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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16.중원에 나타난 또 다른 고구려 치청번진(淄靑藩鎭)

개마기사단 |2011.10.04 04:44
조회 161 |추천 0

 

● 신라 군사 3만명이 당나라에 파견된 이유는?

고구려는 비록 서기 668년에 멸망했으나 그 생명력은 끈질겼다. 멸망한 지 1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나 만주 지역이 아닌 중원 대륙에 끼친 발자취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헌덕왕(憲德王) 11년 조에는 이와 관련해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내용이 있다. "7월에 당(唐) 운주절도사(鄆州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자 헌종(憲宗)이 양주절도사(揚州節度使)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군사들을 징발하니 국왕이 황제의 명이므로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에게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당나라 군사를 돕게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은 그간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신라의 3만 대군이 당나라로 출병해 운주절도사의 군대와 싸웠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지금의 산동성 지역인 운주로 무려 3만의 신라 병력이 파견되어 당나라 내에서 거병한 반란군과 싸웠다는 기록인 것이다. 신라는 왜 이런 대규모 출병을 단행했던 것일까? 당시 신라도 그리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당에 파병하던 그 해 3월 신라 곳곳에 초적(草賊)이 일어나서 헌덕왕이 여러 주군(州郡)의 도독 및 태수에게 진압을 명령하던 상황이었다. 외국의 내전에 개입해 대군을 파견할 상황이 아니었다.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이런 상황을 무릅쓰고 파병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산국사기는 '황제의 명이므로' 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보다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운주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고구려인의 후예라는데 있을 것이다.

이사도는 산동지역에 당나라에 맞서서 독립된 권력을 누리던 치청번진(淄靑藩鎭)을 창업(創業)한 고구려인 이정기(李正己)의 손자였던 것이다.

치청번진을 세운 이정기는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본명이 이희옥(李禧玉)인데 고구려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영주(營州)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태어난 영주는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大祚榮) 일가가 이주해 살았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유민들이 대거 강제 이주를 당해 살던 곳이었다.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당나라는 무려 20여만명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 대상은 평양성을 비롯해 당나라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지역의 지배층과 백성들이었다. 고구려인들을 분산시킴으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

당(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한 후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도호로 임명하고 군사 2만명을 주둔시켜 식민지로 지배했다. 그러나 고구려인 검모잠(劍牟岑) 등이 평양 부근에서 당의 지방관을 살해하고 안승(安勝)을 임금으로 추대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신라로 도주한 사건이 보여주듯 당의 고구려 지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당전쟁(羅唐戰爭) 와중에 안동도호부는 신라군에 쫓겨 676년 요동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보장왕(寶臧王)을 요동으로 불러와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임명해 고구려 유민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보장왕은 오히려 옛 복속민이었던 말갈족(靺鞨族) 등과 통모해 반당거사(反唐擧事)를 도모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임명했으며, 699년에는 안동도호부를 안동도독부로 격하시키고 보장왕의 아들인 덕무(德武)를 도독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을 당의 내륙 깊숙한 곳으로 끌고가 분산 소개시켰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당나라 수도 장안이나 요동 서쪽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날 내몽고 서쪽의 감숙성(甘肅省)과 섬서성(陝西省),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일대로 끌려간 이들도 있었다.

이 일대의 황막한 사막지대를 여행하다 보면 옛 고구려 유민의 후예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또 산동반도 이남인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일부 지역도 이에 포함된다. 만주 서쪽인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 지역인 요서의 영주(營州) 일대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 중에 치청번진을 세운 이정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계기로 성장

당시 요서 일대에는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平盧軍)이 있었는데, 이정기(李正己)는 이 평로군의 비장(裨將)이었다. 평로군에는 이정기의 고모 아들로서 내외종간이었던 후희일(侯希逸)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요서 지역의 비장에 불과했던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었다. 안녹산이 이끄는 반란군이 한창 기세를 떨치자 이정기는 안동도호 왕현지(王玄志)를 도와 안녹산의 친장(親將)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徐歸道)를 참살하는 공훈을 세웠다. 그는 왕현지를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옹립했으나 공교롭게도 왕현지는 곧 병사하고 만다.

