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노량 해역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
일본군은 철군을 서둘렀다. 명군도 더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기에 전쟁에 소극적인 입장이 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섰다고 여긴 명군은 일본군이 물러가고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강화협상(講和協商)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조선 관군은 이렇게 끝낼 수가 없었다. 지난 7년 동안의 전란으로 이 나라 온 강토가 쑥대밭이 되지 않았던가. 죄 없이 죽은 백성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단 한 놈의 왜적(倭敵)도 무사히 바다를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통제사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굳센 결의였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철수 소식을 들은 것은 11월 8일이었다. 그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자.
'도독부를 방문하여 위로연을 베풀고 어두워서 돌아왔다. 조금 있으니 도독이 만나자고 하므로 곧 나갔더니 "순천 예교에 적들이 초열흘 사이에 철군한다는 기별을 육지에서 통보해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버리자" 고 했다.'
11월 10일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은 출동하여 그 이튿날에 다시 왜교 성(倭橋城) 앞바다 유도로 진격했다. 13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함대 5백척 가운데 군선 10여척을 선발대로 출항시켰다.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군 장수 유정(劉艇)에게 뇌물을 바치고 밀약한 대로 일본군이 왜교 성을 넘겨주는 대신 명군은 일본군의 철수를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을 계산에 넣지 않은 반쪽짜리 합의에 불과했다.
일본군 선발함대 10여척은 바다로 나가기가 무섭게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에게 걸려 퇴각하고 말았다. 육로로 탈출할 수도 없었던 유키나가가 생각해 낸 계략이 유정에게도 써먹어 성공했던 뇌물작전이었다. 진린을 뇌물로 구워삶자는 것이었다.
이는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그대로 나온다. 11월 14일에 이순신은 이렇게 썼다.
'왜선 두 척이 강화하기 위해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통역관으로 하여금 왜선을 맞아오게 하고 조용히 붉은 기와 환도 등의 물건을 받아들였다. 저녁 8시쯤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일본군의 뇌물작전은 계속되었다. 그 이튿날에도 적선 두 척이 진린의 진영에 두세 차례 드나들었고, 또 그 다음날인 11월 16일에도 진린은 적군으로부터 말 한필과 창검 등을 뇌물로 받았다. 유키나가는 부하들을 시켜 이순신에게도 조총과 창검 등을 뇌물로 보냈으나 이순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적병들을 호통쳐서 쫓아버렸다.
뇌물이 통하지 않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에게 사자를 보내 이런 미친 소리까지 전했다.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 다른 곳에 진을 쳐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같은 곳에 진치고 있는가?"
아무리 답답하기로서니 조선 수군이 진 친 것까지 트집을 잡고 나서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이순신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우리 땅에서 진을 치는 것인데 우리 생각대로 하는 것이지 너희가 감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냐!"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은 진린은 그렇지 않아도 싸우기 싫은데 잘됐다면서 길을 터주자고 했으나 이순신이 허락할 리 없었다. 철천지원수 왜적(倭敵)을 단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굳은 결의였다.
진린은 이순신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남해에 가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남해에서 싸운다는 구실로 죄 없는 조선 백성들의 목을 베어 거짓된 전공(戰功)을 세우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런 한심하기 그지없는 속셈을 간파한 이순신이 말했다.
"남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왜적(倭敵)에게 잡혀간 조선 백성이지 왜적은 아니오!"
그러자 진린이 이렇게 억지소리를 했다.
"그러나 이미 적에게 붙었으니 그것도 적과 같지 않소? 내가 그곳에 가서 토벌하면 힘들이지 않고 수급(首級)을 많이 베어 얻을 수 있을 것이오."
이순신이 기가 막혀 진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국 황제가 적을 무찌르라고 명령한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라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이제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귀국 황제의 본의가 아닐 것이오."
그러자 무안해진 진린은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佩劍)을 빼어 들었다.
"이 칼은 우리 황제께서 내게 주신 것이오! 내 뜻을 거역하면 황명(皇命)을 거역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할 수도 있소."
