이를 못 하는 수부(水夫)들을 모두 군대에 받아들였다.
연수영은 석성의 병력을 5백명씩 나누어 4개 당(幢)을 만들고, 부대장인 당주(幢主)에는 말객(末客)·선인(仙人) 등 하위 장수들을 임명했다. 그런 다음에 창과 도끼를 다루는 단병접전(短兵接戰) 훈련과 진치고 싸우는 법, 전함에서 군령기의 신호나 북소리와 징소리에 따라 전진하고 후퇴하는 법 등 기본적인 전투훈련부터 다시 시켰다. 또 행군과 항해 등으로 체력도 단련시켰다.
연수영은 군사들이 육지에 올라서는 육군으로 싸우고, 바다에서는 수군으로 싸울 수 있는 강군 육성에 주력했다. 또 한편 훈련 중에는 그동안 나태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군율을 엄하게 세우기 위해 대열을 이탈하는 자, 성민들의 재물을 빼앗거나 부녀자를 강간하는 자들은 여지없이 목을 베어 본보기로 삼았다.
그러나 장졸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그들의 괴로움을 위로하고 마치 어머니나 누나처럼 자상히 보살펴주니 모두가 마음속으로 연수영을 존경하며 따르기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석성 본성과 오고성을 오가며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장수들도 그런 여자 도사의 열성에 감탄하며 쉬운 일이든 궂은 일이든 서로 앞장서려고 했다.
전력 증강에도 애썼다. 무기의 개량에도 힘썼고, 군사들의 갑옷과 투구도 모두 새 것으로 마련해주었다. 20척에 불과한 낡은 군선을 모두 수리하고, 쉴 새 없이 새로운 전함을 건조했다.
연수영은 전함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오랫동안 배를 만들어온 조선기술자를 불러 설명을 듣기도 하고, 옛날 기록을 찾아보기도 하며 연구를 거듭하여 전보다 더욱 튼튼한 전선, 더욱 날쌘 전함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연수영은 장차 당나라의 대군이 침공하게 되면 전에 수나라가 그랬듯이 적의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해, 수군은 반드시 이 바다를 통해 도성인 평양성을 노릴 것으로 내다봤다. 육지나 바다나 어느 한쪽이라도 소흘히 해서는 안 될 중요한 방어선이었다. 따라서 전함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요새, 바다에 뜬 성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연수영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전함의 건조에는 무엇보다도 웬만한 풍랑은 말할 것도 없고, 접전시 적선과 충돌해도 능히 견딜 정도로 견고한 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부족한 예산은 자신의 재물을 팔아 충당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수군을 위해 편성한 예산은 육군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당시 고구려 육군이 기병과 보병을 합쳐 약 50만명 정도, 수군은 동해와 서해를 합쳐 그 5분의 1인 10만에 불과했지만 대신 수군은 전함 건조에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나마 절반이나 배정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수영은 643년에 석성 도사로 부임하여 645년에 여당전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만 2년 동안 5천여명의 군사와 70여척의 대소 군선을 거느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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