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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1자유협동사상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대모달 |2011.06.30 09:05
조회 103 |추천 0

 

① 권력 중심 지배욕을 버리고 자유합의에 근거해야

 

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에서 이제 갓 군사교육을 마친 젊은 독립운동가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 지사(志士)는 1927년 9월 하순 북만으로 떠나기 전 천진의 노혁명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를 찾았다. 192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주역이었던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의 사촌 동생으로 1925년 4월 운남성 곤명(昆明)에서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종진 지사는 이제 막 북만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이끌고 있는 김좌진 장군을 만나러 가기 전이었다.

 

그는 6년전 북경에서 우당한테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을 소개받고, 그의 소개장을 휴대한 채 상해를 거켜 홍콩과 베트남을 경유해 곤명에서 2년간 정식 사관 군사교육을 받은 전도양양(前途洋洋)한 청년이었다. 환갑을 넘긴 노혁명가는 빈민가인 남개구의 조그만 토만세방에서 고아 아닌 고아 남매를 데리고 궁핍 절정의 처지에 있었다.

 

1920년 북경에서 헤어진 지 무려 7면만에 고국의 명문가 출신 인사를 이역의 빈민가 토방에서 다시 만난 김종진은 ‘국파가망(國破家亡) 신기로(身旣老)’의 망국한(亡國恨)을 가슴 깊이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김종진의 손을 잡고 우당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소식은 때때로 들었는데 수년의 고초가 과연 어떠했는가? 고초는 고초일망정 이제는 분명 대장군이 되었구나.”

 

우당은 북만주로 가겠다는 김종진의 구상에 근래에 처음 듣는 낭보라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지나간 이야기로 시작해 장차 앞으로 해야 할 모든 문제와 각지의 제반 사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다.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식사는 염죽(鹽粥)뿐이었다. 한때 삼한갑족(三韓甲族) 명문가(名門家)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은 재력가였던 우당이 한 그릇 죽에 소금 한 종기를 반찬 삼아 시장기를 때우는 모습을 보고 김종진의 눈에 저절로 안개가 서렸다. 그러나 우당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패권주의와 파벌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앞으로 북만주에 가거든 잘못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종진은 환갑이 넘은 이회영이 아나키스트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당의 태도는 당당했다.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독립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그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럴 뿐이지,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는 우당의 평소 생각과 성향이 자유협동주의(自由協同主義)와 같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내가 존왕파(尊王派)였다면 물론 180도의 사상 전환이라 하겠지만, 과거 한말(韓末) 당시로부터 3·1운동 직전까지 내가 고종(高宗)을 앞세우려고 한 것은 복벽적(復辟的) 봉건사상에서가 아니라 한국 독립을 촉성시키려면 그 문제를 세계적인 정치문제로 제기해야겠는데 그러자면 누구보다도 대내외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가질 수 있는 인물(고종)을 내세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데서 취해진 하나의 방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씨가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로 모셔가려던 생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1918년 고종 황제를 북경으로 모시려던 그의 계획 역시 존왕파의 봉건사상 때문이 아니라 대내외의 호응을 얻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의도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당은 다른 사람들처럼 누구의 사상적 영향과 지도를 받고 의식적으로 아나키스트가 된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생각과 성향이 자유협동주의 사상과 맞았다고 했다. 이정규가 추가로 기록한 문헌에는 이 대목이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본래 벼슬을 원히 않는 사람이오, 불평등한 신분제도도 본래 반대하던 사람일세. 독립을 하자는 것도 나 개인을 위한 영욕에서가 아니라, 전 민족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행복된 생활을 다 같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니만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알맞은 제도와 구조를 생각한 끝에 얻어진 결론이니까 이것은 나의 일관된 사상이오,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나는 믿는 까닭에 이런 나의 생각이 무정부주의 사상과 공통된다고 하여서 사상적 전환을 하였다고 하는 그런 의견에는 나는 수긍할 수가 없네. 따라서 사심이 없고 공정무사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일세.”

 

우당이 자기가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와 그간의 행적에 대해서 솔직히 설명하자, 김종진은 자기가 그간 아나키즘에 대해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 물을 자신이 생겼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방법론인 자유연합이란 것은 말은 그럴 듯하지만 너무 산만하고 허황된 것이 아닙니까? 더욱이 우리처럼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에서 볼 때 그런 이론을 가지고는 도저히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강력한 일제와 투쟁하여 이기려면 철의 규율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자들처럼 강력한 정당이나 군대 등 조직체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우당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독립운동자의 견지에서 나는 자유연합이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모든 운동자들이 자기 사상은 어떻든 간에 실제에서 무정부주의의 자유연합이론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는 거지. 3·1운동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숱한 단체와 정당이 생겼지만 그들 사이에 단원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고 강제적 명령에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그러한 단체가 어디 있는가? 남들이 강철의 조직이라고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해도 그것은 적색 러시아처럼 자기들의 정치권력이 확립된 이후의 말이지, 그들도 혁명당으로서의 혁명 과정에서는 운동자들의 자유합의에서 행동했던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김종진 자신부터 어떠한 것이 독립운동에 적합한 노선인지 판단해 그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노선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견지에서 볼 때,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란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확고한 자각과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운동자들의 자유합의가 있을 뿐이니 이것은 이론으로도 당연한 것이다.”

