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상해노동대학(上海勞動大學)과 천주(泉州) 민단편련처운동(民團編練處運動)
1927년 3월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 북벌군(北伐軍)이 중국의 심장부인 무창(武昌)과 한구(漢口)·남창(南昌)을 석권하고 드디어 남경과 상해를 무난히 점령했다. 이로써 손문(孫文)이 죽은 지 2년만에 국공합작에 의한 중국 국민혁명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1927년 5월 30일 상해에서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태는 다시 국공 분열의 조짐으로 나아갔다. 남경정부는 아나키스트 원로인 채원배(蔡元培)·오종휘(吳鍾暉)·이석증(李石曾) 등에게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는 ‘청당(淸黨)운동’을 주도했다. 공산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건전한 노동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일꾼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노동운동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서 노동대학을 구상한 것이다.
1927년 봄 중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국민당 중진인 이석증과 채원배·오종휘 등의 발의에 따라 상해노동대학은 남경 국민당 정부에 의해 정식 설립되었다. 설립 준비 실무위원으로 정부 측에서 이석증과 오종휘·장정강(張靜江)이, 학계에서 심중구(沈仲九) 교수가 담당했다. 여기에 한국인인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와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를 객원교수로 초빙한 것이다.
상해노동대학은 정규 교육과정의 노공학원에 단기 훈련과정으로 노공요원 양성소를 부설하기로 했다. 이을규·정규 형제와 이와사 사쿠타로 등 실무주비위원들은 양성소를 1927년 7월 1일에, 정규 대학과정은 9월 1일 개학할 것을 결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주비위원들은 교과목 편성과 교강사로는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郞]와 에스페란티스트 야마가 타이지[山鹿泰治], 그리고 프랑스의 폴 루크류(엘리제 루크류의 동생)을 초빙하기로 했다. 노동대학에서는 에스페란토와 프랑스어가 선택과목이었고 사회문제를 비롯해 사회주의의 역사, 국제 노동운동의 역사, 세계 현대사, 노동문제, 사회보장법과 노동법, 사회진화론의 역사, 문화가치 진화의 이론 등을 필수과목으로 선정했다. 이후 남경정부 교육부의 교육지침에 따라 군사훈련과 당의 이념 등 삼민주의 교육이 필수과목이 되는 등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노동대학은 공산주의 이념과 투쟁할 인재 양성을 목표로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국민당 세력과 협력하여 야심찬 실험을 시도했지만, 처음부터 국민당과 정부에 전적으로 의지해 출발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대학의 개교준비에 밤잠을 설치던 6월 중순경, 이을규·정규 형제는 돌연 중국인 동지인 양용광(梁龍光)과 진망산(秦望山)으로부터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농촌 청년들을 조직, 훈련하여 자위조직으로 양성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들은 토비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농촌조직을 보호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진강현 선전원양성소’를 설치했는데, 정작 농촌운동의 방향을 지도할 인재를 찾고자 온 것이다. 노동대학 주비위원들은 격론 끝에 노동대학 건립과 복건성 농촌운동을 병행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정규는 의열단 출신인 이기환과 류기석(일명 유서)에게 도움을 요청해 함께 샤먼 교외의 양성소로 집결했다.
7월 1일부터 선전양성소의 강의를 시작했는데, 이정규가 서양사회운동사와 공산주의 비판, 신정치론, 농촌사회조직론 등을 맡았고, 류기석이 신경제학과 자본주의 사회해부 등을 강의했다. 이들은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학과 강의와 수양 강좌를 비롯해 총검술과 토론회 등으로 바쁘게 교육했지만, 학생과 강사가 조금도 피로나 염증을 느끼지 않고 단합된 분위기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 무렵 이을규와 이정규는 각각 북경의 우당에게 편지를 보내 운동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상해에 남은 이을규는 노동대학의 설립 취지와 현재 준비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대학에 중학교도 부설하기로 했다면서 아들 규창을 상해로 보내라는 편지를 부쳤다.
복건성 천주에 내려 간 이정규도 백정기를 통해 노동대학 소식과 복건성 농민자위군 운동 참여 소식을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당의 가슴은 뛰었고 노구를 이끌고 성원하러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실행하기 어려웠다. 이정규는 북경의 노스승이 그저 서신으로만 수천리 밖에서 계속 격려는 보냈다고 회고했다.
1927년 9월 무렵 복건성 농민운동에 이을규와 유지청(劉志靑)이 합류했다. 이들은 때마침 공산당군을 추격하는 국민당군의 제안으로 천주와 영춘(永春) 일대를 중심으로 농촌자치, 자위조직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이 조직은 그해 10월 ‘천영이속(泉永二屬)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로 명칭을 바꾸어 편성했는데, 한국인으로는 비서장 이정규와 회계 이을규를 비롯해 교육선전부에 류기석, 훈련지도부에 이기환과 유지청이 각각 배치되어 완전히 한·중 합작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자유자치’와 ‘협동노작’, ‘협동방위의 생활’을 강령으로 삼은 민단편련처는 향토방위를 위해 무장방범대를 조직하고 마프노 전법의 훈련을 시작했다. 다행히 남양화교들에게서 무기 구입 자금 지원도 약속받았다. 그러나 1928년 토비들의 급작스런 공격으로 천주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약속한 재정 지원도 중단됨에 따라 민단편련처운동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기환이 일본 영사관에 구금되는 사태마저 발생했는데, 이때 마침 찾아온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이나 백정기(白貞基) 등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기에 이르렀다. 만 10개월에 걸친 민단편련처운동은 이렇게 실패하고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상해로 철수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928년 5월의 일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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