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영풍그룹 시그네틱스, 타업체로 전직 요구
ㆍ안산·반월공단 업체 ‘정규직 0’ 점점 늘어
영풍그룹 계열사로 반도체 후가공업체인 시그네틱스의 경기 안산 공장에서 일하는 이모씨(53)는 지난 13일 회사로부터 두 번째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는 2001년 시그네틱스 공장 이전 과정에서 해고당해 2007년 대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6년 만에 어렵사리 다시 일하게 됐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회사는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안산 공장을 다른 업체에 영업양도하면서 회사를 퇴직하고 그 업체로 전직할 것을 요구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전직에 응했지만 이씨를 비롯한 32명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회사는 남아 있던 이들 ‘마지막 정규직’ 32명에 대해 다음달 14일부로 해고를 통보했다. 이씨는 “살길이 막막하다. 자녀 둘이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남편 혼자 벌이로는 등록금 마련이 쉽지 않다”며 “회사가 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사측의 계획대로라면 시그네틱스는 다음달 ‘정규직 0명’인 공장이 된다. 일부 연구인력과 관리직은 직접고용으로 남겨져 있지만 생산직은 전원 사내하청 노동자로 채워지게 된다. 파주와 안산에 공장을 두고 있는 시그네틱스는 파주 공장은 100% 사내하청 노동자로 생산을 해왔지만 안산 공장은 정규직을 유지해왔다.
시그네틱스 노조 관계자는 “안산 공장 경영이 어렵다지만 시그네틱스의 지난해 매출은 2380억원, 순이익은 196억원에 이른다”며 “회사가 파주 공장을 증축하고 기계설비를 확대하는 만큼 파주 공장으로 고용을 승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영풍그룹 계열사는 대부분 지난 10년 동안 사내하청을 통한 비정규직 고용을 진행해왔으며 마지막 정규직 공장이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을 해고하면서 그룹 내 전체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규직 0명 공장’은 비단 시그네틱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아차의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도 생산직은 100% 사내하청 노동자로 이뤄져 있으며 STX중공업 창원 공장, 현대중공업 군산 공장, 현대하이스코 울산 공장도 100% 사내하청 노동자에 의해 공장이 굴러가고 있다.
중소기업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금속노조 관계자는 “안산 시화·반월공단과 구로공단 지역의 중소사업장은 정규직으로 운영되는 공장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2009년 정리해고를 실시한 쌍용자동차도 희망퇴직 노동자들에게 사내하청 업체로 갈 것을 요구했다.
기업이 사내하청을 통해 간접고용을 확대하는 이유는 더 적은 인건비로 언제든지 자르기 쉬운 인력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고용한 노동자를 해고할 때 생기는 복잡한 문제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2003년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세우자 조합원이 소속된 사내하청 업체를 폐업시켜 이들을 해고했다.
윤애림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은 “고용불안과 임금삭감은 아주 기본적인 문제이며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청업체가 간접고용 형태를 취하면서 각종 법률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