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합니하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의 꿈
1911년 음력 7월 초, 이회영(李會榮)은 망명자들의 입적 등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차별 대우와 불공정한 대우가 계속되자 중국인들의 방해를 정면돌파하기 위해 이상룡(李相龍)의 아우인 이계동(李季桐)과 더불어 심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동삼성(東三省) 총독 조이손(趙爾巽)은 조선에서 온 망명객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회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최고위급 권력자인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원세개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조(淸朝)가 몰락하고 이듬해 3월 임시 대총통이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북양수사제독(北洋水師提督)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청군(淸軍)의 군수참모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조선에 온 적이 있었다. 청국의 대표로 부임했던 27세 때는 가마를 탄 채 입궐했고, 국왕을 알현할 때도 기립하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원세개는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과 친교가 깊었고, 이회영 형제들과도 세교(世交)가 있었다.
이회영의 협조 부탁에, 더구나 일제의 침략으로 멸망한 한국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던 원세개는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비서인 호명신(胡明臣)을 대동시켜 동삼성 총독을 방문하게 했다. 원세개의 친서를 받은 조이손은 자기의 비서 조세웅(趙世雄)을 이회영에게 딸려 보냈고, 회인(懷仁)·통화(通化)·유하(柳河)의 세 현장(縣長)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만주 원주민들은 이주하여 오는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농업·교육 등 한국인들의 사업 일체에 협력할 것이다. 서로간에 분쟁을 야기하거나 불화를 조성하는 일체의 언동을 절대 삼가라. 만일 지시를 위반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런 훈시문이 곳곳에 게재되자 그 후로 한국인을 두려워하여 잘 바라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중국인들과의 갈등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토지매매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봉천성 의회에서는 한국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토지전매조차 금지법을 가결하였다. 이회영은 이때 호명신과 결의형제까지 맺었는데, 호명신은 이회영에게 추가가보다는 다른 지역의 토지를 구입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호명신의 권유에 따라 옮기게 된 곳이 합니하(哈尼河) 강가 근처였다. 현재 광화(光華)라는 이름으로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통화현에서 출발해 뢰산, 청하자의 첩첩산중을 한참 돌아 서광촌(曙光村)이란 마을을 지나면 현재 광화진(光華鎭)으로 이름이 바뀐 신안보(新安堡)에 닿을 수 있다. 이곳에는 푸른 파저강(婆猪江) 상류에 해당하는 합니하라는 작은 강이 구릉진 산을 휘감으며 압록강을 향해 흐른다.
이회영 일행이 군사훈련과 중등 교육과정을 가르치지 위한 군관학교 터로 계획한 곳은 광화진에서 동북쪽으로 2~3킬로미터 떨어진 합니하 강가였다. 강물이 산 주위를 반원을 그리며 돌아 흐르며 넓은 평야와 언덕을 만들었는데, 산 아래 언덕 들판은 군사훈련을 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요새였다. 게다가 광화진 쪽에서는 물론이고 합니하가 흐르는 곳에 나 있는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1991년 10월 이곳을 답사한 조선족 연구자 강룡권이 묘사한 주위 풍경은 다음과 같다.