그러자 당 조저은 왕현지의 아들을 후임 절도사로 임명시키려 하는데 이정기는 이에 반발해 그 아들을 죽이고 내외종인 후희일을 평로병사로 추대한다. 이정기 자신이 직접 평로병사에 부임한 것은 아니지만 드디어 이정기 집안이 평로군을 장악한 것이었다.

후희일은 안녹산이 사신을 보내 회유하자 사신의 목을 베어 돌려보낼 만큼 철저한 반안녹산(反安祿山) 노선을 견지했으나 이에 분개한 안녹산이 대군을 보내는 바람에 쫓기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북방 해족(奚族)의 침공이 겹쳐 극심한 어려움에 빠졌다. 후희일과 이정기는 이런 어려움을 집단 이주로써 풀기로 했다. 후희일은 이정기와 함께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발해만을 건너 산동성(山東省) 등주(登州)에 상륙한다. 드디어 중원 대륙에 집단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후희일과 이정기가 거느린 군사들은 보다 내륙의 청주(靑州)에서 당나라의 관군과 만나 합류한다. 안녹산의 반란에 골머리를 썩던 당 조정은 안녹산과 합류하지 않고 관군을 찾아온 이들을 가상하게 여겨 후희일에게 산동성의 치주(淄州), 청주 등 6개주를 관장케 하는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로 임명한다.

후희일은 이에 만족을 느껴서인지 사찰을 건립하는 등 큰 역사(役事)를 일으켜 군사들의 불만을 샀다. 이 불만은 자연 이정기에 대한 신망으로 이어졌는데, 이를 우려한 후희일이 이정기를 해임하려 하자 군사들은 거꾸로 후희일을 내쫓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당 조정은 이정기를 문책하는 대신 그의 실권을 인정해 주는 회유책을 썼다. 당 조정은 그를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蘿兩番使)로 임명했다. 비록 명목상이었지만 그에게 발해, 신라 양번사라는 관직을 준 것은 그가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안녹산(安祿山)이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피살당했으나 안녹산의 부장이었던 사사명(史思明)이 계속 반란을 일으켜 전후 9년(서기 755년~76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정기가 이 반란을 계기로 산동에 상륙한 것 같이 이 반란은 종래 변경 방어를 위해 두었던 졸도사가 국내 요지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어 전국에 번진(藩鎭), 즉 군벌이 할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요 번진 중에는 하북 방면의 위박(魏博), 성덕(成德), 노룡(盧龍) 절도사가 있었으며 산동에 치청(淄靑) 번진이 있었는데 이 치청번진의 주인공이 바로 이정기(李正己)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정기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산동성 일대로 세력을 확장해 10개주를 치청군에 복속시켰다. 그의 군대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는 과정에서 무려 10만의 대병력으로 성장했다. 그야말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대로 '이웃 번진(藩鎭)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강한 번진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이정기(李正己)

