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화(開化)를 실천하기 위한 갈등
“어머니, 소자 좌진입니다.”
둘째 아들 좌진의 묵직한 음성이 들려오자 어머니 이씨 부인은 뜨개질을 멈춘다.
“그래 들어오너라”
좌진은 어머니 앞에 앉아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정세를 살펴본 바로는 이제 몇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 민족이 왜놈들의 종이 되게 생겼다는 거예요.”
“나도 들었다. 일본에서 박문(博文)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와서 궁궐에 들어가 우리 임금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무슨 조약을 맺고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다고 하더라.”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된 치욕을 맞이한 것은 무엇보다 민중이 무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립학교를 세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서 장차 민족해방의 인력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사업을 벌일까 합니다.”
좌진의 어머니는 얼굴에 근심을 드리우며 말했다.
“네 생각이 참으로 장하다마는 학교를 세우자면 돈이 꽤 들텐데, 그 돈은 어찌 담당하고?”
“그래서 저녁때 종조부님을 찾아 뵙고 내용만 대충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종조부님이 돈을 좀 주신다더냐?”
“아니요, 아직 그런 세밀한 부분은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러면 어찌할 셈이냐?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쓰는 교재를 만들어야 하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텐데...? 나는 그 부분에서는 잘 모르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 나는 그것보다 떡두꺼비같은 손자나 하나 보았으면 제일 좋겠다. 너희가 혼인한 지도 벌써 삼년이 되었어.”
“어머니 제 말씀 좀 조금만 더 들어주세요. 다른게 아니라 우리 민족이 다 왜놈의 종이 될 판국이니 우리 집안에서 먼저 노비들을 풀어주고 제 복대로 살도록 했으면 합니다.”
어머니 이씨는 껑충 뛰며 좌진의 말에 반발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뭐, 우리 집 노비들을 풀어준다고? 어림없는 소리 마라. 노비들을 다 풀어주면 그것들이 제대로 살 것 같으냐? 그 놈들은 우리 가문에서 거두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어머니,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답을 줘서 해방시킬 작정입니다.”
좌진의 어머니로서는 더욱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뭐 전답까지 그냥 준다고? 그럼 우리 가족은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네가 무관학교를 다니더니 정신이 아주 나갔구나. 절대로 안된다!”
좌진은 어머니가 쉽게 자신의 뜻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마구간으로 가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당숙(堂叔)인 김창규(金昌圭)의 자택으로 말을 몰았다.
“오! 좌진이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우리 집에 다 왔느냐?”
좌진을 보는 당숙의 눈이 예사롭지 않다.
“당숙님께 여쭙고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랫목에 앉아 장죽(長竹)대를 물고 있던 김창규는 장죽대를 재털이에 툭툭 치면서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할 얘기가 뭐냐?”
좌진은 뻔히 야단이 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주먹을 거머쥐었다.
“우리 집의 종들을 모두 풀어줄까 하는데 어머님이 반대하고 계십니다. 당숙께서 좀 도와주십시오.”
“뭐라고? 종놈들을 풀어준다고?”
당숙은 역시 예상대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지금 우리 나라 형편이 양반과 상놈을 구분지어 서로 위 아래로 갈라서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숙께서는 잘 모르고 계시겠지만 지금 우리 나라의 운명은 외세의 압력으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형편에 있습니다. 조정의 높은 관직에 있는 양반들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 백성들이 힘들거나 굶어 죽거나 상관하지도 않고 제 배나 불리는 썩은 족속들 아닙니까? 이럴 때 지각있는 양반이라면 상놈을 차별하지 말고 서로 힘을 합하여 나라를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 조상 중에도 혹시 상놈이 있었는지 누가 압니까?”
당숙은 왈칵 소리를 지르며 좌진에게 삿대질을 한다.
“네놈이 조상의 체면에 먹칠하는구나! 저놈이 집안을 망칠 놈이야. 고얀 놈 같으니라고... 어서 냉큼 나가지 못해!”
“당숙님, 좌정하시고 제 말을 조금 더 들으십시오. 저는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위해서입니다.”
“듣기 싫다. 썩 물러가거라. 그리고 우리 집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허허... 이런 변이 있나?”
당숙은 역정을 내며 좌진을 내쫓는다. 그러나 좌진은 신분제도를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좌진은 평소 믿고 의지하던 김석범이 운영하는 한약집을 찾아간다.
“좌진이, 오랜만이로구먼. 왜 갑자기 무관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왔어?”
김석범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라는 표정으로 좌진을 맞이한다.
좌진은 김석범과 마주앉아 학교를 세우는 일과 집안 노비를 해방시키려는 뜻을 이야기했다. 자초지종을 듣던 김석범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서울에 다녀오더니 개화사상에 더욱 눈을 뜨게 되었구먼. 그래, 언젠가는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가 없어질 것이고, 또 언젠가는 실현될 노비해방은 전세계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중대한 과제임은 틀림없지. 그렇지만 자네 집안은 전통적인 사대부 양반 가문이야. 자네 당숙도 그럴진대 자네 자당님은 더 어렵지 않겠어?”
