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합니하(哈泥河)에 울려퍼진 독립군가(獨立軍歌)
통화현(通化縣) 광화진(光華鎭)의 합니하 강가에 새로운 터전을 일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처음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라는 이름으로 1912년 음력 3월 2일부터 시작해 6월 7일(양력으로 7월 20일) 역사적인 대망의 새 교사(敎舍)를 완공했다. 모든 공사는 교사와 학생들의 손으로 수행되었다.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었던 원병상(元秉常)의 수기를 보자.
‘삽과 괭이로 고원 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 요가구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드는 줄도 몰랐고 오히려 원기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 -《독립운동사자료집 10》원병상,〈신흥무관학교〉
이렇게 교사와 학생들, 지역주민이 합심하여 새로운 교사가 그 해 7월 마침내 완성되자, 1백여명의 이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낙성식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의 부지 매입과 건립 등 전 과정을 주관했음에도, 이후 아무런 직책을 갖지 않았다. 즉 학교 발기인으로는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해 이동녕(李東寧)·이관직(李觀稙)·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 등이 참여했지만, 이후 학교 교장은 이철영(李哲榮)과 이동녕에 이어 여준(呂準)과 이광·이세영(李世永) 등이 맡았다. 직책이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인품과 자유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부인 이은숙은「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통해 신흥무관학교 발기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교장 이상룡)이 분은 경상도 유림단(儒林團) 대표로 오신 분이고, 이장녕(李章寧)씨, 이관직씨, 김창환(金昌煥)씨 세 분은 고종 황제 당시에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으로 승급을 최고로 하던 분이다. 만주에 와서 체조 선생으로 근무하는데, 대소한 추위에더 세뱍 세시만 되면 훈령을 내려 만주서 제일 큰 산을 한 시간에 돌고 오는지라, 세 분 선생을 범 같은 성생이라 하더라. 여준 선생은 강제합방 전에 오산중학교 선생으로 근무 중에 애국지사로 우당장과 연락을 하시더니 임자년(1912년)에 합니하(哈泥河)로 오셔서 학교 선생으로 지내셨다. 그분 백씨(伯氏) 봉함장은 가족끼리 솔권하여 설산(設産)하고 지내셨다. 이상룡씨가 교장으로 4~5년 있다가 지방 학교로 가신 후 여준씨가 교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보았다.’
학교에는 큰 병영사(兵營舍)가 세워졌다.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마련되었고, 아울러 내무반 배부에는 사무실·숙직실·편집실·나팔반·식당·취사장·비품실 등이 갖추어졌고, 낭하에는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銃架)가 별도로 설치되었다. 항일투쟁에 헌신하겠다고 찾아온 애국 청년들에게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회영의 의지에 따라 학생들은 수업료 등 일체의 학비를 내지 않았다. 학교 유지비도 그러했지만, 학교 식당에서의 식사는 학생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것을 포함하여 한국인 유지자들이 부담한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이석영·회영·시영 형제의 집에서 돌보았다. 얼마나 많은 학생들의 식사를 장만해야 했는지, 이시영의 부인 박씨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을 뒷바라지하다가 그만 과로로 병에 걸려 죽을 정도였다.
교직원의 복장은 사계절 백색 무명으로, 상의에는 단추 다섯 개가 달렸고 하의는 통으로 되어 있었다. 생도들은 농사를 짓고 실업(實業)에 힘쓰면서 수업에 임한다는 취지로 농천황색(濃淺黃色)으로 염색한 다치푸(만주어)를 필로 끊어 만든, 교직원과 같은 양식의 제복을 입고 학생모를 썼다. 신흥무관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 중학 과정이었고 특별과는 6개월, 3개월 속성의 무관양성 과정이었다. 무관학교 생도들의 하루 일과는 원병상의 수기에 생생하게 나와 있다.
