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독이다 3
(그해 1999년 여름)김포의 폐 골프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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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알았시다'
'뭐하나 빠트리지말고 다실어라 니새끼도 이걸로 연습할거니까'
참~나
이건 기가막히고 코가막히고..
(이걸로 내아들이 연습한다....)
지금은 담배를 끊었지만 이내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엣다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실제로 그땐 내가 뭘 어찌해야?할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알수도 없을 뿐이고...
난그저 답답할뿐이고,,,
머 그랫습니다.
에라 난 모르겠다가 제일 정확한 표현같습니다.
그때 또 한마디 기억나는 형님의말씀!
'야 그래도 이런걸 버리지 않고 다 주셔서 진짜 감사하다 그렇치않냐?'
아! 물론 원론적이야 고맙죠.
그러나 만일 우리 형제가 필요치 않았다면 다 돈주고 버려야할 물건 아닌가요?
다 난지도 쓰레기장으로 가야할 폐품들입니다.
다소 나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이겠습니다만 ...
고맙긴 서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돕고사는거죠.
진짜 고마운건 한쪽이 몰라야하는겁니다.
주는쪽도 몰라야하지만 받는쪽도 모르는 관계...
이개념이 잘못 전달되지나 않을런지 그게 또 걱정입니다.
각설하고
다시 k보육원(계룡학사)으로 트럭 타이어가 펑크날정도로 잔뜩 실고서 내려갑니다.
이양반 날도 더운데 콜라 한병 안사주는 짠돌입니다.
^&^
장면#3
(보육원사무실)
단장/형님 '인원 선발은 어떻게할까요?'
원장 /삼촌' 자네알아서 하시게...'
부단장 /나( 난 대꾸할 힘도 없다 그냥 목이타 물만 먹고있다)
형님 /'우선 양부모 없는 아이들부터 합시다'
원장/'그리하게'
그런데 50년대 60년대 전쟁고아들처럼 양친모두 없는경우는 드물었습니다.
70년대이후 80년대 90년대는 교통사고나 부모의 이혼에의한 가정 해체에 따른 가족 해체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혹시라도 어느정도 키워 놓으면 부모가 나타나 데려갈까하는 우려엿습니다.
양친 모두 없는 아이가 달랑 3~4명
그렇다고 200명이나되는 모든 원생을 단원으로 뽑을수도 없고...
그래서 할수없이 ...
입소한지 5년이상되는 아이들중에서 골프하겠다는 원생을 자발적으로 참여키로합니다.
(실제 원장이신 외삼촌의 설명으로는 1~2년안에 데려가지않으면 거의 다시 합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골프하고픈사람 손들엇!'
했더니..
나요 나요..
남자아이들 30명 여자아이들 10명
도합40여명이 지원합니다
1999년 8월초부터인가요...
아침마다 구보합니다.
산을 올라갑니다.
(앞산이 계룡산인지?뒷산이 개태산인지?뭔ㄴ지...충청도 골짜기 논산면 연산읍의 제1팀소재지)
이게 산악훈련하는건지 아님 육상부 인지...
(보육원1팀 계룡학사팈 에서만 이미 2009년 기준으로 4명이 배출됩니다.정회원 김연섭프로 포함..
다들 티칭프로로 골프코스 관리직으로 어엿한 직업인으로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있죠)
다시1997 년으로 돌아가서 ....
1997년 초
#장면...(가정법원 앞)
'당신 힘들면 세은이는 내가 키울수있어'
(속 마음은 그렇게 했으면 하는데도 말은 달리 나옵니다)
'아 이사람아 내가 애들은 잘 키울수있을것 같아 맘 놓고 갈라 설수있다고 햇쟎아!'
'그거야 당신 집안에서 손자 하나는 벌벌 떨지만 세은이는 찬밥아냐!'
'누가 이사람아 찬밥을 만들어 내딸을.. 걱정마!'
'당신 세은이 홀대하면 가만 안둘거야!'
' 걱정 일랑 마소... 어차피 여자가 혼자면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텐데...
아이가 달려있는거하고 아닌것하고 차이가 있을것아냐?'
(제법 맘에 없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이지...정말 가만 안 둘거야!'
'...'