칼을 뽑아 위협해도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한 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이다. 나는 대장의 몸으로서 결코 왜적을 그대로 살려 보낼 수는 없소!"
11월 14일, 유키나가가 강화협상을 상의한다는 구실로 연락선 한 척의 통과를 요청하자 진린은 이를 허락했다. 이순신이 이는 구원병을 청하기 위한 유키나가의 간계라면서 말렸으나 진린은 듣지 않았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11월 15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이순신이 진린을 찾아가 항의했으나 진린은 자신의 지휘권을 내세워 이를 묵살했다. 그리고 그날도, 그 다음날도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겼다.
이순신으로서는 최후의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구원 요청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있던 소 요시토모[宗義智], 고성(固城)의 타찌바나 토우도라[立花統虎],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게[寺澤正成] 등이 왜교 성에 고립된 유키나가를 구출하려고 대규모 함대를 결성했다. 그 규모는 무려 군선 500여척이나 되었다.
이순신이 총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왜교 성 바로 앞 장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식한 진린이 오판이 빚어낸 결과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만일 일본군의 구원부대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오면 좁은 장도 바다에서 양쪽으로 협공당할 위험이 컸던 것이다.
이순신은 기다리고 있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기보다는 나가서 구원하러 오는 적군을 무찌르기로 결심했다.
이에 대한 기록이 선조실록(宣祖實錄) 이듬해 2월 2일자에 보인다.
'...이순신은 이를 듣지 않고 먼저 나가 싸울 것을 결심하고 나팔을 불고 배를 출항시켰다. 진린도 할 수 없이 이순신의 뒤를 따라왔으나 명나라 선체는 작은데다가 후미에 있었기 때문에 기세만 돋울 뿐이었다.'
이는 이순신의 거듭된 출동 요구를 진린이 거부하자 이순신이 단독 출전을 감행했고, 결국 진린도 마지못해 그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이다.
진린은 자신의 지휘권에 거역하는 이순신에게 분노했으나, 또한 이순신의 조선 수군만 출전하고 자신은 구경만 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두려웠다. 더군다나 명나라 수군의 실력으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단독으로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관음포에 떨어진 큰 별
1598년 11월 18일 밤,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장도를 떠나 적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해협으로 진격했다. 60여척의 조선 군선의 뒤를 2백여척의 명나라 군선들이 뒤따랐다. 비록 전함 수는 명나라 수군이 많았지만 모두 조선의 판옥선보다 선체도 작고 전투력도 떨어졌다. 막강한 조선의 전함 판옥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진린을 비롯한 몇몇 명나라 장수가 조선 수군 판옥선에 타도 전투에 임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11월 19일 오전 2시경,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은 노량 바다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은 남해 관음포에, 명나라 수군은 하동 쪽 죽도에 진을 쳤다.
결전에 앞서 이순신은 갑판에 올라가 손을 씻고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두 손 모아 하늘에 간절히 기도했다.
"이 원수만 없앤다면 죽어도 한이 없으니 도와주소서!"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 순간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바다 속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고 여해행록(汝諧行錄)은 전한다.
곧 이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 수군 5백여척의 군선이 순천 예교를 향해 사천 쪽에서 노량해협을 막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조선의 군선들을 보자 조총을 쏘았고, 아군은 즉각 응전했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바다에서 불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이를 신호로 전고(戰鼓) 치는 소리가 급하게 울리고 우뢰와 같은 포성(砲聲)이 어두운 밤하늘과 바다를 진동했다.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이 잇달아 발사되고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갔다. 조선 수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은 당황하여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면서도 도망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온갖 발악을 다했다.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적선이 깨지고 불덩이가 날아가자 적선에 불이 붙었다. 적병들이 내지르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이 전투도 불세출의 명장이자 탁월한 전략가인 이순신의 치밀한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겨울철 북서풍을 이용하여 맹렬한 화공(火攻)을 퍼부었다. 적선들은 한 척, 두 척, 불타고 깨지면서 격침되었다. 남은 적선들은 허둥지둥 관음포 좁은 물길로 달아났다.