‘모든 생도들은 새벽 여섯 시 기상나팔 소리에 따라 3분 이내에 복장을 갖추고 검사장에 뛰어가 인원 점검을 받은 후 보건체조를 하였다. 눈바람이 살을 도려내는 듯한 혹한에도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켰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인물인 여준 교장은 겨울에도 털모자를 쓰지 않은 채 생도들의 체조 광경을 지켜보았고, 벌도 매서웠다고 한다. 활기찬 목소리, 늠름한 기상에 뜨거운 정성이 담겨 있었다.’ -《독립운동사자료집 10》원병상,〈신흥무관학교〉
체조 후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별로 나팔소리에 맞춰 식탁에 둘러앉았다. 주식은 가축 사료나 다름없는, 윤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좁쌀이었다. 부식은 콩기름에 절인 콩장 한가지뿐이었다. 학생들이 얼마나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었는지는 한 일화로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낙성식 때 이석영이 큼직한 돼지고기를 기증하자 이를 정신없이 먹은 생도들은 배탈이 나 여러 날 고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턱없이 부족한 식사와 의복에도 불구하고, 교직원은 단의(單衣)와 초모자를 쓰고 교육을 시켰고, 학생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훈련에 열중했다.
유명한 웨일즈(Nym Wales)의『아리랑』에서 주인공인 김산(金山)의 모델이었던 장지락(張志樂)의 생생한 경험담이 적혀 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합니하에 있는 독립군의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렸다……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저 연령이 열여덟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마침내 나의 기나긴 순례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학교 측은 나를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해야만 하며 그러므로 시험을 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학교는 산 속에 있었다. 열여덟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살에서 서른살까지의 학생들이 일백명 가까이 입학하였다……우리들은 군사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銃器)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깊게 연구하였다. 그날을 위하여. 방과 후에 나는 국사(國史)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봄이면 산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로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할쏘냐?’ - 웨일즈,《아리랑》
아침 식사 후에는 조례에 나가 “화려강산 동반도는 / 우리 본국이요 / 품질 좋은 단군 자손 / 우리 국민일세 / 무궁화 삼천리 / 화려강산 / 우리 나라 우리들이 / 길이 보존하세”라는 노랫말로 돼 있는 애국가를 불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또한 ‘독립군 용진가’를 불러 사기를 북돋웠다.
"요동 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 여진국을 토벌하고 개국하옵신 /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 (후렴) / 나가세 전쟁장으로 / 나가자 전쟁장으로 / 검수 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 삼천만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이외에도 학생들은 민족의식과 반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장에 나가 용감히 싸우기 위한 창가를 즐겨 불렀다. 다음은 신흥무관학교 교가다.
‘서북으로 흑룡(黑龍) 대원(大原) 남(南)의 영절(獰浙)에 여러 만만(萬萬) 헌원(軒轅)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東海) 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고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후렴) 우리 우리 배달 나라에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가슴 좔좔좔 걸치며 돈다. 장백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 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 설움 받는 이 뉘뇨? (후렴)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달련코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이 끌어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후렴)’
전체적으로 이 교가는 웅혼(雄渾)했던 한민족사(韓民族史)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각오와 자세, 사명감을 갖게 하는 노래였다. 매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에는 학생이건 어린아이건, 또는 부녀자건 관계없이 신흥무관학교 운동장에 다 모여 기념행사를 가졌다. 동네에서 단체로 찰떡과 김치를 마련하여 나누어 먹고 간단한 식도 하고 연극도 했다. 경술년(庚戌年)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내용인데, 연극을 보고 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학생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운 아래의 노래를 집에 돌아가 누이나 가족들에게 가르쳤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오늘날 이 지경이 웬말인가? 4천여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날 이 지경이 웬말인가?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 손으로 끊어 버리고 독립만세 우레 소리에 바다가 긇고 산이 동하겠네’
신흥무관학교의 제반 사정은 아주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식량부족 문제가 가장 컸다. 당초 신민회(新民會)는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면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평안북도 지역에서 15만원, 우강(雩岡) 양기탁(梁起鐸)이 경기도 지역에서 20만원을 모금하는 등 평북·평남·황해·강원·경기 등 5도에서 총 75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전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11년 9월에 안명근(安明根)·배경진(裵敬鎭)·이승길(李承吉)·한순직(韓淳稷) 등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日帝)는 이 사건을 신민회와 연관지어 무려 7백여명의 신민회원을 검거하고 그 중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신민회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달하는 바람에 자금을 지원할 수 없었다. 원병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주식물이라고는 부유층 토인들이 이삼십년씩 창고 안에 저장해 두어 자체의 열도에 뜨고 좀먹은 좁쌀이었는데, 솥뚜껑을 열면 코를 찌르는 쉰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바람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끈기라고는 조금도 없고 영양 가치도 전무한 토인들 가축용의 썩은 곡식을 삶은 명색의 밥이었다. 부식이라고는 콩기름에 저린 콩장 한가지뿐이었다. 썩은 좁쌀밥 한 숟가락에 콩장 두어개를 입에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그나마 우리는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었다.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면서 교직원이나 생도들은 함께 모여 항상 화기애애한 가운데 식사 시간을 보냈다.’
