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1.난세에 태어난 혁명가의 어린 시절 ⑶

대모달 |2011.08.27 21:09
조회 50 |추천 0

★ 망국의 슬픔

 

조선의 서해와 인접한 철산군(鐵山郡) 세리면(洗里面)은 당시 아주 외지고 낙후된 지역으로 신의주(新義州)에서 관할했다. 이곳의 농민들은 주로 벼·옥수수·콩 등을 재배하며 생계를 이었고, 농사일 외에도 틈틈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양세봉의 부친은 현재 이름이 알려지고 있지 않은데 온화한 사람으로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조상은 본래 양민이었지만 그가 어렸을 때 이미 땅을모두 잃었다. 한때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금을 캐는 일도 했지만, 고생만 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뒤 생계를 위해 어부가 되었다.

 

일터인 바다는 해저가 함몰되어 형성된 곳으로 깊이가 20미터~50미터이고 조수 차는 5미터 내외며 물 투명도는10미터 이하로 탁한 편이다. 유속은 아주 빨라 시속이 6해리~7해리에 달하고, 수온은 여름에 25도씨 안팎이지만 겨울에는 얼어붙는다. 연안에는 단도(緞島)·탄도(炭島)·신미도(身彌島)·대화도(大和島)·신도(薪島) 등 작은 섬들이 많다. 맑은 날에는 중국 고산현의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보인다. 아버지는 일찍이 양세봉에게 “중국 땅은 여기서 아주 가깝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양세봉의 어머니 김아개는 자상한 농촌 아낙이다. 그녀는 모두 5남매를 낳았는데 양세봉이 큰아들이다. 1899년에 둘째아들 양원봉(梁元奉)을 낳았고 1903년에 셋째아들 양시봉(梁時奉), 1907년에 큰딸 양봉녀(梁奉女), 1911년에 넷째아들 양정봉(梁貞奉)을 낳았다. 식솔이 많은데다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적잖은 고생을 하였다.

 

이후 양세봉의 아버지는 어부 생활을 접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양세봉은 여덟아홉살 나던 해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거들면서 힘겹게 살았다.

 

양세봉의 아버지는 다른 많은 조선의 백성처럼 애국심이 강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 국왕을 위협해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애국지사들을 살해하며 나라를 침략한 것에 몹시 분노하였다. 명절이나 농한기에 그는 늘 자식들과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놓고 조선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평소에는 과묵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침이 없었다.

 

“4천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은 중국·이집트·인도와 더불어 유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단군왕검이 나라를 창건한후 하늘에 제사를 지내 은혜에 보답하는 예의를 갖추고, 벌레와 짐승을 물리쳐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또한 주변의 아홉 족속을 굴복시켜 나라를평안하게 하는 한편 백성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옷을 입고 농사를 지을 줄 알게 되었다.

 

고대의 중국은 우리 나라를 군자의 나라요, 무예를 숭상하는 민족이라 불렀다. 나라가 번성할 때에는 백만이나 되는 강한 군대가 있어서 밖으로는 이민족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나라를 안정시켰다. 야심이 많은 왜놈들은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 침략을 일삼았다.

 

3백년 전, 이순신 장군이 백만 건아들을 이끌고 왜놈들과 혈전을 벌인 일도 있다. 이때 육군 총대장인 도원수 권율은 이웃인 중국 명나라의 장군들인 송응창·양호·진린·이여송과 연합하여 왜놈들과 8년간 혈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그들을 물리쳤다. 지금 왜놈들은 그때처럼 또 다시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을 강요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정의 간신인 이완용과 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 등 다섯 매국노들은 일본과 결탁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도록 황제를 강압해 우리의 모든 권리를 넘겨주었다. 그뿐 아니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면서 강제로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써 우리 정부는 그야말로 허수아비가 되었다. 일본은 이미 수도 서울의 군대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든 군대를 강제로 다 해산시켰다.

 

하지만 해산당한 많은 군인들이 의병항쟁에 참가하고 있다. 함경남도에 있는 홍범도는 이미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있는데, 여기에도 빨리 와 왜놈들을 물리쳤으면 좋겠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직에 앉아 우리 백성을 기만하고 나라를 망치는 일만 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조선인들은 하나로 뭉쳐 침략자 왜놈들을 물리치는 데 힘써야 한다.

 

아버지는 또 자식들에게 비록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임금님을 잊어서는 아니 되며, 비록 가난하더라도 나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와 더불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들과 의리를 지키고 난관에 부딪쳐도 굴하지 않으며 싸움에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옛 어른들이 가르치는 다섯 가지 원칙을 명심해 지켜야 한다.”

 

양세봉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 아버지는 그를 공부시키고 싶었지만 집안이 하도 가난하여 그럴 수가 없었다. 1906년 봄에 아버지는 우연히 마을의 한 서당에서 문지기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조그만 선물을 들고 훈장을 찾아가 양세봉이 밤에는 서당에서 자면서 야경하고 낮에는 글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훈장은 키가 크고 성실하며 정직해 보이는 양세봉을 보고는 쉽게 동의하였다.

