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2.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⑷

대모달 |2011.09.06 19:06
조회 88 |추천 0

★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을 지지하는 군중 모임에 참석하다.

 

일찍부터 이곳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무대였다. 1909년 여름,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단체의 회원이었던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이 압록강을 건너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皺家街)에 와서, 이곳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선정했다. 그 해 겨울, 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여준(呂準) 등도 이 고장으로 옮겨와서 이듬해 4월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조직은 사도구 부근의 왕청문에까지 발전하여 왕청문의 적지 않은 조선인 학생들이 경학사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이는 사도구의 조선인 청년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 밖에 1914년 흥경현 남부의 환인현 외차구(外此溝)에서 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문경빈·김명봉(金鳴鳳)·서도신 등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창단하였다. 주로 유림의 지사들로 구성된 이 단체의 구호는 ‘대한족(大韓族)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한다’였다. 무장한 그들은 환인과 관전 일대에서 소속 인원을 약 2백명으로 늘려 압록강을 건너가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습격하기도 하고, 현에 설치된 일본 영사관을 폭탄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호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은 늘 홍묘자·사도구 등지에서 활동하였기에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10여년에 걸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단통치(武斷統治)는 조선 땅에서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 학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김원벽(金元璧)이란 청년이 대표자로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집회에 참가한 학생과 군중은 팔을 높이 쳐올리며 “조선인의 독립 정부를 세우자!”, “일본 사람과 일본 군대는 조선 땅에서 물러가라!”, “자유와 평등을 위해…!”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은 거센 파도처럼 거리로 밀려 나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아울러 평양·남포·안주·성천·의주·원산·송화 등지에서도 대중적 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는 빠르게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3·1운동은 대중들의 평화적 시위였으나 총독부가 피비린내나는 진압을 실시하면서 폭력적 투쟁으로 변하였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남포·상원·양덕·강서·철산·길주·개성 등지의 대중들은 도끼나 몽둥이를 무기로 삼아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특히 개성·성천·수안 등지의 대중들은 이후 세 차례나 더 일본인들과 맞붙어 싸웠다. 강서군 사천에서는 경찰서가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아 일본 경찰관 네 명이 살해되었다. 3월 중순 이후 중남부에서도 연이어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투쟁은 4월 중순에 이르러 최고조에 다다랐다. 중국의 신문과 간행물들도 잇달아 3·1운동 소식을 실었으며, 조선 사람들의 정의로운 투쟁을 지지하였다.

 

1918년에 홍묘자 15간방(十五間房)에서 최초의 조선족 사립학교인 흥동학교(興東學敎)가 설립되었다. 학제는 4년으로 학생은 1백여명이었다. 애국 지식인 이세일이 이 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교장은 홍묘자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조선인들에게 학교를 알리고, 또 학교 운영을 위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해 겨울 흥동학교는 홍묘자로 옮겼다.

 

1919년 4월, 이세일 교장은 각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조선인들을 모아 시위대를 조직했다. 조선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세봉의 집에도 찾아와 참가를 권했다.

 

그 해 5월 초 어느 날, 양세봉은 원봉과 시봉, 재순에게 흰 한복을 입게 하고 함께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조선인 청년들은 거의 다 모였고, 개중에는 나이 든 노인들도 있었다. 모두 모이자 촌장의 인솔 아래 줄을 지어 지역의 중심인 홍묘자로 출발했다. 도중에 마을을 지날 때면 모두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홍묘자에 수백명의 조선인이 모였는데 여기저기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고 있었다. 흥동학교의 고학년 학생들은 손에 붉은 천조각을 잔뜩 쥐고 있다가 시위대가 오면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떤 사람은 붉은 천 조각을 완장처럼 팔에 두르기도 했다. 모두 홍묘자의 흥동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이세일 교장은 손에 큰 태극기를 들고 지휘를 하며 마을별로 줄을 세워 시위 대오를 만들었다. 키가 큰 양세봉이 마을 시위 대오의 선두에 섰다. 이어 교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조선 광복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일본과 한국이 합병한 지 근 1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왜놈들은 우리의 국권과 국호를 빼앗았고, 우리의 생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우매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제한하고, 우리의 이권을 빼앗아 생존을 위협했을뿐 아니라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살해했습니다. 또한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탈을 거듭하여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헤어날 수 없게 만들었고, 금수강산 삼천리는 거대한 감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울러 흉악하고 악독한 칼날을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에게까지 겨누고 있습니다. 또 군벌과 결탁하여 중국과 한국을 이간시키기 위해 별의별 악독한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조국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2백여 군데의 도시에서 봉기했고, 시위 참가자는 2백만명이 넘습니다. 중국에 사는 우리도 마땅히 호응하여 국내의 봉기와 함께 한다면 조선 민족의 독립과 자치는 머지않아 실현될 것입니다!”