학교 경영이 점차 어려워지자 중국인의 산황지(山荒地)를 빌려 밭을 일구었다. 일과가 끝나면 학생들은 편대를 지어 각 조별로 산비탈에 달라붙어 땀을 흘리며 괭이질을 했다. 억센 풀뿌리를 파헤쳐 밭을 만들고 옥수수·콩·수수 등을 파종해 거두어들였다. 학교 건너편 낙천동(樂天洞)이라는 산중턱에서 허리까지 차는 적설(積雪)을 헤치며 나무를 끌어내리고 등으로 나무토막을 져다가 땔감으로 사용해 겨울을 났다. 이렇게 힘든 노동에도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은 물론, 이극 교관의 함경도 사투리 섞인 산타령에 장단을 맞추어 즐겁게 일했다.
하지만 교직원과 학생들의 이런 노동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개교한 1911년1부터 12년, 13년에 거듭해서 가뭄과 서리의 천재가 겹쳤던 것이다. 게다가 고국에서는 볼 수 없던 수토병(水土病)이 번져 이시영의 아들이자 신흥무관학교 교사였던 이규봉의 남매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외조부를 따라 서간도에 온 권영신 역시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궁핍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합니하의 생활은 간고했다. 소금과 광목(廣木)천만 시내에서 구입하고 일체는 자급자족하였다. 연도에 토비들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육혈포(六穴砲)와 화승총(火繩銃)·통포총(筒砲銃)으로 무장한 30여명의 독립군이 소발구와 개발구를 이끌고 소금과 광목천을 사왔다…독립군들은 솜바지에 무릎까지 나오는 동저고리를 맸으며 올로초란 풀로 발을 감싸고 헝겊으로 다시 감싼 후 초신을 신었다. 발 모양이 아주 둥실하고 컸는데 며칠에 한 번 벗으면 그 악취가 코를 찔렀다.’ - 권영신,〈이 판서댁과 나의 외조부 그리고 부친〉《주간(週刊) 금일요령(今日遼寧)》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도 학교는 군관학교 본래의 사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과는 전략·전술·측도학(測圖學) 등의 이론과 보(步)·기(騎)·포(砲)·총검술(銃劒術)·유술(柔術)·격검(擊劒) 등을 익혔다. 국사교육도 철저히 시켰다. 이상룡이 지은《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조선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史書)였다. 단군 혈통이 북부여에서 동부여, 고구려로 3천년간 연면히 이어졌다는 사관으로 기술된 책이었다. 그리고 발해를 높이 평가하여 발해를 고구려의 왕통을 이은 나라로 서술하였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는 투철한 역사관으로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 항일투사를 배출하는 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이 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金鍊)·변영태(卞榮泰)·이규봉(李圭鳳)·성주식(成周寔) 등 40여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3천 5백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생들의 의기는 대단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료인 이마무라 구니[今村那] 등은 헌병대 장교 오타 기요마츠[太田淸松] 대위(大尉) 등과 함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교민들의 실태를 조사했다. 실제 목적은 당연히 한국인 교민들의 실태를 파악해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신흥무관학교는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해 직접 오지 못하고 한국인 보조원 정찬(鄭璨)을 시켜 대신 방문하게 했다. 일본 헌병대의 보조원 정찬이 교민 이영순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벌어졌던 일이 ‘국경지방시찰복명서(國境地方視察復命書)’란 보고서에 실려 있다.