고구려의 후예 이정기(李正己)는 이 지역을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삼았다. 관리를 임명하고 조세를 수취하는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면서 이웃 번진들과 혼인 등을 통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그는 777년 이영요(李靈曜)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강소성(江蘇省)인 서주(徐州)와 조주(曺州) 등 내륙 5개주를 추가로 점령했다. 이정기는 드디어 당(唐) 조정에 맞서는 최대 세력이 된 것이다. 이로써 조주를 기준으로 중원의 동부 지역은 이정기가 지배하는 형상이 되었으니 당 조정은 사실상 조주 서부 지역만 다스리는 분열 왕조가 된 셈이었다. 더구나 이정기는 당초 치청번진(淄靑藩鎭)의 치소(治所)였던 청주를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기고 보다 서쪽의 운주(運州)를 치소로 삼아 계속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갓 즉위한 당황(唐皇) 덕종(德宗)은 서기 780년 변주에 성을 쌓고 치청번진의 서진(西進)을 막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정기도 당나라와 정면승부를 벌이기 위해 변주와 가까운 조주 제음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동시에 사촌형인 이유(李維)에게 서주(徐州)를 맡겨 반격 태세를 취한다. 드디어 이정기의 군대는 당군과의 대접전(大接戰)에서 승리를 거두고 서주 근교의 용교(埇橋)와 와구(渦口)를 점령했다. 옹교와 와구의 장악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곳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중요한 이유는 이 곳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중심인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대운하를 통해 올라오던 중국 남부지방의 물산운송을 두절시켰음을 뜻하는 것이다. 남부에서 물산이 올라오지 않게 되자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거꾸로 이정기의 치청번진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 산동성(山東省), 안휘성(安徽省), 강소성(江蘇省)을 아우르는 독립왕국 건설

이로써 이정기는 한반도와 마주보는 산동성은 물론 안휘성과 강소성 일대까지 다스리는 치청번진(淄靑藩鎭) 독립왕국을 이룩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한반도 중남부를 장악했던 신라보다 몇 배 넓은 영토였다.

그러나 이 때 변수가 발생한다. 변주에서 당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이듬해인 781년에 이정기가 등창으로 급서하는 것이다.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치청번진의 주축은 이정기였으므로 그의 죽음은 치청번진의 급격한 약화를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이정기와 동맹관계였던 산남동도(山南東道)의 양승의(梁承義)가 당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으로써 한 축이 무너졌다. 아들 이납(李納)은 이정기의 죽음이 가져올 세력약화가 두려워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전열을 정비했으나, 이정기가 서주자사로 임명했던 당숙 이유가 덕주(德州)의 이사진(李士眞)과 함께 당에 투항하는 등 악재가 잇따랐다.

운하 개통을 둘러싸고 당(唐) 조정과 일진일퇴(一進一退)가 거듭되었다. 당으로서도 옹교와 와구를 탈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산이 풍부한 남부의 경제적 후원이 없이 유지되었기에 장안은 너무 서쪽 요지였던 것이다. 드디어 당에 투항이 잇따르면서 치청번진이 분열된 것을 계기로 운하통운이 재개되었으나 이듬해인 782년 이납이 회서(淮西)의 이희열(李希烈)과 함께 옹교와 와구를 재탈환하고 운하를 다시 불통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 조정은 치청번진(淄靑藩鎭)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존립이 위태롭다는 판단에 따라 전국에 걸친 군사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劉玄佐)에게 치청번진을 정벌하게 했다. 당나라와 치청번진의 한판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당나라의 무리한 군사징발에 대한 군사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치청번진 정벌을 위해 동원되었던 경원군(經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을 점령해 버린 것이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황(唐皇) 덕종(德宗)이 부랴부랴 양주(梁州) 등지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치청번진과 경원군의 반란은 당나라의 위기였다.

자칫 당의 멸망이 눈앞에 닥치자 다급해진 덕종은 반당(反唐) 번진을 이끈 인물들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면서 회유했다. 치청번진의 이납(李納)도 그런 회유대상의 하나였다. 이납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산동지역에 있던 제(齊)의 국호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때의 제왕(齊王) 칭호는 역대 중국 조정이 변방이나 이민족 왕조에게 형식적으로 내리던 명목상의 군왕 칭호와는 달랐다. 이납은 명복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산동지역을 다스리고 있는 명실상부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이납은 당 조정과 극단적인 대립은 피하면서 세력을 온존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세른넷의 나이로 792년에 요절하고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뒤를 이었다. 이사고는 이납의 후기 정책을 계승하여 당 조정과는 극단적 대립을 피하면서 내부 세력을 보존하려 했다. 이로써 당 조정과의 갈등은 격화되지 않았으나 번진과의 충돌은 더욱 빈번해졌다. 치청왕국(淄靑王國)은 성덕번진(成德藩鎭)과 소금 산지인 체주와 덕주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런 와중에 806년 이사고마저 죽고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가 뒤를 이었다.