 

교장의 연설이 끝나자 모두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어 교장은 앞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오를 이끌며 홍묘자 거리를 몇 바퀴 돌다가 외곽 지역인 15간방까지 행진하였다. 도처에서 우렁찬 만세 소리가 울리자, 많은 중국인이 몰려 나와 구경하였다. 오후에 지역의 한 보갑(保甲)이 나와 간섭했는데, 그는 왕청문·흥경현 등지의 조선 사람들이 다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자 중국 정부가 조선 사람들의 소요를 중단시키라는 공문을 속달로 보내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독립단원 한 사람이 예리하게 보갑을 반박하자, 그는 할 수 없이 시위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시위를 현지 사람들은 ‘만세 운동’이라고 불렀다.

 

저녁이 되어서야 사도구의 대오는 집으로 돌아왔다. 양세봉과 그의 동생들은 비록 피곤했지만 억압받던 심정을 떨치고 기를 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재순은 시위 도중 만난 김해원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시위 행진 때 줄곧 같이 걸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마음이 맞았다.

 

훗날 조선에서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이 7만여명,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사람이 20만여명에 달한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북 지역의 조선족들은 몹시 놀랐다. 양세봉의 마음에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재순과 해원이 알게 된 후 해원은 이따금 양세봉의 집에 놀러왔다. 세봉의 어머니는 이 활발하고 영리한 처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어느 날, 세봉의 어머니가 빨래 대야를 이고 마을 시냇가에 갔다. 해원의 어머니가 그곳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세봉의 어머니도 그 옆에 있는 넓적한 돌 앞에 앉아 옷을 빨기 시작했다. 해원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빨래 방망이로 낡은 이불 호청을 부지런히 두드리고 있었다. 세봉의 어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 언제 중국 땅으로 건너왔느냐고 물었다.

 

해원의 어머니는 자기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5년 전 평안북도에서 이곳으로 왔고, 식솔은 많고 생활은 아주 빈궁해서 어떤 때는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이곳에 온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적응하지 못해 늘 고향과 벗들이 그립다고 했다.

 

세봉의 어머니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며 서로 운명이 같다고 느꼈다. 이어 해원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해원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고장에 조선 사람이 몇십 호 있긴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은 너무 많고 어린 것은 너무 어려서 마땅한 신랑감을 찾아 주기가 어려워요.”

 

세봉의 어머니는 그 틈을 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보내세요. 우리 원봉이가 어때요?”

 

해원의 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저는 아직 그 집 아들을 잘 몰라서……”

 

해원의 어머니는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오늘 빨래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해원의 아버지는 양씨 집안 사람들이 중후하고 솔직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봉이도 신체가 건강하니 괜찮다고 생각되어 얼마 뒤 둘의 결혼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냈다.

 

양씨 집안이나 김씨 집안이나 모두 조선을 떠나온 사람들이기에 생활은 보잘것없었다. 두 집 모두 혼인 절차와 격식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1921년 봄에 세봉의 어머니와 재순이 김해원을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 곧 원봉의 결혼을 의미했다. 그때 양원봉은 스물다섯 살이었고 해원은 열다섯 살이었다. 해원이 시집온 후 식솔이 늘어 생활이 더욱 빠듯해졌지만 가장인 세봉을 중심으로 여전히 규모 있게 살림을 꾸렸다.

 

홍묘자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금구자(金溝子)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곳의 조선 사람들은 모두 벼농사를 지었는데 밭농사보다 수확이 많아 그들의 생활 형편은 다른 마을들보다 나았다. 세봉은 아는 사람을 통해 자주 장용순에게서 땅을 빌렸다. 이리하여 양세봉은 또 식솔을 거느리고 금구자로 이사했다.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