아내와 이혼할때 제일 우려된 사항이 아이들의 할아버지신 나의 아버님 병환이 문제였다.
뇌졸증으로 오른쪽 팔이 마비되시고 실어증까지 겹쳐 누워계셔야만 하는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유독 손자라고 늘 곁에 두고 이뻐 하셨던지라 ...
어눌하신 말투로
'버버..붐아'하며 손자의 이름을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신다.
가장 안정을 취해야 하실상태인데...
병세가 악화될건 불을 보듯 뻔하다.
안되겠다 싶어
큰여동생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좀 길러줘야겠다 미안하다'
' 알았어요 빨리 오빠나 재기하세요'
그렇게 딸이 초1, 아들이 초2
무려 두명을 안기고 만다.
다시1999 년 여름...
초등학교 3학년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다.
형님의 보육원꿈나무 골프단 에 아이둘을 데리고 입소하려고 여동생과상의합니다.
큰여동생' 작은오빠? 골프때문에 가는거예요 ?'
나 '아 ~ 뭐`~꼭 그런건 아니지만 ... 내가 널 볼 낯이 없구나!'
'내가 큰고모 노릇 한번 못하겠어요.운동이 목적아니면 계속 내가 키우게요'
'야 근데 사실 둘 다야'
사실이 그랳다
여동생 짐을 덜어줌과동시에 운동을 그것도 골프라는...
내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여동생이 말한다.
'작은오빠 나도 골프에 한이 좀있는데...'
'뭔데..'
'만일 내 짐을 덜기위해 가는건 난 반대하고싶어.. 정히 골프하러가는게 목적이라면 작은오빠가 꼭 옆에서 보호하고 지켜줘야해? 나도 큰오빠 때문에 내딸 주현이가 죽도 밥도 안됐어 그래서그래 '
' 알았어 걱정마 내가 누구냐!!'
'하긴 작은오빠라면 괜챦겠다.아들 일 이라면 그 누구도 직접 개입을 불사할것이니까...'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아 그럼 걱정마 내 아들일인데 내가 옆에 있지 않으면 누가 옆에 있겠냐?'
이렇게해서 둘 다 데리고 내 손으로 보육원이라는곳을 입소 시킵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 못난 부모의손에 의해 ....
말이나 글이나 감정이 없어야 하거늘 ...
내가 무능하여 생긴 일임에도...
늘 이대목에서는 격해집니다.
그래서 고마워야 할 형님이 어떤때는 이유없이 미워지는겁니다.
나의 이기적인 사고를 여실히 나타내는것입니다.
왜? 보육원 꿈나무인지... 고통나무인지 ...그런 골프단을 만들었냐고 항변하고 싶은것입니다. 안 만들었으면 이러지는 않았을거 아니냐?
아니 어차피 거국적인 차원에서 큰 사명을 갖고 만들었다해도 나에게 알리지말고 내아들을 골프에 입문시키지 않았으면 적어도 나하고 적대적 입장은 아니였을거 아니냐는겁니다.
형님의 발상에의해 모든게 시작했지만 일의추진 과정에있어서는... 특히 내아들의 골프입문에는 다소 책임져야할 공범?의입장이라는게 다소 억측스런? 내 주장입니다.
아무리 형님이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지만 ...
그건 그거고..
나는 나대로 멀쩡한 내아이를 산채로 고급?백수로 만들수는 없지않느냐?는 거였죠!!
영화 벤허에 명마가 있습니다.
이말은 주인이라도 채찍을 대지않습니다.
아무리 훈련이고 연습이고 뭣이고 내아들 에게 도를 넘는 행동은 용납 할수없는겁니다.
더우기 부모없이 보육원에 들어온 다른 아이들에겐 더 말할 필요가 없는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뭐~그럴줄 알았겠습니까!!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들줄 알았으면 안시켰겠죠)
1999년 그 여름은 아주 더럽게...무더운 여름 이였습니다.
그 무덥던 여름!
k보육원 앞마당 언덕을 쇠파이프로 박아 그물망을 치고,
맞은편 타석에 고무매트를 깔고보니 그럴듯한 연습장이 됐습니다.
그렇치만 아직 연습하기위해 볼을 칠수는 없습니다.
