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2011-09-17]
과도한 추측과 섣부른 결론, 언론의 '환각 저널리즘'
"물오른 태극호 주장 박주영이 위기에 빠진 아스날의 구세주가 될까.(스포츠경향)"
"위기의 거너스…앙리의 추억, 박주영으로 달랜다(일간스포츠)"
한국 축구대표팀의 주장 박주영(26) 선수가 지난달 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명문팀 아스날에 입단한 이후, 우리 언론의 관심이 뜨겁다. 박주영의 팀 내 입지와 경쟁 구도, 감독의 전술, 동료 선수들의 습관은 기본이고 팀의 역사와 특징, 등번호에 얽힌 사연, 훈련장 모습 등 기사의 소재로 나올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언론의 관심이 '너무' 뜨겁다. 혹시 박주영이 데이지는 않을까?
따져보면 박주영이 언론의 '핫'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격수이자 대표팀의 주장인 그가 유럽 '빅리그'중 하나인 프리미어리그의 '빅4' 팀에 입단했다는 것부터가 일단 '사건'이다. 우선 해외로 진출했던 우리나라 선수들 중 공격수로 성공한 사례는 (80년대의 '차붐'을 빼놓고)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미들스브로(EPL)의 이동국, 페예노르트(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이천수와 페루자의 안정환(이탈리아 세리에A) 등은 모두 내로라하는 한국의 대표 공격수들 이었지만, 나갈 때와는 달리 들어올 때는 축 처진 어깨와 굳은 표정으로 공항에서 취재진을 마주해야만 했다. 더구나 아스날은 한국 공격수가 진출했던 해외 어느 팀보다 크고 강한 '명문' 팀이다. 자의든 타의든, 박주영의 어깨에 몇 배나 무거운 부담이 떠맡겨진 셈이다.
한국 언론과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또 있다. 이적시장 막판, 박주영은 1차 메디컬 테스트까지 마치며 지난 시즌 프랑스 리그1 챔피언 릴(LOSC Lille Métropole)로의 이적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 2차 메디컬 테스트를 앞두고 박주영에게 걸려온 전화가 문제였다. 바로 아스날의 감독 아르센 벵거(Arsène Wenger)가 직접 박주영에게 입단을 제의한 것이다. 벵거 감독이 누구인가. 1996년 홀연히 아스날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던 세계적인 명장이 아닌가. 그는 1997-98 시즌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이끌며 부임 당시 "아르센, 누구?(Arsène, Who?)"라는 잉글랜드 현지의 비아냥거림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2003-04 시즌에는 EPL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다음시즌 초반까지 49경기 무패 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더구나 그의 '선수 보는 안목'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왼쪽 측면 공격수로 뛰며 AS모나코와 유벤투스를 전전하던 티에리 앙리(Thiery Henry)를 데려와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키운 게 대표적이다. 그런 그가 박주영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으니, 어찌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뭐든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스포츠 기사도 '기사'인 만큼, 저널리즘의 본령인 '팩트'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과도한 추측과 섣부른 결론, 과장과 왜곡이 여기저기 춤춘다. 2005년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유나이티드(맨유) 입단 이후 되풀이 되어 왔던 '환각 저널리즘'이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입단 이후 두 경기째 벤치를 지킨 박주영을 두고 "'희망고문'이 따로 없다(서울신문)"거나 "'속모를 용병술'에 박주영 벤치 신세(한겨레)"라는 평가가 나온 게 대표적이다. "벤치 멤버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파이낸셜뉴스)"는 분석도 '벌써' 나왔다. 이적시장 마감 이후 첫 경기이자 박주영이 후보 명단에 포함된 첫 경기였던 10일(현지시각) 스완지시티전을 중계하던 캐스터는 "박주영을 투입할 만한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연신 '멀쩡히' 뛰고 있던 박주영의 팀 동료를 깎아내리기도 했다. 당시 아스날은 1대 0의 '불안한 리드'를 이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적어도 EPL에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공격수인 박주영을 섣불리 투입할 상황이 아니었단 얘기다.
▲ 스포츠동아 9월 10일자 3면.
언론이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 대개 '취재'를 안 했기 때문이다. 박주영은 당시에도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불투명 했었다. 선수 등록을 위해 꼭 필요한 영국 정부의 워크퍼밋(취업비자)가 경기 직전에야 발급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동원 선수가 출전하는 선더랜드 경기 중계를 준비하던 SBS-ESPN은 경기 시작 10분 전에야 급하게 계획을 변경해 아스날과 스완지시티의 경기를 편성해야 했다. 게다가 경기 박주영은 국가대표팀 경기를 마치고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경기 전날까지 워크퍼밋 발급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팀 동료들과 발 한 번 맞춰 볼 시간이 없었다는 뜻이다. 세밀한 패싱게임을 추구하는 아스날에서 발 한 번 맞춰보지 않은 박주영을 투입하라는 주문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다.