이 무렵은 치청왕국 뿐만 아니라 당(唐) 조정도 변화가 있었다. 한해 전에 순종(順宗)이 재위 1년을 못넘기고 세상을 떠나고 헌종(憲宗)이 즉위했는데 헌종은 각 지방을 배경으로 독자적 권력을 행사하는 절도사를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즉위초부터 군소 군벌들에 대한 정벌에 나선 헌종은 서기 815년 12월부터는 투항한 다른 번진들을 앞세워 치청왕국(淄靑王國) 토벌에 나섰다. 치청왕국의 이사도는 방어진(防禦陳)을 구축하고 장안에 자객을 보내 번진정벌론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등 전력을 다해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번진들이 당황(唐皇) 헌종(憲宗)의 공세에 무너져 치청정벌전(淄靑征伐戰)에 가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치청왕국은 고립무원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후예 이사도는 정면대결에 나섰다.

그러자 당나라는 치청을 멸망시키기 위해 신라에 출병을 요청한 것이었다. 당시 치청왕국은 발해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같은 고구려의 뿌리였던 치청과 발해가 한편이 되고, 당과 신라가 다른 한편이 되는 국제관계가 조성되었다. 신라는 발해와 적대국이었던 것처럼 치청왕국과도 우호적일 수 없었다. 발해와 치청왕국은 모두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신라가 매년 당나라에 보내는 사신길을 막은 것도 한몫했다. 치청왕국이 산동을 장악한 이후에는 신라의 대당(對唐) 사신 파견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황해뿐만 아니라 동지나 해로를 이용해 대운하를 거쳐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치청왕국이 장악했다. 때문에 이정기 일가가 세운 치청왕국이 당과 대립하던 40여년 동안 신라는 겨우 일곱차례밖에 대당 사신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당과 외교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낳았던 것이다.

신라로서는 당이 무너지면 북쪽의 발해, 서족의 치청과 대립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속하기 어려웠다. 이런 사정이 어려운 국내 사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파병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신라군이 치청왕국과 전투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중국 자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치청토벌군의 선봉부대였던 무령군(武寧軍)에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당군 및 각 번진들에다 신라인들까지 합세한 공세 때문에 치청왕국(淄靑王國)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였돈 유오(劉悟)가 정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이사도(李師道)를 죽이고 당에 투항했던 것이다.

서기 819년 2월의 일이었다. 이정기가 군사들에 의해 평로치청절도사로 추대된 지 54년, 이영요를 토벌하고 조주, 서주 등을 점령해 15개주를 손아귀에 넣고 독자권을 행사한지 41년만이었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대륙의 한복판을 장악한 이정기 일가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는 치청왕국(淄靑王國)이 무너진 다음 고구려의 흔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 이정기(李正己)가 청주(靑州)와 운주(鄆州) 등 12개주(5개주를 잘못 기록함)를 당나라로부터 도둑질해서 차지하고 4대에 걸쳐 50년(58년을 잘못 기록함) 동안 다스렸다. 이들은 고구려의 풍속을 지켜서 중국식의 예의를 몰랐다. 제국(薺國)이 망한 다음 화령장(華令將)이 하는 말이 제국(薺國)은 공자(孔子)와 노자(老子)가 태어난 고장인데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중국식으로 교화시킬 필요성을 주장했다.'

구당서(舊唐書) 제162권 조화(曺華)편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유민들은 나라가 망하고 중원 대륙으로 붙잡혀 와서도 150년이 지나도록 중국인으로 동화되지 않고 고구려의 풍습과 언어를 유지하며 한예족(韓濊族)으로 끈질기게 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진행하고 있는 중국 측에서 고구려 패망 당시 고구려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중국으로 강제이주되어 한족(漢族)에 융합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연히 중국 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의 기록과 진실은 고구려가 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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