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죽음
1912년 양세봉의 아버지가 갑자기 상한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어머니는 봉녀를 데리고 새벽 일찍 일어나 깊은 산골짜기에서 제일 깨끗한 샘물을 장성들여 길어 와 그릇에 담고 밥상에 올렸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남편의 쾌유를 간절히 빌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도와주세요. 부디 제 남편의 병이 낫도록 돌봐 주세요.”
그러나 애끓는 기도도 별 효험이 없었다. 세봉이 마을의 의원을 모셔와 진찰을 받게 하고 한약을 몇 첩 지어 달여 드렸지만, 약값을 계속 댈 만한 형편이 못 되어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네 형제는 모두 농사꾼이었다. 큰 백부는 일찍 세상을 뜨셨고 두 분의 숙부가 계셨는데, 분가했지만 모두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숙부 가족이 도와주러 왔고, 숙부가 주재하여 상(喪)을 치렀다.
아버지의 시신은 윗목에 모셨다. 세봉과 동생들은 상복을 입고 상청을 지켰다. 식구들은 모두 통곡했다.
관례에 따라 세봉은 아버지께 제사를 올렸다. 참신(參神)이라 하여 모든 가족이 아버지를 향해 절하고 나서 목향을 세 번 첨가하고, 만수향을 세 개 피웠다. 잔에 술을 부어 올리고 이를 바닥에 뿌리니 강신(降神)이라 했다. 아버지께 수저와 함께 첫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뒤 가족이 곡을 하는 초헌(初獻)에 이어, 어머니와 재순이 절을 하는 아헌(亞獻), 숙부와 숙모 등 친척들이 절을 하는 종헌(終獻)이 이어졌다. 또 다시 술을 따르고 밥뚜껑을 열어 수저를 꽂아 예를 표하는 첨작(添酌) 뒤에는 차나 국을 내리고 물을 올렸다. 이때 수저는 물그릇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수저를 내리고 모든 식구가 절을 한 뒤, 제문과 지방을 태우니 이를 서신(庶神)이라 했다. 제주(祭主)가 서쪽을 향해 술을 마시는 음복(飮福)을 하고는 정리하는 것으로 제사는 끝났다.
3일 뒤 출상을 할 때는 이웃들과 친척들이 상여를 맸다. 양세봉과 동생들은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고 숙부는 종이로 된 돈을 불태웠다. 요령잡이가 먼저 상엿소리를 부르면 상여를 맨 사람들이 함께 따라 부르는데, 노래 구절구절마다 애절한 마음이 절절하게 깃들여 있었다. 산비탈을 오를 때나 강을 건너갈 때면 요령잡이는 상여를 잠시 멈추고 망자에게 노잣돈을 주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아버지의 묘는 백부 묘 근처에서도 물이 흐르지 않고 돌도 없는 산에 안장했다.
장례가 긑나고 숙부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봉을 불러 신신당부를 하였다.
“너희 아버지는 평생 부모님께 효도를 다 하신 분이었다. 그러니 너도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고 동생들도 다 자랄 때까지 돌봐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세봉은 가장(家長)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세봉을 ‘작은 주인’이라고 불렀다. 세봉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농사를 더욱 열심히 지어야 했을 뿐 아니라 가족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며 3년 동안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제사를 올려 어머니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는 “세봉은 효자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세봉과 동생들은 새 볏짚으로 지붕을 가지런히 얹고 흙과 모래를 섞어 벽도 새로 발랐다. 낮고 작은 집이었지만 덕분에 식구들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 집 안에는 나무로 미닫이문을 짜서 달아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따로 방을 쓸 수 있게 해 생활하기가 한층 편리해졌다. 다른 집에 뒤지지 않게 살려고 개 한 마리와 닭 열 마리, 꿀벌도 한 상자 길렀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도 한 마리 사서 기르겠다는 꿈을 키웠다.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자, 세봉은 집안 분위기를 활기차게 만들어 어머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고 동생들도 즐겁게 살았다.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형제자매 사이의 우애가 돈독했고 가족은 화목했다. 세봉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덕분에 동생들과 재순은 안정을 되찾았고, 외롭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 세봉은 언제나 동생들과 재순에게 다정다감한 형이자 오빠였다.
