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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9.삼도수군통제사 ⑵

대모달 |2011.08.13 04:47
조회 153 |추천 0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무모한 공격보다 방어에 주력하다.

그런 명령을 받은 이순신 장군은 휘하 장수들에게 소집명령을 내리고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에게도 통보하여 5월 7일 또다시 출전에 나섰다. 그날은 바로 1년 전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감격의 첫 승리를 거두었던 날이기도 했다.

그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전력을 증강해온 보람이 있어서 그때 이순신이 거느린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함대의 규모는 전투선 42척, 척후선 52척에 이르렀다. 또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함대의 규모도 전투선 54척, 척후선 52척으로 합하면 202척의 당당한 대함대를 이루었다. 또한 병력을 보면 전함 1척당 평균 100명의 군사가 탄다고 계산할 때 2만여명에 이르렀다.

남해 미조항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5월 8일에는 사량도 앞바다를 지나 9일에는 걸망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은 이때에도 겨우 2척의 군선으로 합류했다. 10일 견내량까지 진출하여 전투태세를 점검하고 있는데 조정에서는 명나라 장수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지시를 받아서 작전을 수행하라는 달갑지 않은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은 장계를 통해 그때까지 생각하고 있던 바, 즉 부산 재공격의 위험성, 수륙 합동작전의 불가피성, 수군 증강의 필요성 등을 이렇게 밝혔다.

'.....견내량에 이르러 적의 형세를 탐망해 본 바 웅천의 적은 여전히 웅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나가려면 웅천이 길목이 되는 까닭에 부산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적군이 앞뒤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군만으로는 끌어낼 길이 없으므로 부득이 육군과 합공한 뒤 수륙에서 섬멸해야 하겠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충청도 수군을 보내 하늘에 닿는 치욕을 씻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적군의 형세는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무려 800여척의 왜선이 부산과 김해로부터 웅천, 제포, 안골포, 영등포 등으로 이동했고, 부산에서 거제까지 오고가는 배들이 늘 줄을 잇다시피'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열세의 전력으로 무모한 작전을 감행할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이순신은 무모한 단독작전을 피하고 적정을 살피며 방어에만 주력했다. 충청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과 합세한 것은 6월 1일, 이후 계속해서 소규모 추격전과 탐색전만 지속될 뿐 이렇다 할 접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군선 8백여척으로 증강된 일본 수군에 대해 수륙합동작전이 아닌 단독작전을 펼쳐 적군의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한산도 두을포로 진영을 옮긴 것은 7월 14일이었다.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한산도로 본영을 옮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요로를 굳게 지키며 편히 있다가 피로한 적을 기다려 먼저 선봉을 깨뜨리면 비록 백만대군이라도 기운을 잃고 마음이 꺾여서 도망치기에 바쁠 것이며, 더구나 한산 일해는 작년에 적의 대군이 섬멸당한 곳이므로 이곳에 주둔하고 적의 동태를 기다려 동심협공하기로 결사 서약하였습니다.'

또한 이순신이 7월 16일자로 지평 현덕승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생각하건대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라, 만일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치고, 이로써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한산도로 본진을 옮기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증강된 적군을 수군의 힘만으로는 마음대로 쳐서 물리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합선단을 구성해도 다른 도의 수사들과 같은 직급으로서 뜻대로 통솔할 수 없는 지휘체계 문제도 있었다.

특히 경상우수가 원균은 공명심이 강한데다가 시기심까지 높아 연합작전에 오히려 장애가 될 때도 많았다. 여기에 엎친 데 덫친 격으로 진중에 전염병이 만연하여 사망자가 속출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충원과 훈련도 여의치 못했다.

◆ 최악의 패전(敗戰)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

이순신이 한산도로 본진을 옮기기 보름 전인 그해 6월 29일에 육지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가장 참담한 패전(敗戰)으로 기록된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가 있었다.

명나라에서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왔지만,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에서 패배하자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평양으로 철수한 채 다시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불쌍한 조선의 백성들과 벼승라치만 못살게 굴었다.