 

김종진은 독립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는 우당의 말에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우당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좌절하기는커녕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해방운동이나 혁명운동은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이고 운동자 자신들도 자유의사와 자유결의에 의해 수행하는 조직적 운동이었다. 그 형태는 어떠하든지 사실은 다 자유합의의 조직적 운동이었다.”

 

김종진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자유합의에 의한 운동을 추구한다는 아나키즘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김종진 역시 그동안 독립운동 진영에 나타난 불미스런 분규와 난투가 사실 권력 중심의 지배욕에 원인이 있음을 간파했고, 이를 근절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권력 집중을 배제하는 자유합의의 이론에 근거한 조직이라면 이른바 ‘감투’가 없으니 가장 적절한 방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당은 자기 개인 욕심을 버리고 오직 일만을 위하여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쓸데없는 자기 고집이 없이 공정한 사물의 판단이 내려지는 것이며 솔직히 남의 의견을 따를 수 있는데, 김종진도 자기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역시 무정부주의자가 될 만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 방안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② 상호부조하여 자유협동적 대동의 신세계로

 

그간 독립운동에서 나타난, 지방색과 일부 개인 중심의 파벌들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김종진에게 사욕을 버리고 일을 위주로 생각한다는 아나키즘은 높은 이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장차 우리가 독립을 전취(戰取)한다면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하겠습니까?”

 

“자유와 평등을 함께 중시하는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와 민족 간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이 섰으면, 그 원칙 아래서 독립한 민족 자체의 내부에서도 또한 이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그대로 실현되어야 하네. 국민 상호간에는 일체의 불평등과 부자유가 있어서는 안 되네. 자유합의를 바탕으로 한 운동자들의 조직적인 희생으로 독립이 쟁취된 것이니까 독립 후의 내부적 정치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피하여 지방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해야 하고, 아울러 지방자치제들의 연합으로 중앙 정치기구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네.”

 

“경제체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경제 관계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하고 동시에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되어야 하네. 하지만 이 경우 사회적 자유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관리와 운영이 합리화되어야 할 것이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 부담하고 실시되어야 하네. 가난하다고 해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면 안 될 것이네.”

 

김종진은 우당과의 대화에서 이상에 가까웠던 개념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반대하려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님의 이러한 구상과 무정부주의 이론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무정부주의란 사회개혁의 원리일세. 그 기본이 되는 자유합의 이론과 자유평등의 원칙을 살려서 그 사회 현실에 맞도록 실현하면 될 것이네. 우리가 지금 논의한 이런 모든 점들은 새 사회의 기본으로서 한국의 무정부주의자들도 대략 다 찬성할 것이네.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서 꼭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기본 원리를 살려 나가면서 그 민족의 생활습관이나 전통과 문화, 또는 경제적 실정에 맞게 적절한 변화를 가미하면 될 것일세.”

 

김종진은 여기에서 우당의 아나키즘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책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나키즘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이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그런 이념 아래 독립을 성취했다고 할 때,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들과 국제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니 각 민족 또는 각 사회군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자유연합적 세계기구를 만들어 연결해야 할 것이다. 각 민족 단위의 독립된 사회가 완전히 독립적인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의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한편 다른 사회와 관계된 문제나 공동의 과제에 대해서는 연합적인 세계기구가 토의 결정하여 실행해 나가면 될 것이다.

 

그 단위 사회는 독립된 주권이 확립되어 있으니 한 국가가 아니겠는가 할 것이나, 그것을 국가라 하여도 무방하지만 세계연합의 일원인 까닭에 마치 미합중국(美合衆國)의 각 주가 한 주이지 독립국가는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한 사회라는 말과 한 국가라는 말이 동일 개념의 어휘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궁극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니까 별개의 문제로 하고 현재와 같은 국제 관계에서도 공산주의 러시아와 같이 1국 1민족이 특수한 이념과 정치태세로서도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을 상정할 때 독립된 한국은 어떠한 것인가 생각할 문제이다. 독립된 한국으로서는 대외 관계가 이해 대립되는 관계이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한 독립된 국가로서 국제 관계가 맺어져야 할 것이다. 또 치안과 국방문제도 일어날 것인데 이런 외교·국방·무역관계·문화교류 등 모든 문제는 한 사회의 중앙 연합기구, 즉 중앙정부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독립사회 이론이 실제 문제이므로 현실과 부합하는 합리적인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수일을 두고 우당은 김종진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당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상호부조하고 협동노작(協同勞作)하는 사회적 본능이 있어 왔네. 때로는 이기적인 투쟁도 하지만 그보다는 양보와 협동으로 상호 간에 더 큰 이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고립해서는 생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충돌과 투쟁을 피하고 타협과 이해로써 생존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 왔고, 현재도 그렇다네.”

 

“현재 사회는 양보와 협동보다는 이기적 투쟁이 더 앞서지 않습니까?”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인간상호간, 사회상호간의 증오와 불신은 과도기적인 것이요, 불변의 것도 아니네. 태고로부터 연면히 내려온 인간성의 본능은 선한 것이네.”

 

김종진은 평생을 타협 없이 살아온 노혁명가 이회영에게서 진정한 인본주의, 나아가 세계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공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결코 남을 억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극도의 가난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절대 독립의 이상과 새 나라 건설의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남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공의가 실현되는 진정한 평화 사회를 위해 싸우는 휴머니스트, 상호부조와 공존공영의 이상사회를 꿈꾸는 세계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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