물론 캐스터의 말대로 '발 한 번 맞춰보지 않은 선수'도 있었다. 페어 메르테사커와 미켈 아르테타, 요시 베나윤 등의 선수가 그 날 아스날 데뷔전을 치렀다. 13일 도르트문트(Borussia Dortmund)와의 경기에서는 안드레 산토스가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일단 아르테타와 베나윤은 EPL에서 모두 6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특유의 경기 스피드와 리듬에 익숙한 선수들이다. 메르테사커는 주전 중앙수비수인 토마스 베르마엘렌의 부상으로 인해 선발 라인업에 포함될 수 있었다. (또 다른 주전 수비수인 요한 주루는 시즌 초반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왼쪽 측면 수비수인 산토스는 도르트문트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경기 종료 10분여를 앞두고 1대 0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공격수인 제르비뉴 대신 투입돼 데뷔전을 치렀다. 이번 시즌 아스날의 주요 이적생 중 유독 박주영의 데뷔가 늦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따져보면 크게 납득하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 막 영입돼 팀 훈련에 합류한지 한 달도 채 안 된 박주영이 당장 경기에 투입되거나 주전 자리를 꿰차기는 어렵다. 우선 박주영 선수가 가장 자연스럽게 뛸 수 있는 공격수 자리에는 팀 내 입지가 확고한 주장 로빈 반 페르시가 버티고 있다. 그 뒤에는 지난 시즌 영입된 마루앙 샤막 선수가 있다. 시즌 중반 이후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최근까지도 부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지난 시즌 초반 반 페르시가 부상으로 빠져 있을 때 훌륭히 빈자리를 메웠던 선수다. 게다가 그는 벵거 감독이 몇 년 전부터 눈여겨보다가 자유계약으로 풀리자마자 영입한 케이스다. 박주영의 두 번째 옵션이라고 할 수 있는 양 측면 주전 공격수 자리에는 테오 월콧, 안드레이 아르샤빈, 제르비뉴 선수가 버티고 있다. 확고한 주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제르비뉴를 제외하고는 나름대로 벵거 감독의 신임을 얻으며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선수들이다.
게다가 아스날의 최근 성적은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당장 매 경기의 '결과'가 중요한 상황에서 공격수인 박주영에게 쉽게 기회가 주어지기 어려운 이유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칼링컵 경기에 출전하거나 팀이 두 골차 이상으로 리드하고 있는 경우에 교체투입되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 일간스포츠 9월 10일자 8면.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의 소식을 보도하는 언론의 '환각저널리즘' 태도는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 입단한 게 벌써 6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언론들은 매 경기 박지성의 출전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주전 경쟁 탈락 우려'라는 기사가 쏟아지고, 반대로 좋은 활약을 펼치면 '굳건한 팀 내 입지 확인'이라는 기사가 봇물을 이룬다. 팀 전술 운용에 대한 감독의 장기적인 계획이나 각 선수 역할 변화에 따른 감독의 전략적 판단 등을 짚어주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풀타임 출전'에도 불구하고 팀이 패했다거나, '후반 교체 투입돼 팀의 승리를 도왔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경기 분석도 이제 어지간한 축구팬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국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국내 축구팬들도 이제는 안방에서 EPL과 프리메라리가, 세리에A, 분데스리가 등의 '빅리그'와 '별들의 전쟁'인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만큼 국내 팬들의 수준과 안목도 높아졌다. 각자의 관심과 호감에 따라 각자 응원하는 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아졌다. 꼭 한국 선수가 뛰는 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축구를 축구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재미'로 즐기기 시작한 이들이다. '태극전사'나 '한국의 심장'이라는 식의 수식어를 동원하는 '내 멋대로' 기사는 이미 이들에게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요지부동이다.
▲ 중앙일보 9월 10일자 24면.
한국의 스포츠 선수들은 이미 각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것은 체계적인 국내 스포츠 선수 육성 시스템에 의한 성과이기 보다는 개인적 재능과 노력, 또 '해외 조기교육'에 기댄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LPGA의 박세리 선수도 그랬고,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도 그랬다. 박찬호와 박지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 야구와 축구가 두 선수를 길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황이 이런데도 이처럼 '울타리를 넘어선' 몇몇 선수들은 각별한 주목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해 세계무대에 한국 스포츠의 수준을 알리는 영웅으로 표상된다. 이는 국내 스포츠의 전체적인 발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한국 스포츠의 지속적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디디에 드로그바 선수의 활약을 보고 우리가 '코트디부아르 축구'의 수준에 감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언론의 '환각저널리즘'이 위험한 또 하나의 이유다.
오늘(17일) 열릴 아스날과 블랙번의 경기를 앞두고 언론은 여지없이 '박주영의 데뷔전이 오는 주말 블랙번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근거나 분석 보다는 추측과 기대에 기댄 흔적이 다분하다. 이는 박주영에게도, 또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에도 예의를 갖추지 못한 태도다. 축구는 팀 스포츠이고, 박주영은 가장 먼저 자신을 대표해 뛰는 축구 선수다. 언론의 '환각작용'은 이제 그만 멈출 때가 됐다.
〈미디어오늘 허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