당시 백성들의 참상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는 피난민들이 서로 아이를 바꾸어서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이 멸망하면 자기네 나라도 위험할 것이 뻔했기에 마지못해 지원군은 보냈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에서 지게 되자 싸울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대신 화평을 통해 쌍방의 희생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조선은 제외한 채 일방적으로 일본과 강화회담(講和會談)을 벌어기 시작했다. 그것이 1593년 4월부터였다.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는 바로 이 강화회담이 벌어지고 있는 도중에 일어난 대결전(大決戰)이었다. 때는 1593년 음력 6월 19일, 장소는 진주성으로 돌아간다.

일본의 10만 대군이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아귀떼처럼 몰려온다는 소식에 성안은 긴장과 불안으로 술렁대고 있었다. 당시 진주성 안에는 6, 7만명의 인원이 있었지만 전투를 할 수 있는 정규병력은 3천여명에 불과했다. 싸우기 전에 겁부터 먹으면 그 싸움은 이미 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뒷날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행주대첩(幸州大捷)과 더불어 임진왜란(壬辰倭亂) 삼대첩(三大捷)으로 기록된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서 대승했던 용기와 기백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1592년 10월 6일부터 시작된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서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의 처절한 독전(督戰) 아래 진주성의 군(軍), 관(官), 민(民)이 협심(協心)하여 6일간의 맹렬한 사투(死鬪) 끝에 적군의 대공세를 격퇴시킨 바 있었지만, 이제는 해가 바뀌어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총공격에 밀려 서울을 거쳐 남해안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본국에서 내린 명령에 따라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진주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힘써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전쟁은 순전히 조선 백성들과 군사들의 몫이 되었다.

명군 총병 유정(劉綎)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진주성 침공계획을 힐책하고, 심유경(沈惟敬)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진주성 침공을 만류했지만 그것은 소귀에 경 읽기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조선 관군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의 인솔 아래 모두 의령에 모요 있었지만 적군의 기세가 너무나 흉맹(兇盟)하자 감히 맞서 싸울 전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명나라 군대가 수수방관하는 동안 아군 수뇌부는 진주성으로 들어가 지키자는 수성파(守城派)와 성을 비운 채 주변에서 교란시키며 공격하자는 공성파(空城派)로 갈렸다. 김명원, 권율과 곽재우 등 비교적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관군과 의병부대들이 대부분 진주성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이때 수성을 주장하던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여러 장수를 둘러보며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주는 호남과 순치지간(盾齒之間)이외다! 진주가 없이 어찌 호남을 지킬 수 있으리오! 성을 버리고 왜적(倭敵)을 피하여 왜적을 기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계책(計策) 중에서도 하책(下策)이라 할 것이오. 힘을 합치고 힘을 다해 왜적을 막는 것만이 상책(上策)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가니,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의병대장 고종후(高從厚), 강희열(姜希悅),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등이 잇달아 입성했다. 성에 들어가 보니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이 이미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겹겹이 포위한 뒤 사나운 기세로 쉴 새 없이 파상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수성군(守城軍)의 주장(主將)인 진주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은 병법(兵法)에 문외한이었고 겁쟁이에다가 책임의식도 없는 무능하고 용렬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결국 김천일이 전투를 총지휘하게 되었다.

진주성은 낙동강 지류 남강을 끼고 동쪽은 함안, 진해, 남쪽은 사천, 고성, 북쪽은 의령 삼가와 접하고, 서쪽은 단성, 곤양, 하동을 거쳐 호남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진주성은 굽이져 흐르는 남강가 절벽에 의지하고 있는 천험의 요새였지만 이같은 지리적 이점도 천시와 인재를 제대로 만나야 지킬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도 있듯이 유력한 아군이 힘을 합쳐 지키지 않고 성을 버린 데다 명나라 군사까지 방관하니 겹겹으로 포위된 진주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이었다.

김천일은 장수들로 하여금 구역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황진, 이종인, 장윤 등에게는 기동타격대 역할을 맡겼다.