 

서당에서는 한문을 가르쳤는데 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공부했다. 벽에는 공자와 맹자의 초상이 걸려 있었는데, 아이들은 매일 수업 전에 이들 성인의 초상에 절을 하고 난 뒤에야 제자리에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훈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이지만 나이도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미 몇년을 배운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들어온 아이도 있었다. 서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은 흑판에 석필로 글 쓰는 연습을 했고, 오래 배운 아이들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이용해 붓으로 종이에 글을 썼다. 나이 많은 훈장은 아주 엄격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손바닥을 때리거나 무릎을 꿇게 했다. 양세봉은 다른 신입생들과 함께『천자문(千字文)』을 배우고, 또『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다. 그는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칠세라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저녁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부뚜막에 올라앉아 어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운 시문을 웅얼웅얼 암송하였다. 암기력이 좋아서 어떤 때는 오래 서당 생활을 한 학생들이 배우는『맹자』,『논어』,『시경(詩經)』,『예경(禮經)』,『역경(易經)』,『춘추(春秋)』도 가져다가 읽고 외웠다. 물론 아직 이러한 책들의 강의를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용과 의미는 알지 못하고 그저 읽고 외우는 정도였다. 또 아주 부지런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 마당을 깨끗이 쓸고 정리해 놓아 훈장은 매우 흡족해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조선의 청년 안중근이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였다. 이 소식은 금세 조선 전역에 퍼졌다. 산간 벽촌의 서당 훈장 역시 안중근의 살신성인 정신을 학생들에게 전하면서 그를 귀감으로 삼으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젊은 청년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노래 한 곡을 가르치게 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안중근이여, 이등박문을 살해하고 살신성인하였으니 가슴속 망국의 한을 풀었도다! 세상 사람들 모두 그의 숭고한 넋에 탄복하노라. 청사에 이름 남겨 영원히 기억될 것이니 어느 누가 그의 귀를 따르지 않으랴!’

 

훈장이 들려준 안중근 이야기는 학생들을 감동시켰다. 양세봉은 특히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에 동생 안정근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을 잊지 못했다.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

 

그는 이 이야기를 부모와 친구들에게 들려주고 노래도 가르쳐 주었다.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일본의 강압 속에 경술병탄조약(庚戌倂呑條約)이 체결된 것이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조선인들은 마치 부모라도 죽은 듯이 가슴을 치며 분한 마음을 참지 못했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전국이 통곡 소리로 들끓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민족의 호소는 조선 전역은 물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제로 점령했고,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라의 변고는 외지고 작은 마을인 세리면까지도 술렁이게 했다.

 

다급한 종소리에 마을 학생들은 모두 서당으로 모였다. 이 날은 의외로 공자에게 먼저 절을 올리는 예도 차리지 않았다. 학생들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훈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에게 아주 불행한 소식을 전해야겠다. 오늘 우리 대한제국이 망했다. 이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었다. 독사보다 더 악독한 왜놈들의 음모에 빠져 대한제국의 5천년 역사가 완전히 끝나 버렸다. 단군의 후예인 3천만 우리 백성이 왜놈들의 노예가 되어 말이나 소와 다름없는 핍박을 받아야 한다.

 

일전에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간 폴란드의 귀족과 평민들의 아이들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나갔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열차를 가로막고 함께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열차가 떠나지 못하도록 매달리거나 바퀴 앞에 드러누웠지만 수송병들은 그들을 채찍질하고 발길로 차서 철로 밖으로 내몰았다. 열차가 떠날 때 울부짖던 부모와 아이들의 비참함은 그 무엇으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이라고는 시커먼 빵뿐이었다. 병든 아이는 황량한 벌판에 내버려졌고, 그렇게 죽은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손에 빵조각을 움켜쥔 채 눈감지 못하고 숨진 아이도 있었다. 이것이 나라를 잃은 비참함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그 울음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울리는 듯한데 오늘 우리 나라가 폴란드와 똑같은 지경이 되었다.

 

아, 오직 슬플 뿐이다. 나라를 잃은 원인은 알지만 나라를 구할 방법은 막막하구나. 너희들이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오늘의 이 치욕을 영원히 잊지 말고 가슴속에 담아 두었다가 더 자라면 반드시 의병이 되어 태극기의 깃발 아래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훈장은 연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일 여기를 떠난다. 서당도 문을 닫게 될 터이니 내일부터는 오지 않아도 된다. 기억해 두어라. 8월 29일, 이 날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날이다. 이 날을절대 잊지 말거라!”

 

학생들은 모두 통곡하였다. 양세봉의 가슴속도 비통함으로 가득 찼다. 

 

그날 자녁, 양세봉의 아버지는 짐을 꾸리는 훈장을 도왔다. 훈장은 그런 양세봉의 아버지에게 당부를 했다.

 

“세봉이는 장래가 기대되는 똑똑한 아이입니다. 하지만 평생 농사를 지을지언정 왜놈을 위해 일하게는 하지 마시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아버지는 양세봉에게 가르침을 준 훈장에게 절을 하도록 했다. 훈장은 장지연(張志淵)의『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와 신채호(申采浩)의『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두 권의 책을 기념으로 남겨 주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런 목소리로 자신은 평양의 태극서관(太極書館)으로 가서 신민회(新民會)를 찾으려 한다고 알려 주었다.

 

서당에서 공부하는 5년 동안 양세봉은 민족의식을 키웠고 애국사상을 전수받았다. 또 서당에서 한자를 공부한 덕분에 한글이나 한문으로 된 책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한글을 언문이라 부르며 천하게 여겼다. 계몽운동가들의 노력으로 국어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정규 학교에서만 사용될 뿐이었다.

 

한문을 배운 양세봉으로서는 아무래도 한글이 조금 미숙했고, 이후 몇해 동안 농사만 짓느라 한자도 많이 잊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문맹이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훗날 그가 세운 전공과 업적들을 보노라면 그가 결코 문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