“내가 언제 마음 먹은 걸 중단한 적이 있었나요? 형님께 신세를 좀 져야겠소.”
“신세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형님 집에 찹쌀 좀 있지요? 수고스럽겠지만 한 두어 되 좀 찰밥을 찧어 주세요.”
“아니 찰밥은 무엇에 쓰려고?”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김석범은 김좌진의 엉뚱한 부탁에 의아했지만 실없는 그가 아니기 때문에 아내를 불러 세 되쯤 찰밥을 쪄서 내오게 했다. 김석범의 아내가 대추와 밤을 섞어서 솜씨껏 찰밥을 찧어주자 좌진은 밖으로 나가 창호지를 사가지고 와서 약봉지 세배나 되게 오리더니 찰밥을 한덩이씩 창호지에 쌓은 뒤 조끼 주머니에 숨겼다. 그리고 김석범에게 이렇게 이른다.
“형님, 내가 형님을 찾아올 때까지는 연락도 하지 말고 지금 나눴던 이야기도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김석범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온 좌진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안사랑에 들어가 김석범의 집에서 만들어 온 찰밥뭉치를 하나 둘 꺼내어 구석구석에 숨기고 즉시 잠을 자는 척 불을 끄고 코를 골아댄다.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갔던 좌진을 걱정하는 어머니는 안방에 호야불을 끄지 않고 도사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좌진이 들어간 안사랑에 가 보니 불은 꺼지고 코를 고는 소리만 들리는지라 혀를 툭툭 차고 다시 안방으로 들어간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해가 한발이나 떠 오르도록 좌진이 나오지 않자 어머니 이씨 부인은 좌진을 깨우려고 여종 말순이를 보낸다.
“도련님, 아침 진지 드세요.”
말순이가 여러 번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고 방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다. 말순이가 조용히 올라가 문고리를 당겨보았지만 문마저 방안에서 잠겨서 열리지 않는다. 덜컥 겁이 나서 좌진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알렸다. 어머니와 아내가 안사랑으로 달려가 큰 소리로 좌진을 부른다.
“좌진아!”
“서방님!”
문고리를 잡아 당겨도 아무 소리가 없자 더욱 겁에 질린 어머니가 문 종이를 손가락으로 뚫어 살펴보니 좌진은 천연스럽게 방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 미친놈이 내 속을 끓이려고 저러고 있구나. 굶어 죽든지 쓰러지던지 내버려 둬라. 시장하면 제 발로 나올 테지”
이씨 부인은 걱정스러워 하는 며느리를 데리고 안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 하루가 지나가고 또 밤이 점점 깊어가고 새벽이 다시 돌아와도 좌진의 방에서는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노여움이 변하여 근심으로 바뀌고 걱정이 되어간다. 며느리를 보내고 춘봉이를 보내 달래보아도 좌진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다시 화가 치밀어 욕설이 나온다.
“저놈이 누구를 닮아서 저런 것이냐? 저놈이 네 살에 아비를 잃고 글쎄 나 혼자서 사남매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놈이 어미 속도 몰라주고 고집을 부리니 어미를 잡아 먹으려나 보다”
시어머니의 한탄소리에 며느리는 옆에서 울고만 있다. 또 날이 새고 해가 저물어도 안채 사랑방에는 돌로 깎아 놓은 부처처럼 좌진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김 참봉댁에 어둠이 가시지 않고 오늘따라 날씨마저 구름이 가득하여 침침해진다. 어머니 이씨 부인도 식음을 끊고 자리에 누웠으니 며느리만이 옆에서 시중을 든다. 이편도 들 수 없고 저편도 들 수 없는 신세였다.
또 다시 날이 밝고 어둠이 다가와도 안사랑방에는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며칠을 밤새운 며느리만 시어머니 곁에도 울고 있으니 초상집도 아니고 대재집도 아니다. 다시 새벽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 이씨는 머리에 매었던 수건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좌진아, 내가 네 말대로 할 테니 어서 이 문을 열어라! 내가 다시는 너의 뜻을 꺾지 않을 것이니 어서 문을 열고 나와서 뭘 좀 먹어야지. 이놈아! 무슨 일이든 살아서 해결해야지, 죽고 나면 다 소용없다. 어서 문을 열어라!”
자녀에게 약한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고 그것이 모정이다. 자녀들 역시 어머니에게 가장 약한 것이다.
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에 안사랑방의 문은 열리고 말았다. 좌진은 환한 얼굴로 뛰어나와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좌진은 어머니를 아랫목에 모셔놓고 공손히 절하며 말한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제 뜻을 허락하신 것이 참으로 장하고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실 겁니다.”
좌진은 무릎을 꿇은 채 어머니의 얼룩진 얼굴을 우러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