성이 포위된 다음날인 6월 20일, 적군의 척후대가 성 가까이 나타나자 이잠(李潛)과 오유(吳流)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적병 10여명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오니 아군의 사기가 높아졌다. 다시 하룻밤이 지난 6월 21일에는 5만명에 이르는 적군이 성을 세겹으로 에워싸고 공격을 개시했다. 마침내 본격적인 공방전(攻防戰)이 시작된 것이었다.

콩 볶듯 터지는 조총 소리와 더불어 탄환이 비 오듯 날아왔다. 이에 맞서 아군도 쉴 새 없이 활을 쏘고 돌멩이를 던지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들에게는 끓는 물을 퍼붓는 등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머릿수에서 우세한 적군은 1진이 물러가면 2진이 공격하고, 2진이 물러가면 3진이 공격하는 차륜전법을 구사했지만 황진이나 고종후 같은 맹장(猛將)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번번이 적군의 침공을 물리쳤다.

7일째 되던 날에는 낮에 적군의 3회 공격을 격퇴시키고, 밤에는 적군의 4회 공격을 격퇴시키기도 했으니 악전고투(惡戰苦鬪)가 따로 없었다. 적군은 성의 동쪽과 서쪽에 다섯 군대나 높은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목책을 세우고 조총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이에 황진(黃進)이 재빨리 군사들을 독려하여 화전(火箭)으로 목책을 불태워 버리도록 했다.

적군은 또 커다란 관(棺) 모양의 궤짝을 만들어 여러 겹의 쇠가죽으로 겉을 싸고 수레에 실어 성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도 황진이 "오늘 내가 죽을 때와 장소를 찾았도다!"라고 소리치며 달려나가 기름을 붓고 횃불로 태워버렸다. 그러자 적군은 이번에는 성 밑을 파고 몰래 숨어들려고 했으나 최경회(崔慶會)의 군사들이 이것을 미리 발견하여 일본군 1천여명을 참살하였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사이에 어느덧 열흘이 지나갔다. 열배나 되는 일본의 대군을 맞아 열흘이나 버텼으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6월 28일은 진주성의 관군과 의병들에게 좌절과 죽음을 안겨주고 말았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暴雨)로 인해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고 말았다. 황진(黃進)과 김준민(金俊民)이 사력을 다해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이끄는 선봉부대를 앞세우고 무너진 성벽을 향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다.

황진은 성루에서 환도(環刀)를 높이 쳐들고 독전하다가 이마에 적병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칼끝은 여전히 적진을 향해 뻗어 있었다. 장윤(張潤)이 고함을 치며 달려나가 칼을 휘둘러 적병 수십명을 베어 넘기며 분전했지만, 그 역시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전사했다. 두 용장(勇將)을 잃은 진주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는 금세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튿날인 6월 29일이 진주성 최후의 날이었다. 적군은 진주성 동문 성벽 밑의 받침돌들을 뽑아내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종인(李宗仁)이 양손에 각각 장근(長斤)과 단도(短刀)를 들고 좌충우돌(左衝右突)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적군이 성 위와 아래로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자 진주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참으로 지난해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를 승리로 이끌고 순국한 김시민(金時敏)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간쓰레기였다.

최고 책임자가 도망치자 군사들도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황망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이종인(李宗仁), 이잠(李潛), 강희열(姜希悅) 등 10여명의 장수가 저마다 적병들을 닥치는 대로 참살하며 고군분투(孤軍奮鬪)를 펼치다가 차례로 전사했다. 이종인은 죽기 전에 적병의 머리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김해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는다!" 하고 소리치며 강물로 뛰어들었다.

열흘 동안 전투를 지휘한 김천일(金千鎰)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자 아들인 상건(上乾), 고종후(高從厚), 최경회(崔慶會) 등 남은 장수와 더불어 복향재배(復享再拜)하고 남강에 뛰어들어 미련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휘부가 이렇게 전멸하자 이번에는 적군의 살육(殺戮)이 뒤따랐다. 적병들은 성을 완전히 점령하자 성안을 샅샅이 뒤져 백성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심지어 돼지, 개, 닭 등 가축들까지도 남김없이 도륙해 버렸다.