마침내 동쪽 하늘이 허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전함이 치열한 접근전(接近戰)에서 불타고 부서졌다. 그러나 적군은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에 비해 수적으로 거의 2배나 되는 5백여척의 대함대였다. 관음포에서 도망칠 물길이 막히자 적군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진린의 대장선이 적선들에게 포위되자 선두에 섰던 이순신의 군선이 포위망을 뚫고 진린을 구원하면서 적선을 한 척, 한 척 계속 격침시켰다.
손수 북채를 들고 전고(戰鼓)를 치고 독전기(督戰旗)를 흔들면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선 가운데 한 아다케[安宅船]에서 적장 세 명이 타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대장선이었다.
이순신은 그 아다케[安宅船]의 지휘소를 향해 궁시(弓矢)를 겨누어 쏘았는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부관으로 출전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이순신의 화살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그러자 그때 진린의 대장선을 포위 공격하던 적선들이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탄 아다케[安宅船]를 구출하기 위해 이쪽으로 몰려왔다. 전투는 더욱 격렬하게 이어지는데, 어느 순간 홀연히 날아온 탄환 한 발이 이순신의 왼쪽 겨드랑이를 관통하고 심장 가까이에 박혔다.
치명상을 당한 이순신이 갑판에 쓰러지자 아들 회와 조카 완이 놀라서 달려왔다. 이순신이 아들과 조카에게 마지막으로 일렀다.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남기지 말라."
이것이 이순신의 유언이었다.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회가 탄식하자 완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온 군중(軍中)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 시신을 온전히 보전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참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아들 회와 조카 완은 터지는 울음을 억지로 참고 이순신의 시신을 선실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지휘소로 나와 전고(戰鼓)를 치면서 이순신 대신 전투를 지휘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적군은 물론 아군도 이순신의 전사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날 정오 무렵이 되자 역사적인 노량해전(露梁海戰)도 마무리가 되었다. 관음포 해역으로 들어오던 일본 수군 3백여척의 전함은 조선 수군의 기습공격에 2백여척의 군선이 불태워지거나 격침되었고, 3만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남긴 채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남은 군선 50여척을 거느리고 사천 쪽으로 달아났다. 한편, 순천 예교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노량해전(露梁海戰)이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는 틈을 타 자신의 직할 함대를 이끌고 멀리 남해를 우회, 칠천량을 거쳐 부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대승(大勝)을 거둔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의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군선 10여척이 파손되었고 가리포첨사(加利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殊)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그리고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을 비롯한 2백여명의 전사자와 사상자가 나왔다.
전투 중에 위기에 빠진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순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이순신의 군선으로 넘어오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이순신의 조카 완으로부터 그가 전사했다는 말을 듣자 갑판 위를 뒹굴며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진린은 조선 국왕에게 전투 결과를 보고하는 공문을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전하(殿下), 애통하여 붓을 들기가 어렵고 떨어지는 눈물로 먹을 갈아 올리나이다.
전하의 충성된 신하 이순신이 지난 전투에서 전사하였나이다. 소장도 이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섰던 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노량의 바다를 덮어 순천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려 흉폭한 칼을 앞세우고 도전하여 왔나이다.