당시 세봉은 이미 다 커서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세봉은 가끔씩 남편은 논과 밭으로 다니며 농사를 짓고 부인은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베를 짜는, 평범하지만 화목한 부부 생활이 부러웠다. 그러려면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잔혹한 현실은 그에게 실망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조선을 병탄한 후 무단통치와 우민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들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개칭하고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강화하였다. 조선총독은 육·해군의 현역 장군이 임명됐는데 직속으로 조선 땅에 주둔하는 육·해군을 통괄하여 지휘하는 한편, 조선의 행정·사법·입법 등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다. 마치 전제시대의 폭군과 같은 존재였다. 총독부는 조선을 통치하는 식민기관이었으며, 중앙 관원부터 지방 관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람들이 거의 다 차지하였다. “일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 사람은 죽여도 좋다”는 게 당시 총독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들은 헌병대와 경찰대를 하나로 합쳤는데, 헌병이 군사경찰 업무뿐 아니라 치안을 유지하는 군사경찰 업무도 담당했다. 즉, 군인 신분으로 경찰 역할도 함께 한 것이다. 이처럼 살기등등한 헌병경찰제는 조선 전역을 커다란 감옥으로 만들어, 조선인들은 암흑과 같은 지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총독부가 설립된 뒤 헌병경찰기구는 아주 강대해졌고 인원도 계속 늘었다. 철산군에 경찰국이 설치되고 세리면에도 경찰서가 생기는 등 벽촌에까지 파출소와 파출소 분소, 주재소 등이 생겨났다. 동시에 군대에는 재향군인회·일본거류민단·소방대를 설치해 헌병경찰의 별동대 역할로 활용하고, 심지어는 학교의 교사들도 군복을 입고 패검(佩劍)을 차고 수업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2월에는 ‘범죄즉결령(犯罪卽決令)’을 제정했다. 경찰서장이나 헌병 분대장은 관학 구역내에서 구류, 태형, 1백원 이하의 벌금, 3개월 이내 징역은 그 어떤 절차 없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또 1912년 3월에는 ‘경찰법령’을 제정하여 헌병경찰의 즉결권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거주지나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 별 이유 없이 마을 회의를 여는 사람, 단체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는 사람, 군중을 모아 집회를 하는 사람, 독단적으로 관청에 진정이나 청원을 하는 사람, 불온한 연설을 하는 사람, 불온한 문장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 불온한 시나 가사를 지어 읆거나 부르는 사람 등 87종의 행위에 대해 처벌한다는 규정도 만들었다. 아울러 치안을 교란하고 안정된 질서를 파괴하여 폭행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일부 외국인 여행자들 중에는 “조선이 앞으로 계속 감옥을 만들어도 이미 그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다”거나 조선 사람은 손발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고 증언했다.
조선인의 언론·출판·결사·집회와 신앙의 자유는 철저히 제한을 받거나 아예 박탈당하였다. 1910년 8월29일 경술병합조약(庚戌倂合條約)이 체결되고 나서 사흘 후 일본 당국은 조선의 모든 단체를 해산시켰다. 친일단체였던 일진회(一進會)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아가 정치적 성격을 띤 모든 집회를 엄금했고, 심지어 종교집회나 학교 운동회도 반드시 사전에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조선인들은 언어도 빼앗겼다. 일본 당국은 일본어가 곧 국어이며 관청이나 학교에서도 모두 일본어를 써야 한다고 선포하는 한편, 군(郡)과 면(面)에 강습소를 꾸려 일본어를 보급하였다. 지식이 있는 사람을 불만 분자로 간주하고 엄격히 감시하는가 하면, 청소년 교육도 통제했다. 교육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臣民)을 배양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모든 조선인을 일본인에게 순종적이고 맹종하는 식민지 노예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부를 한 양세봉으로서는 이런 현실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을에 경찰서가 생기고 일본 경찰관들이 총과 칼을 휘두르면서 위세를 부리며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학교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문을 닫았고, 신사(神社)를 세운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일본 황제를 숭배할 것을 요구하고 억지로 참배하게 했다. 놀란 어머니는 집에 걸어 놓았던 단군왕검의 화상(畵像)을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애국을 논했다는 이유로 청년들은 감옥에 갇혔다. 세봉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글을 모르는 것처럼 행세했다. 마을에서 해마다 빠짐없이 열리던 봄·가을 나들이도 취소되었고, 명절에 열리는 운동회도 금지되었다. 세봉은 사상의 억압과 고통을 가슴 깊이 느꼈다. 가정형편만 괜찮다면 함경북도에서 활동한다는 홍범도(洪範圖)를 찾아가 의병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