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 집단거주지로 이주
양세봉의 가족이 영릉 고성에 살면서 지은 첫 농사는 꽤 큰 수확을 얻었다. 토지세를 내고도 적지 않은 곡식이 남았다. 지주는 피난 온 조선인 가족의 수확이 많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내년에는 소작세를 늘려 달라”고 했다.
양세봉은 이곳이 이국인 데다 조선인 가족이라고는 달랑 하나뿐이어서 남들이 업신여긴다고 느꼈다. 외롭기도 했다. 또 어머니와 동생들, 숙모 모두 중국어를 모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이내 식솔을 데리고 흥경현 경동부(境東部)에 있는 조선인 집단거주 지역인 홍묘자 사도구(四道溝)로 아사갔다.
흥경현성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동만주의 국자가(局子街) 동부까지 이 집단거주지는 이어졌다. 그들은 모두 19세기 중엽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청나라 시기에 흥경과 부근의 통화·환인·관전 등 21개현을 ‘동변도(東邊道)’라 불렀다. 이곳과 국자가는 당시 청나라 조정이 금지 구역으로 봉쇄해 아무도 개간과 경작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 고장은 조선 국경과 아주 가까워서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아무도 경작하는 사람이 없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했다.
자고로 청과 조선 양국의 조정에서는 국경 금지령을 위반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래도 일부 농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 청나라의 성조(聖祖)·고종(高宗) 황제 때에는 압록강에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넘는 조선 사람들을 단속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강 연안 지역 농민들에게 매년 백로(白露) 전(양력 9월 상순 전)에 약 한 달 동안 청나라 지역으로 가 풀 베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강을 건넌 사람들이 비옥한 토지를 보고 아예 그곳으로 이주하여 살고 싶어했지만 법을 어긴 죄로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47년에 사사로이 그 땅을 개간하는 조선 사람이 나타나자, 이들을 쫓기 위해 청나라 조정에서는 초소를 18개 정도 설치하고 병사들을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청나라 말기에는 외국과의 접촉이 갈수록 빈번해짐에 따라 농촌 붕괴가 가속되었다. 조선 말기 역시 가혹한 착취로 인해 더욱 가난해진 농민들과 수재·한재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주인 없는 기름진 땅을 찾아 동변도로 몰려들었다. 여러 차례 말려도 막을 수 없게 되자, 이듬해에 청나라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동변도 지역에 임시 소작인을 모집,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처럼 봉쇄가 점차 완화되자 개간자들이 많아졌다.
1867년 청나라 조정은 봉쇄 구역을 해제하고 경작지를 중국인에게 개방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산동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은 물론,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조선 사람도 많아져 동변도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1890년 조선 북부 지역에 큰 재해가 발생하자,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도 금지령을 어기고 강을 건너 동변도와 간도로 넘어왔다.
1884년 길림성 정부와 조선 조정 사이에 ‘길한규약(吉韓規約)’을 체결하고 월간국(越懇局)을 설립하여 이주해 오는 조선 사람들이 배로 늘었다. 기록에 따르면 1897년, 조선 조정은 서상무(徐想懋)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고 청나라 지역에 사는 조선 사람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민 온 조선 사람들은 오늘의 통화현·환인현·흥경현·관전현 각 지역에 퍼져 살았으며, 그 수는 약 8천 7백호에 3만 7천여명에 달했다.
근대에 조선인의 동북 지역 이주는 매우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19세기 중엽부터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시기이고, 두번째는 3·1운동이 일어난 때부터 1931년 동북 지역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난 시기이며, 세번째는 만주사변 이후이다. 따라서 양세봉 일가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첫번째 시기 말에서 두번째 시기 초쯤에 해당한다.
양세봉 가족이 홍묘자 사도구에 이주할 당시, 그곳에 사는 조선 사람은 몇십호 가량 되었다. 중국에 온 지 가장 오래된 집안이 50년이 넘었는데, 그들은 이미 중국 국적을 가졌을뿐 아니라 부농으로 꽤 잘살았다. 대부분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흡수된 후에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민 온 지 비교적 오래된 집안들은 비록 부유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황해도에서 온 사람도 있고 함경북도·함경남도 사람도 있었으며 강원도·평안북도·평안남도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양세봉은 이곳으로 이사한 후 같은 조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임시로 자그마한 집을 한 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산악 지대인 이곳은 아직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가 많았다. 그러나 황무지를 개방하자 말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장악했다. 그들이 말뚝을 박으면 그것은 곧 땅의 경계가 되었고, 그들은 주인이 되었다. 개간자들은 밭 한 뙈기를 경작하면 곡식 한 섬을 바쳐야 했다. 세봉은 지주에게서 땅 두 뙈기를 빌리고, 추수 후에 함께 갚는다는 조건으로 종자와 농기구 살 돈을 빌렸다.
산지는 매우 비옥했지만 각종 나무뿌리와 잡초들이 서로 휘감기고 뒤얽혀 곡꽹이로 있는 힘을 다해 휘둘러야 뿌리들이 겨우 찍힐 만큼 아주 힘들었다. 캐낸 뿌리와 나무 줄기를 태우면 그것이 비료였다. 세봉과 남동생들은 열심히 일했다. 어머니와 숙모, 재순도 함께 힘을 보태서 마침내 그 거친 황무지를 경작지로 만들어 냈다. 온 집안 식구의 노력으로 첫해부터 풍성한 수확을 얻었는데, 그렇게 이곳에서 3년을 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