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하지만 즐거웠던 소년 시절
가족끼리 경작하는 소규모 농사는 농민을 토지에 묶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무리 힘든 노동도 묵묵히 했다. 그들은 쉴 틈이 거의 없었고 기쁨이나 보람도 없었다. 백의민족이라 불린 조선의 농민들은 명절이나 되어야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며 마음속의 고민과 외로움을 풀었다.
설은 전통 명절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무명으로 버선 할 켤레씩 지어 주었고, 재순과 봉녀에게는 새 옷을 한 벌 특별히 지어 주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나누어 준 선물을 들고 모두 기뻐하였다. 아버지는 떡을 찧었고 봉녀와 재순은 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장만하였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세봉은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그려 벽에 걸어 놓고, 동생들과 더불어 뜰 안을 깨끗이 쓸었다.
설날 새벽에 온 가족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후 장남인 세봉을 시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께 세배를 드렸다. 어머니는 설 음식으로 찰떡과 콩이 섞인 쌀밥, 고기와 생선, 각종 산나물로 한 상을 차렸다. 아버지가 먼저 식사를 하고 이웃과 친구들 집으로 세배하러 나간 뒤에야 어머니와 아이들이 상에 둘러앉았다. 어머니가 수저를 들자 비로소 아이들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세봉과 원봉에게는 특별히 어머니가 직접 빚은 술을 마실 수 있게 했다. 저녁에는 만둣국을 먹었다. 만둣국은 아버지가 말꼬리를 엮어 만든 그물로 잡은 꿩을 들인 국물로 만들어서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아주 맛있었다. 낮에는 남동생들과 봉녀, 재순 등이 함께 윷놀이를 하였다. 저녁에는 아버지가 타는 낡은 가야금 연주에 맞춰 세봉이 놋그릇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고, 동생들과 어머니는 화로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 향나무를 피운 화로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더욱 흥을 돋워 노래와 춤은 밤이 늦도록 그칠 줄 몰랐다.
정월 보름에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논둑과 밭둑, 볏짚 더미에 불을 붙였다. 겹겹이 쌓인 볏짚과 논둑, 밭둑에 불이 피어오르자 세봉과 동생들은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오래도록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음력 3월의 산신절(山神節)에 아버지는 참나무를 자르러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올랐다. 나무를 찍는 도끼질 소리가 온 산에 울리면 아버지는 “이렇게 해야 호랑이가 무서워서 우리를 잡아먹으로 내려오지 못하지”라고 말했다. 순진한 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듣고는 이내 진지해졌다.
진달래가 피어 산천이 온통 붉게 물들면 마을 사람들은 봄놀이 준비를 했다. 세봉의 부모는 식구를 모두 데리고 참가했다. 그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풀밭에 빙 둘러앉자 이내 사람들이 하나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춤판에 끼어들어 걸립무를 추었다. 이어 세봉과 원봉·시봉·봉녀도 춤판에 끼었고 재순만이 앉아서 어린 남동생을 보았다. 얼마 후 어머니는 어린 동생 정봉을 받아 안고 재순도 같이 추라고 등을 떠밀었다. 세봉과 동생들은 함께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춤을 추었다. 식사가 끝나고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 사람을 추천해 노래를 시켰다.
세봉이 지목되자 아버지가 곁에서 격려를 해주었다. 세봉은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고자 보급되었던 대중곡《선죽교》를 불렀다. 이 노래는 사람들의 애국심을 자극해 어떤 사람은《유럽의 전란》을 불렀고, 어떤 사람은《영웅의 모범》을 불렀으며, 또 어떤 사람은《그리운 조국》을 불렀다. 사람들은 감동이 밀려오는 이 노래들을 들으며 떡을 먹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교사 한 사람이 일어나《독립군가》를 불렀는데, 많은 청년과 노인들이 따라 불렀다.
“독립군의 개선가와 만세 소리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네.”
구장은 봄놀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춤추고 노래를 부른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하면 안 됩니다.”
명절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운동회를 열기 원했는데, 운동회는 곧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가 주체가 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식이었다.
당시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시대의 추세를 생존경쟁으로 보았다. 즉 진보적인 지식을 가진 세력은 반드시 발전하고, 우매하고 수구적인 세력은 도태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현재의 역경을 극복하려면 민중을 계몽시켜 지식을 쌓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을 깨우치는 데 소수의 노력으로는 큰 결실을 맺을 수 없기에 다수의 사람들이 계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신념이었다. 이런이유 때문에 체육활동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중심이 되었고, 운동장은 애국심을 가르치고 고취시키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자들과 위정자들에게 운동회가 눈에 든 가시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운동장에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는 것이 마치 무장시위와 흡사하고 바르지 못한사람들이 하는 방탕하고 경박한 짓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치안력을 동원해 탄압했다.
애국반일의식을 드높인다는 기치 아래 열리는 마을 운동회에 세봉의 가족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운동회가 열릴 때마다 학교 운동장은 언제나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학교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여 각종 경기를 벌였다.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지어 북을 치며 입장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세봉과 그의 동생들은 학생들이 무척 부러웠다. 아버지도 가난 때문에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 안타까웠다.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동포 여러분! 조국을 잊지 맙시다”라는 구호를 우렁차게 외치자, 많은 이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널뛰기, 그네뒤기, 씨름, 이어달리기, 1백미터 달리기, 물동이 이고 달리기, 새끼 꼬기, 담뱃불 붙이기, 줄다리기 등 다양한 운동 종목이 학생·농민·부녀·노인 조로 나뉘어 펼쳐졌다. 세봉은 씨름 경기에 참가해 2등에 올라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씨름판에서 내려온 세봉에게 동생들과 재순은 어머니가 장만해온 떡과 부침개, 물을 가져다 주었다. 세봉과 원봉은 줄다리기 시합에도 참가했다. 사람들은 “동포여, 힘내라!” “동포여, 이겨라!” 하며 소리 높여 응원을 했다.
운동회는 경기 말고도 다른 여러 행사를 함께 진행했다. 봉녀와 재순은 춤판에 끼여 같이 춤을 추었다. 청년들이 소리 높여 민요를 부르자, 참가자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운동회가 끝난 후 동생들과 어머니는 씨름에서 2등을 하여 상을 탄 양세봉을 자랑스러워했고, 아버지 또한 몹시 기뻐했다.
이처럼 명절이나 마을의 행사가 있으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휴식을 취하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놀게 했다. 삼짓날, 한식날, 초파일, 단오, 유둣날, 추석, 중구절, 팔관, 동짓날 등 고향의 명절에 아버지와 함께 한 많은 추억들을 양세봉과 그의 동생들은 영원히 잊지 못했다.
평소에 세봉은 동생들과 술래잡기나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