성을 함락시키고 전투가 끝나자 적장들은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가 승전(勝戰)을 자축하는 술판을 벌였다. 그때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라는 일본 장수가 촉석루(矗石樓) 아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히야! 저기 저 바위에 서 있는 것이 조선 여자가 아닌가!"

여자라는 말에 왜장들이 난간으로 몰려가 누각 밑을 내려다보았다. 과연, 누각 아래 남강가 바위 위에 젊은 조선 미녀 하나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왜장들을 유혹하듯 촉석루를 쳐다보며 은은히 웃음 짓는 듯했다. 난데없는 여인의 자태에 홀린 왜장들이 하나같이 굶주린 늑대가 되어 침을 질질 흘렸지만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 선뜻 가까이 가려는 자가 없었다.

그때 한 왜장이 벌떡 일어나 호기를 부렸다.

"내가 가서 안고 오겠다! 술이 있으면 여자도 있어야지!"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라는 이 왜장은 누각을 내려가 강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여인이 서 있는 바위로 건너뛰었다. 그때, 그 여인이 로구스케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왜장을 껴안은 순간 그대로 깊고 푸른 남강으로 몸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 여인이 바로 당시 19세의 논개(論介)였다. 그녀는 전라도 장수 출신으로 진주의 관기(官妓)였으며, 최경회의 소실이라고 했다.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는 이같이 처절하고 참혹한 패배로 끝맺었지만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의 승리에 못지않게 조선 백성의 불굴의 투혼을 극명하게 보여준 민족사적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의기(義妓) 논개(論介)는 이 역사적 대사건인 제2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에 화룡점정(畵龍點睛)같은 빛나는 역할을 했다.

 

◆ 조선 수군 총사령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그해 8월 1일에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모두 총괄하는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린 것이다. 발령은 8월 1일자였으니 명령을 받은 것은 10월 9일이었다. 그때 이순신의 나이 49세였다.

신설된 통제사에 임명하면서 선조는 교지에 이렇게 썼다.

'.....그대는 오로지 일생고절(一生苦節)을 지켜 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되었도다. 남은 군사를 모아 전라도 및 경상도의 요로에서 강한 왜적(倭敵)을 쳐서 한산(閑山) 및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의 기이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힘써 일한 공로가 모든 영문(營門)에 뛰어나서 표창하고 승직합이 세 차례 승첩(勝捷)에 거듭 빛났도다.

돌이켜보건대 군사상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이른바 통솔할 사람이 없음인바 서로 각각 제 형편만 지킨다면 어찌 팔이 손가락을 놀리듯 할 수가 있으며, 또 서로 관섭(管攝)이 없으면 혹은 뒤늦게도 오고 혹은 앞서 도망치는 폐를 면치 못할 것이며, 그러다가 마침내 위급함을 만나면 조처할 방도가 없을 것이니 하물며 이제 적군의 형세가 쇠하지 아니하여 속이고 거짓됨이 갈수록 더해가는 것을 어찌하랴.

(왜적이) 붓간에서 창과 칼들을 거두어 겉으로는 철병할 뜻을 보이는 듯하면서 실은 군량을 바다로 운반하여 마음 속으로는 다시 일어날 꾀를 가진 듯한데, 거기 응하여 대책을 세우기란 지난번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므로 이에 그대를 기용하여 본직에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하노니 오오, 위엄이 사랑을 이겨야만 진실로 성공할 것이며, 공로는 제 뜻대로 해야만 이룰 수 있을 것이로다.

수사 이하로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는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며, 부하 중에서 둔한 자는 그대가 충효로써 책려(策勵)할지어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된 이순신은 지금까지 똑같은 계급이었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수사들을 지휘 감독하며 작전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출중한 장수였던 이억기(李億祺)와 정걸(丁傑) 등은 평소 이순신의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통솔력에 감복하던 바여서 충심으로 승진을 축하해주고 복종을 다짐했으나, 나이도 많았고 군에서도 선배였으며 시기심이 남달리 많았던 원균은 노골적으로 불만의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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