먼저...
자동차 타이어를 땅에 반즘 묻어놓고 쇠파이프로 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산을 오르내립니다.
한달인가를 뛰고나서야..
며칠후 레슨프로님도 오십니다.
김00 프로
최초의 아이들을 위해 자원봉사해주시러 오신분입니다.
곧이어 몇몇 프로님 들이 자기일처럼 아이들을 위해 내려오십니다
권프로 고프로...
이니셜상 a b c 프로님으로 칭하겠습니다.
최초의 아이들 스승 a 프로
이때만 해도 큰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중히...조심스레... 기억해 내야합니다. 내 기억이나 추측이 옳지 않을수가 있기때문입니다)
일주일에 자비로 내려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서울로 올라가 본업에 충실해야하는 ....
정말 대단히 고마우신 분이죠.
여기서 내가 추측컨데 단장이신 형님께선 그분에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프로님이 아이들을 자원해서 레슨을 해주시겠다고해서인지는 잘모르겠으나..
또 한분이 오시고... 조금씩 이런 어려운 환경속의 보육원아동들로 골프단이 창단됐다는것이 주위에 알려지며 인적 자원이 늘기 시작 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아! 뜻이 있는곳에 길이 있다는것은 이런걸 두고 말하나보다...
난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프로는 나이는 어리지만 상주해야할 c프로도 필요했습니다.
자 이제 세가지 유형의 티칭방법이 생겼습니다.
(이것도 그땐 미쳐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지금의 시점에서 추측하는것 입니다)
a프로는 자기방법을 c프로에게 지시하고 올라갑니다.
b프로도 마찬가지...
c프로는 나름데로 열심히 중간에서 고생합니다.
자! 여러분 내가 글쓰는 재주가 없다고 누누히 이야기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아실것입니다.
첫째 아이들도 혼란스러웠을것이고,,,
당사자인 프로들도 매우 불만족이였을겁니다.
문제는 그 혼란스러운 아이들 속에 단장의 조카요 .
누가 시켜준 직위는 아니지만 은근슬쩍 부단장?인나로서는..
그 안에 내아들도 있다는데서 문제가 시작 되고 있었고,,,
서서히 뭔가?는 확실히 꼬집어 말할수없는 그 무엇'이건 아닌데...'
라는 내생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아무것도 할수없었습니다.
1999년 여름 이야기만 해도 한권의책입니다만...
그렇게 뛰고 달리고 ,산을타고 오르내리며..드디어 나무 드라이버로 볼을뛰우며 그해 여름
천장도 없는 황량한 연습장에서 그 뙤약볕을 온 몸으로 맞아가며
그렇게 볼이 조금씩 조금씩 태양을 향해 쏘아 올려지고 있었던것 이였습니다
겨울.. 그해 세기의 마지막 겨울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고생은 나중에 글로 길게 써보겠습니다)
이쯤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방송의 위력이죠.
최초의 인적 자원 봉사하러오신 레슨프로님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유형별로 나누다보니 세명의 예로 쓰고있습니다만, 더 많은 분이 관심을 갖고 지도 해주러 오신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에서도 김 *덕 프로님 같은 경우는 당신도 어렵게 골프를 하셨다고 남다른 애정을 갖고 시간날때마다 지도 해주신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날 방송국에서취재 찰영 오더군요.
인간극장 프로그램이였습니다.
이미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후원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 방송이 나가고나서부터 많은 단체에서 장비며, 연습볼이며, 연습타석을 제공해주시고, 몇몇 뜻깊은 인사들로 육성단및 후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방송의 힘을 새삼느끼던 순간입니다.
이제 맨땅에서 헤딩하는 듯한 느낌은 벗어나더군요.
하지만 골프가 뛰고 달리고 연습만 죽어라고 한들 라운딩 없이 한계가 있는법.
컨트리 클럽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을때!
바로 그때 아웃사이더 기질의 형님께선 그 순간에 비장의 카드를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조카가 세상을 떠나던 때 ...
골프 관계자들이 하던말 ...
아무때나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찿아오라고 했던말...
연습라운딩은 얼마든지 해주마 ...했던 위로 차원의말씀을 기억해냈나봅니다.
