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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7.의병부대의 선전 ⑴

대모달 |2011.07.26 23:41
조회 98 |추천 0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和君).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가 되다.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을 연속 격파하면서 재해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멍청하고 시기심이 많은 국왕 선조(宣祖)와 별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잘난 척은 온갖 해대는 조정의 대신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을 떠나 다시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정식으로 분조(分朝)를 발족시켰다. 대신들도 두 무리로 나누어 배치한 뒤, 함경도로 간 왕비도 돌아오도록 했다.

한편 평양성은 좌의정(左議政)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평안도 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 이원익(李元翼), 평안감사 송언신(宋言愼) 등이 남아서 지키고 있었다.

대동강 남안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제1군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 주력부대였다. 이들은 강폭이 넓어 도강하지 못하고 강변 10여곳에 진을 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6월 13일, 김명원이 영원군수(寧遠郡守) 고언백(高彦伯), 벽단첨사 유경령(柳璟令)으로 하여금 날랜 군사 4백여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야습하도록 했다. 이들의 야습은 초전에는 성과가 보이는 듯 했으나 반격을 당해 얕은 여울을 타고 퇴각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이튿날 저녁에 일본군이 총공격을 시작하면서 어제 조선 관군이 건넌 그 수심 얕은 여울을 건너 쳐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날인 15일에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모두 달아난 평양성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그날 박천에 도착한 선조는 16일 가산을 지나서 17일 정주에서 묵고 18일에 곽산을 지나 20일에 용천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선조는 정주를 지날 때에 대사헌(大司憲) 이덕형(李德馨)을 명나라에 청원사로 보내 다급하게 파병을 요청하면서 '궁빈을 이끌고 상국에 내부코자 한다.'고 자신의 망명의사를 밝히는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명나라의 조정에서는 논란 끝에 차라리 군사를 보내 조선 땅에서 싸우는 것이 자국의 국익을 위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선조가 불가피하게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 기거는 빈집에서 하라고 했다. 이와 같은 명나라의 굴욕적인 조치와 대신들의 끈질긴 반대에 선조도 마침내 망명의 뜻을 꺾고 의주에 피난 조정을 설치했으니 그것이 그 달 22일의 일이었다.

명나라 군사들이 처음 압록강을 넘어온 것은 6월 18일이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이덕형이 요동순무(遼東巡撫) 학걸(壑杰)에게 출병을 호소하자 학걸이 명나라 조정의 지시가 있기도 전에 휘하 군사 5천명을 파견하기로 하고 우선 선발대로 1천명을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에게 딸려 보낸 것이었다.

이어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수도 북경에 가 있던 신점(申粘)이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통해 이를 추인토록 했다. 조승훈의 군사 1천여명은 본대가 올 때까지 의주에서 선조의 호위를 맡았다.

이리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서 명나라까지 가세한 국제전(國際戰)으로 확대되었다.

그 무렵 함경도로 잠입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북쪽으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맹렬히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런데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국초부터 조정으로부터 푸대접과 멸시를 받아왔기에 원한이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이곳 함흥 출신이면서도 건국 후 "서북 사람들을 높이 쓰지 말라."고 했고, 세조(世祖) 때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난 뒤부터는 차별정책이 더욱 심해져 조정에 대한 불만이 높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북 지방에서는 입신출세한 사람이 없었고, 또 서울의 양반들도 이 고장 사람들과 혼인을 꺼려했기에 변변한 양반조차 없는 고장이 되었으며, 부임해오는 벼슬아치마다 백성들을 천대하고 수탈만 일삼았으니, 전쟁이 터지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는지도 몰랐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함경도 사람들은 이제야 골수에 맺힌 원한을 갚을 날이 왔다고 기뻐 날뛰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잡혀 죽은 벼슬아치보다 백성들에게 맞아 죽은 관리가 더 많을 정도였다.

함경감사 유영립과 판관 유희진은 함흥이 함락되자 산속으로 도망쳤는데 유희진은 함흥에서, 유영립은 북청에서 각각 백성들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유영립은 북청 사람 김응전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의주까지 찾아갔다. 청령 방어를 포기하고 달아났던 남병사 이혼은 갑산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목을 베어 일본군 장수들에게 바쳤다. 북병사 한극함은 6진 병사 1천여명을 보아 마천령을 방어하려다가 일본군에게 궤멸당하고 경흥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조정으로 찾아갔으나 적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반란도 잇달아 명천에서 정말수(鄭末守), 종성에서 귀석과 성인손, 온성에서 강신(姜伸) 등이 각각 반란을 일으켰고, 우후 이범(李範), 온성부사 이수(李洙), 종성판관 이홍업(李弘業) 등이 이들에게 사로잡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7월 23일에는 회령까지 좇겨 갔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반역자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에게 붙잡혀 역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조선의 두 왕자를 잡아 개전 이후 일본군 장수들 가운데 가장 큰 전공(戰功)을 세우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국세필에게 경성을, 국경인에게 회령을 각각 다스리도록 맡긴 뒤 포로들을 데리고 안변으로 철수해 주둔했다.

한편, 분조를 이끌고 영변을 떠난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가르는 낭림산맥을 넘어 개마고원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철령을 지키던 남병사 이혼이 패전(敗戰)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분조는 험준한 산맥을 타고 강행군을 계속해 맹산, 초산, 양덕, 곡산을 거쳐 7월 5일에는 가원도 이천까지 내려갔다. 이곳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호조판서(戶曹判書) 한준(韓準), 병조참판(兵曺參判) 정윤복(丁胤福), 이조참의(吏曹參議) 홍혼(洪渾) 등 대신들을 모아 비로소 분조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들은 7월 28일에 이천을 떠나 다시 곡산으로 올라갔다가 8월 4일에는 성천으로 이동했고, 이후 낭림산맥의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집했다.