‘…야밤에 생도 20여명이 그 침소에 돌입하여 와서 혹은 치고 혹은 찌르며 매도하기를, “너는 어떤 연유로 일본인에게 사역하느냐, 빨리 가래 한 자루를 들고 우리와 행동을 같이하라. 우리는 배우며 또한 갈며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고 있다”고 하며, “너는 돌아가서 일본인의 수족이 되어 사는 것보다 깨끗이 이곳에서 죽지 못하겠느냐?”면서 “또한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너의 생명은 장백부(長白府)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며 마침내 감격에 벅차 체읍(逮泣)하고 호호(呼號)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그 일반(一班)을 엿볼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이처럼 스스로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리고 구호를 외칠 정도로 생도들이 의기에 차 있던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
② 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가?
이회영은 자신과 함께 온 종이나 멀리서 찾아온 지게꾼들, 농부들을 모두 독립군으로 받아들였다. 그 중에 원래 종이었던 홍흥순이 노비가 종래 습관대로 길게 대답하면, 이제는 종의 신분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심부름도 독립을 위한 일로 노비의 습성을 버리라고 꾸짖었다. 권영신은 이회영 일가를 따라 열세명의 종이 함께 왔다고 증언했는데 독립군이 되면서 상하와 귀천, 나리와 종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독립군 지원을 명분으로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국인 밀정들이 이곳 정보를 캐려는 사례가 빈번했다. 이 때문에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신분이 불분명한 자가 나타나면 일단 밀정으로 판단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승려 출신의 시인으로 훗날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총격을 받아 죽을 뻔했던 일화는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만해는 전부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에 1913년 두만강을 건너 홀로 이 학교를 찾아갔다. 아무런 사전 소개인이나 안내인조차 없이 무작정 찾아온 만해를 맞이한 이회영은 그곳에서 며칠 머물게 하였으나, 학생들의 경계 눈초리는 매서웠다.
며칠 후 그는 이회영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나 여비가 부족하다고 하였고, 이회영은 형 이석영에게 부탁하여 노자 30원을 주도록 했다. 만해가 합니하를 떠나 통화로 가던 도중에 굴라제 고개에서 그를 일본 경찰대의 밀정으로 수상히 여겨 뒤따라온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小銃)으로 그의 뒤통수를 향해 탄환을 쏘았다. 학생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덤불 속에 내동댕이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회영은 만해가 통화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인 것을 알고 학생들을 불러다 놓고 심하게 꾸짖었다.
이회영은 3·1반일시위운동 이후 부인 이은숙에게 말하길, “연전에 합니하에 소개없이 청년 하나가 오지 않았던가? 그분이 지금 왔어. 자기가 통화로 가다가 총탄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 생명을 빼앗으려 했던 분들을 좀 만나 보면 반갑겠다’고 하니 그분은 영웅이야”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내 그때 학생들의 짓이 아닌가 하여 학생들을 꾸짖지 않았소? 그러나 그분이 총탄을 맞고 최후를 마쳤다면 기미년(己未年) 만세에 독립선언서를 누구하고 같이 지을 것이며, 33인의 한 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이 일로 인해 한용운은 평생 병적으로 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체머리로 고생하며 살아야 했다.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할 당시 이회영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있다. 1914년 5월 30일 하와이에서 발행된 교포신문인《국민보(國民報)》에는 그의 글로 추정되는 논설이 실려 있다.〈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그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매 충신을 생각한다 하였고 비상한 인물이 나면 비상한 사업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한국은 충신을 생각하는 때이며 다시 비상한 인물을 요구하는 시대로다. 미국은 워싱턴을 기다려 독립을 이루었고,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이르매 연방이 되었나니.