이에 이순신이 자신이 대장됨을 잊고 용감히 앞서 나가 싸우매 도적들의 사나운 칼을 두려워함이 없었나이다. 마침내 수백 척의 적함들을 격침하고 수만의 적들이 고기밥이 되었으나 저 간악한 고니시는 싸움이 치열한 틈을 타 제 나라로 도망쳤으니 이처럼 비분한 일이 없다할 것이나. 전하의 충성된 신하 이순신이 동틀 무렵하여 어지러운 전투 중에 적의 패잔병이 허투루 쏜 총탄에 맞으니 이런 비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 비보를 듣고 급히 이순신을 소장의 배에 옮겨 독의를 다그치며 이순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애통하다 아니할 것이겠습니까? 마침내 이순신이 그 숨을 거두니 이를 지켜본 소장과 휘하의 모든 장수들이 애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이순신이 이르기를 ‘싸움이 끝나기까지는 나의 죽음을 아군에 이르지 말라’ 하였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짐짓 이를 감추어 큰 승리를 거두기까지 적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소장은 이미 지난 순천 전투에서 이순신이 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머나먼 낯선 바다에서 도적들의 횟감이 됐을 것입니다. 소장이 약관의 나이에 임관하여 한평생을 바다에서 살았으나 천국에서도 소방에서도 이순신과 같은 충신을 보지 못하였고 이순신과 같은 맹장(猛將)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마침내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소장의 목숨도 온전치 못하였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소장의 목숨을 건져주었으나 소장은 이순신이 도적들의 흉탄에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일찌기 소장이 이순신의 용맹하고 충성됨을 장계하매 상국(上國)의 천자(天子)께서도 이를 아름답게 여기시고 탐내시어 마침내 상국의 수사 제독을 제수하셨으나 이제 순신을 잃으니 이를 어찌 전하의 애통함으로 그친다 하겠습니까?
일찌기 상국(上國)의 천자(天子)께오서 왜국의 도적들이 전하(殿下)의 나라를 침노하여 마침내 상국을 향하여 그 창끝을 돌렸기로 진노하시기를 지옥의 불길처럼 하시고 천군(天軍)을 내려 도적들을 소탕하려 하셨으나 이에 도적들이 간교한 꾀를 부려 저희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물러나는 듯 하다가 다시 천자를 능멸하고 재차 도전해오니, 이에 천자께서 소장을 불러 이르시기를 내가 마침내 저 도적들을 내 위엄 앞에 쓸어버릴 것이니 너는 내 명을 받으라 하시기로 소장이 하늘의 뜻을 받잡고 남도에 이르러 이순신과 대면하였나이다.
그러나, 그의 지략은 하늘이 내렸으며 그의 용맹은 조자룡이 두려워할만 하였나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소장도 스스로 옷깃을 여미고 이순신을 스승으로 여겼나이다. 선천에 이미 이와 같은 장수가 없었으니 감히 비교하자면 남송(南宋)의 악비가 소방에 환생한듯 하였나이다. 소장뿐만 아니라 제가 휘하에 거느린 모든 부장과 장교들, 그리고 가장 어리석은 병졸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을 존경하고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 어찌 전하의 홍복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이순신이 옛 사람이 되었으니 애통한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을 잃고 전하의 어안(御顔)을 어찌 볼 것이며 또한 상국으로 돌아가 천자의 용안을 어찌 보겠나이까? "그대는 이순신과 함께 전장에 나가더니 어찌 그대는 살아 돌아왔으나 이순신은 어디있는가?" 하시면 소장은 무엇이라 천자 앞에 말할 것입니까?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고 무릎이 떨려 일어설 수가 없나이다.
이제 소장이 이순신을 잃으매 이 참담함이 마치 현덕(玄德)이 공명(孔明)을 잃음 같고 어룡이 여의주를 잃음과 같사옵니다.
이에 삼가 전하께 아뢰오니 전하의 충성된 신하 이순신이 치열한 전투끝에 300척이 넘는 적선을 깨뜨리고 3만이 넘는 도적들을 어룡(魚龍)의 밥으로 주었으나 마침내 흉적의 탄환에 목숨을 잃으니, 하늘이 분하여 울고 산천초목이 애통하여 떨었나이다.
마침내 소장이 이순신의 몸을 염하여 천자께서 내리신 비단으로 덮어 통제영에 이르니 백성 중에 놀라 까무러치지 않는 자가 없고 엎어져 울부짖지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처럼 놀랍고 슬픈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들의 모습이 마치 전란 중에 부모를 도적의 칼에 잃고 길바닥에 나앉아 우는 어린 아이들과 같았으니 소장의 장졸 중에도 눈물을 감출 수 있는 자가 없었나이다. 실로 애통하고 애통하며 애통하다 아니할 수 없었나이다.