“주위가 고산준령(高山峻嶺)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남북 10리나 되는 평원이 있고 그 남쪽 끝이 논밭보다 약 30미터 정도 높게 덩실하게 언덕을 이루었는데, 언덕 위엔 20정보(町步) 가량 되는 구릉을 이루어 마치 합니하 ‘평원’을 연상케 했다. 군사적으로도 영락없는 요새였다… 천연 무대와 서쪽 심산이 맞붙어 있기에 실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천험의 난공불락 요새’에 군관학교를 건립하려 했으나, 통화현에서 토지매매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이회영과 이계동은 동삼성 총독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최근 중국 요녕성 당안관에서 발견된 자료를 보면, 이회영이 만주 이민 한국인들의 입적과 토지 매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일이 지나도 회답이 없자, 1912년 4월 1일 이회영은 다시 토지 사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동삼성 도독에게 올렸다. 그제서야 청원서에 대한 반응이 빨라졌다. 드디어 7월 1일 가산을 구입할 수 있다는 비답을 받았다. 이회영과 이주민 일행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둘째 형 이석영이 거금을 쾌척해 이 일대를 사들였다. 그 이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 및 그 인근 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 터 맞은편 강 언덕에는 지금도 ‘고려관자(高麗館子)’라는 작은 한족(韓族) 마을이 있다. 무관학교 터에 고려여관이 있어 그 유래를 따라 지은 마을이라 하는데, 아마 이회영 식솔들이나 이주민 일행이 거주했던 숙소로 여겨진다. 1912년 음력 3월 학교 신축 공사에 들어가면서 드디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⑥ 지금도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그러나 서간도와 삼원포 일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아내기 힘든 혹독한 자연조건이었다. 서간도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괴롭힌 것은 4월까지 부는 차가운 바람과 지독한 추위였다. 초가을부터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얼음눈이 되는데 그 얼음 위로 마차가 달리면 바퀴가 얼음에 부딪치는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고 한다. 후에 이상룡의 손부가 되는 허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간도의 겨울추위는 엄청나다. 추운 날은 아예 공기의 낌 자체가 다르다. 공기가 쨍하게 얼어 붙은 것 같을 때도 있다. 어떤 때는 해도 안보이고 온 천지가 눈서리에 꽉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만 살아서 소리가 요란하다’ - 허은,「아직도 서간도의 바람소리가」
무서운 것은 혹독한 추위뿐만 아니었다. 메마른 황무지에서 춥고 배고프니 자연 풍토병이라 할 홍역·천연두·장질부사 등의 질병이 많았다. 그러나 질병에 걸려도 마땅한 약이 없어 그저 민간요법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회영의 5세 된 아들 규창이 어린이 전염병 백일해(百日咳)를 앓자, 환자가 당나귀에 입을 맞추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당나귀와 입을 맞추게 했다.
1911년과 1912년 흉년으로 인해 이주민들은 극심한 기아(飢餓)에 시달렸다. 서리가 일찍 내리고 날씨가 추워 흉작이 되자 식량난이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쇠약해졌다. 왕산(旺山) 허위(許蔿) 열사(烈士)의 형인 허혁(許赫)의 처조카와 권팔도의 아들, 그리고 당시 20세 청년인 이해동의 숙부에 이어 10세 된 그의 두 고모도 수토병(水土病)이라는 풍토병으로 죽었다.
서간도의 한국인 이주민들을 무섭게 하고 놀라게 한 것이 또 있었다. 바로 마적 떼의 습격이었다. 삼원포 일대가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아직 치안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삼원포 일대에 유난히 마적 떼들이 출몰했다. 이 때문에 이석영과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하마터면 마적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회영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국내로 잠입했던 1913년 10월 20일 새벽 4시쯤 마적 50~60여명이 이 마을을 덮쳐 함부로 총기(銃器)를 난사(亂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은숙이 어깨에 관통상(貫通傷)을 입고 피를 흘리며 쓰려졌다. 이은숙은 3세 된 딸 규숙(圭淑)과 갓 6개월 된 규창을 꼭 껴안아 두 남매는 목숨을 보존했으나, 세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김규식(金奎植)의 처남으로 세르란스병원 의사였던 김필순이 마침 통화에서 적십자병원을 열고 있었는데, 이은숙은 그곳에서 40일간 치료를 받고서야 회생할 수 있었다.
이석영은 자신의 집에서 기숙하던 두 학생과 함께 마적들에게 산채로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 관헌이 병력을 풀어 이석영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석영 일행이 일제의 강점 후 국권을 회복하려고 군대를 양성할 계획으로 만주에 왔다는 말을 들은 마적 떼들은 백배사죄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