알지 못하겠노라, 한국아! 어찌 오늘까지 국가를 부흥하는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을 구원하는 위훈을 세울 영웅을 얻지 못하였는가? 세계의 공론을 듣고 우주의 대세를 돌아보니, 한국이 부활할 날이 멀지 아니하였도다. 그런 즉 이 일을 이룰 영웅이 반드시 산출하려니와 그 영웅은 어디 있는고 (중략) 겸양하여 그러한지 몇몇 인도자에게만 너무 전탁하는 경향이 적지 아니하니, 이 일이 좋기는 좋거니와 경천위지(經天緯地)하는 대정치가도 한 사람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며, 신출귀몰하는 대군략가도 한 사람으로는 용맹을 쓰기 어렵도다. 오늘날 우리가 주소(晝宵)로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삼척동자라도 반드시 독립이요 자유라 하니, 이 목적을 관철하며 이 이상을 통달할 정치기도 우리 중에 있고 전략가도 동포 중에 있고 인도자도 사회상에 있지만, 오직 한가지 부족한 것은 가장 크기도 하고 많기도 한 것이라, 한국이 요구하는 바는 정치가, 전략가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니, 이가 누구인고 하니, 곧 개인의 천직을 다하는 자, 사회에 책임을 행하는 자,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자이라.
한두 사람의 이 같은 것을 요구함이 아니요, 국민 대동의 이 같음을 요구함이니, 대영웅이 대국민만 같지 못하다 함은 천만년의 격언이오 진리가 있는 보훈이로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상고컨대,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중략) 우리 한국이 만겹 겁운(劫運)을 벗고 청천백일을 보며 원수(怨讐)의 기반(羈絆)을 면하여 자유의 복지에 달하자면 비상한 담략과 용맹과 열심과 성력과 모략과 지식과 수단이 있어야 목적을 달할지니, 이는 한두 영웅이나 세넷 인도자의 능할 바가 아니라 오직 그들은 지로승(指路僧)이 될 분이요, 무수한 영웅을 반드시 요구하나니, 이 무수한 영웅은 곧 다시 말하건대 자포자기하지 말고 아직 자진 자강하여 인생에 가장 귀중한 것을 깨닫고, 검은 방장, 콩기름 등 아래와 푸른 다락 아와 즙에 불쌍한 세월을 지내지 말고, 배우든지 일하든지 개인의 천직을 다하여 사욕과 사리에 매두(埋頭) 몰신(沒身)하여 우준한 말하는 동물이 되지 말고, 독처(獨處) 고거(孤居)하여 정막(靜寞) 초췌(憔悴)한 생활을 짓지 말고, 사회는 나의 사회요, 나는 사회의 일분자이니 사회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을 생각하고, 공익을 경영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을 행하며, 살아도 국가가 없는 자는 나라가 있고 죽은 자만 같지 못하도다. 오늘 하와이 동포는 더욱 국가에 헌신할 길이 열렸거니와 어디 있든지 어느 때든지 우리는 말로만 말고 실행하기를 시작하며, 국가에 대하여 만일의 도움이라도 되기를 예비하고 기회를 기다려 국민 된 의무를 다함이니.
우리 단군의 신성한 유민 이천만은 한 사람도 누락 없이 이상에 말한 바 되기에는 쉽고, 사에는 커질 만한 무수 영웅이 되어 선조의 유전하신 자유를 회복하여 천추만세에 대훈을 세울지니, 평생은 하나이요 둘이 아니며, 세월은 한번 가고 다시 오지 아니하나니, 이때가 곧 그때이라. 깊이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여 각각 한국의 요구하는 인물이 될진저." -《국민보》, 1914년 5월 30일자『나라사랑 104호:우당 이회영 선생 특집호』
이 글로 보아 이미 이회영은 몇몇 명망 있는 지도자에게만 너무 의존하는 독립운동 진영의 경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소수 영웅보다 자각된 대중의 힘을 새 나라 건설의 원동력이라 믿었던 우당의 생각은 이미 근왕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민중적 자유협동주의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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