소장이 감히 전하께 주청하오니 7 년에 걸친 참담 한 전란 중에 섬나라의 도적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떤 것은 오직 전하의 충성된 신하, 이순신이었으니 이에 그의 공로를 높이시어 그를 뒤늦게나마 승상으로 삼으시고 이순신의 죽음으로 애통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국상을 허락하시기를 비나이다. 전하께옵서 이같이 하시면 이나라의 백성으로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답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옵니다.
다시금 북받치는 애통함에 붓을 들 수 없음을 용서하소서. 일찍이 이순신이 소장의 목숨을 구하였으나 소장은 죽음이 이순신을 데려가는 것을 막지못하였나이다. 전하, 소장을 용서하시옵소서.'
어쨌든 노량해전(露梁海戰)은 7년간 끌어온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마지막 쐐기를 박은 전투로서 아군이 완승을 거둔 싸움이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적군이 철군하려 할 때 그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 승전(勝戰)이었다.
그런데 타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일본 타큐쇼쿠대학[拓殖大學] 교수는 최근 한,일 공동역사연구회 회의에서 "한국 학계는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해 신화화해서 그가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당시 일본 수군과의 해상전투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타카모리 교수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최후의 전투인 1598년 11월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이순신이 전사했으므로 분명 조선 수군의 패배이며 일본 수군이 승리한 전투로 보아야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테라자와 마사시게[寺澤正成] 등 당시 일본의 주요 장수들은 한 사람도 전사하지 않았다." 라고 희한한 소리를 해대면서 "중세 전쟁에서는 아군의 병력 절반이 전멸되었더라도 적군의 지휘관 한 사람만 죽이면 그 전투는 곧 아군의 승리" 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물론 타카모리 교수의 주장은 비상식적인 발언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유치한 논리에 불과하다. 1805년 10월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을 두고 영국 해군 사령관 넬슨(Horatio Nelson)이 전사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에스파냐 연합 해군의 승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에스파냐 연합 해군은 전함 22척을 잃고 전사자 8천여명에 이르는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트라팔가해전(Trafalgar 海戰)은 당연히 영국 해군의 승전(勝戰)이다.
1598년 11월 관음포(觀音浦)에서 벌어졌던 노량해전(露梁海戰)도 마찬가지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전함 2백여척이 격침되고 전사자가 3만여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고 해서 노량해전을 조선 수군의 패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 수군의 완패였고,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순신은 전사하는 순간까지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7년 전쟁 동안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으로서 '23戰 23勝 0敗'의 전공(戰功)을 세우고 남해안 바다를 지키며 조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낸 민족의 성웅(聖雄)이며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이자 충신이었던 이순신 장군.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도 적군을 여지없이 격파하고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이제 모두 끝냈으니 더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우리 민족의 곁을 떠났다.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국한 이순신의 영구(靈柩)는 우선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현재의 충렬사(忠烈祠) 자리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곧 본진이 있던 고금도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되었다. 순국 이듬해인 1599년 2월 11일 사이에 아산에 당도한 영구는 금성산 밑에 장사지냈다가, 16년 뒤 현재의 자리인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어라산 기슭으로 천장했다.
1604년 이순신에게는 선무1등공신에 좌의정 겸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증되었고, 1643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다시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인 유적인 현충사(顯忠祠)는 그가 순국한 지 108년 뒤인 1706년에 건립되어 그 이듬해 숙종(肅宗)의 친필 현판이 사액되었다. 그 뒤 200여년간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헐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1932년 충무공 유적 보존 위원회가 앞장서 사당을 재건하고 영정을 봉안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해마다 4월 28일 장군의 탄신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56년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 있는 장군의 묘소가 사적 제112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67년에는 현충사도 정화, 단장하고 성역화되어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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