(이건 형님의속마음까지 내가 추측으로 읽어낸것일뿐 ...)
어쨓거나...
각 골프장을 돌며 협조를 구한결과 지금까지 가장 크게 도움을 주신 골프장이 P 골프장입니다.그외에도 많은 컨트리 클럽에서 첫 티오프전에 9홀, 마지막 오후 티오프후 9홀등 무상으로 돌게 해주셨습니다.
한결같이 하시는말 !
금전으로는 도와주기는 좀 어려워도 라운딩으로야 충분히 도와줄수있다는 취지였습니다.
열심히 하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습니다.
힘이나더군요.
또한 태국이나 뉴질랜드의 교포 골프클럽사장님들도 비행기 티켓만 끊어갖고오라! 그러면 숙식에 무상라운딩보장해주겠다고....
그런데...
이쯤에서..
내기억으로는 편치못한 기억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내스스로도 불편했고 타인의 시선도 불편했던 기억이납니다.
내위치는 어딘가?
내아들의 진로는 과연 어떻게 할것인가?
이제 초4학년 2학기..
발을 뺄려면 지금?아니면 끝까지 가야하는데...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고민!!
사실 이때쯤 대승적 차원에서라도 나와 아들은 빠지는게 순서라는 생각이 들때였습니다.
아! 이건 형님이 보육원 아이들로만 가는게 순서겠다?라고 ...
아주 어렴풋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왠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때' 야! 너 제주도 제2팀 감독으로가야겠다'
감독!!
감독이라고...
아웃사이더 7편에 아버님 병수발을 하시며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 먼저 하늘로 가셨습니다.
몇달만에 전화를 드렸는데...
그게 6월27일 그리고 이틀후 29일 별세 하셨습니다.
글을 쓰기도 힘들고 정리가 잘 되지 않고..
마음도 무겁고 예전기억이 연도별로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일기를 꺼내놓고 써야할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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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약간의 골프에 회의를 느낄때
제주에 내려가게됩니다.
단장님이신 형님의말 !
'월급은 단 한푼도 없다'
내가 바라지도 않는 말을 먼저 하시더군요.
물론 그당시 1팀의 상주하던 c코치는 방송이후에 후원하시는 분들의 도움으로
아주 기본적인 소정의 사례비를 지급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나도 질세라...
'아 좋아요 그런건 필요없고...범이를 같이 데려가게해주면 갈께요'
순간 단장을 비롯한 원장부터 육성단 레슨프로들과 후원회인사들 모두 멍하더군요.
말이 제주도 보육원2팀감독이지 안전관리자 노릇하러가는것이였습니다.
당연히 운전수 개념이였습니다.
제주도 보육원 제2골프팀에 내 아들만 보내주면 그 어떤것도 필요 없다.
순간적인 나의 메니지먼트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그제서야 아들데리고 가는것은 안되고 약간의 월급은 준다하더군요.
1팀수준의 ....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돈은 필요없다.
아들과 함께라면 기꺼이 제주에 내려가 운전이며 관리감독해주겠다.
결론적으로 나의 판정승!
아들과 제주도 홍익 보육원으로 내려옵니다.
(이때가1999년10월)
그러나 2001년 겨울 제주 삼양초등학교를 졸업못한채...
제주도를 떠나게 됩니다.
골프는 완전 포기하게되는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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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제주삼양초등학교에서 졸업시켜주신다고 약조해주셔서 ...
2002년부터 경기도 안양 중학교에 전 입학합니다.
다시 골프를 시작할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때부터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3학년 총 6년의기간은 아들의 골프인생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절같습니다.
(이상이 제1팀 계룡팀탄생의 이야기입니다.2부라고 할것까진 없지만 어찌됐든 제2팀 제주보육원 팈의 이야기를 다음글에서 계속 써보겠습니다)
추신 :
정말 제주는 골프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그 새벽 어둠의 라운딩...
오로지 까마귀 무리들만이 반겨주던 중문의 라운딩이며...
파라다이스 컨트리며 ,,,
비바람이 부는 제주 컨트리의 김일성 고지 에서의 샷!
힘에 부쳐 올려보내면 굴러 내려오곤 또 치고,,,,
이젠 아름다운 추억의샷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