그 동안 전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평양을 점령한 제1군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가 더 진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발길을 멈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던 증원군은 오지 않았다. 서해를 돌아 대동강으로 들어오기로 예정되었던 증원군과 군수물자를 실은 수군이 이순신의 함대에게 연속 격파당해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유성룡(柳成龍)은 안주,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순안,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숙천 등지에서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는 한편, 명나라의 지원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명나라 군사들이 지나갈 지점에 군량과 말먹이도 비축했고, 청천강에는 부교도 만들어 놓았다.

◆ 의병들의 눈부신 활약.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유격전(遊擊戰)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3개월 동안 적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전라도는 본래 제6군 지휘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공취(攻取)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제6군의 실전은 안고쿠지 에게이[安國寺惠瓊]가 맡았는데, 그는 히로시마[廣島] 안국사(安國寺)라는 절의 주지 승려였다. 그러나 이들 제6군은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거창의 김면(金沔), 성주의 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방해를 받아 전라도 땅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게 된다.

이들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막고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적군이 점령하고 있던 읍성을 공격하여 탈환하는 대규모 작전까지 감행했다.

안고쿠지 에게이는 창원의 별군을 거느리고 팔량치를 넘어 남원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의령 정암진에서 곽재우의 의병부대에게 기습을 받아 대패했고, 금산 주둔군으로 하여금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가게 했다가 거창 우척현에서 김면의 의병부대에게 격퇴되었다.

그러자 일본군 제6군은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돌아서 전라도 무주, 금산으로 쳐들어갔다. 무주를 지나 6월 23일에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전라도로 진격하려고 했다. 한 부대는 자신이 거느리고 진산을 거쳐 이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안고쿠지 에게이가 통솔하고 용담, 진안을 지나 웅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었다.

전라도는 앞서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세 대패한데다가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공격에 한때 당황했으나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1천 5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성으로 들어오자 혼란은 곧 가라앉았다. 이어서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고, 나주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김제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 의병대장 황박(黃璞)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권율을 임시 도절제사로 삼아 방어전(防禦戰)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권율은 정담에게 웅치를, 황진에게 이치를 각각 담당하게 했다. 전에 함경도에서 여진족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는 두 사람은 군사를 거느리고 두 고개에 주둔하여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7월 2일. 에게이가 지휘하는 금산의 일본군 제1대가 용담을 공격하고 5일에는 진안을 친 다음 7일에는 웅치에 나타났다. 정담을 주장(主將)으로 삼은 웅치의 조선 관군과 의병들은 이틀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3천여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 패퇴(敗退), 웅치의 방어선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치에서는 권율과 황진이 포격전(砲擊戰)과 백병전(白兵戰)을 감행하면서 맹렬한 용전분투(勇戰奮鬪)를 전개했고, 고경명(高敬命)의 의병부대가 금산의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자 에게이는 군사를 되물려 퇴각하였다.

고경명은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있다가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고향인 장흥에 낙향해 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5월 29일에 담양에서 의병 6천여명을 모집하여 국왕을 보호하기 위해 북상했다. 도중에 전주에서 남원의 의병 1천명과 합세하여 계속 북진하다가 이미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북쪽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남하하다가 금산의 적군을 공격했던 것이다.

고경명은 6월 27일 여산을 떠나서 은진을 지나 7월 1일에는 연산으로 이동, 충청도의 의병대장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헌의 합류시기가 늦어져 먼저 떠났다. 그리하여 웅치와 이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8일에 연산을 떠나 9일에 진산에 도착하여 방어사 곽영(郭嶸)과 영암군수 김성헌(金成軒)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했고, 이날 오후에 금산성을 포위했다.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휘하의 일본군 1만여명은 모두 금산성에 돌아와 있었다.

전투는 10일 새벽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고경명이 기마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공격하는데 갑자기 적군이 성문을 열고 총공격을 퍼부었다.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상대적으로 허약해 보이는 관군의 진영을 집중 공격했고, 곽영과 김성헌이 달아나자 관군은 이내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일본군이 이번에는 의병부대를 짓밟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노도와 같은 돌격에 의병부대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는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칼에 베여 쓰러졌다. 고경명도 적병들의 총탄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고경명(高敬命)의 첫째아들인 고종후(高從厚)는 부친과 동생의 시신을 찾아 가까운 절에 모신 뒤 의병부대를 재편성하여 곳곳에서 적군과 싸웠다. 그는 이듬해 벌어진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서 전사했는데, 이로써 고경명 3부자는 모두 의병대장으로 순국한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이끈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8월 17일 이들은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전몰(全歿)한 조헌과 의병 7백명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고 9월 17일 경상도 성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전라도 방어전이 일단락되자 권율은 그 전공으로 전라감사가 되었다. 전임자 이광은 전주성 전투 때에 성을 이탈한 죄로 파직되어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권율의 사위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이항복(李恒福)은 백사집(白沙集)에서 이렇게 썼다.

'적군이 다시는 호남을 엿보지 못하게 했고, 여기를 근본으로 삼아 수년간 나라를 지탱했으며 동서로 군수를 보냄에 있어서 한번도 부족하거나 끊어지지 않았으니 모두가 공(公)의 힘이었다.'

권율은 그 뒤 전라도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북상하여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전공(戰功)을 세우고 서울 탈환전에 앞장섰으며, 조선 관군 총사령관인 도원수가 되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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