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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9.수양대군(首陽大君)의 집권과 상왕복위운동(上王復位運動)

개마기사단 |2011.10.12 19:18
조회 409 |추천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그의 즉위는 어렵게 구축된 조선의 정상적인 왕조체제를 붕괴시켰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국왕 세조(世祖)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 되면서 소모적인 충역(忠逆) 시비에 휘말렸고 수많은 사대부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 국왕과 동지인 공신들은 훈구파(勳舊派)로서 모든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독점했는데, 법 위에 존재하는 훈구파들의 부패는 많은 백성들의 정상적인 삶을 몰락시켰다. 훈구파는 급기야 향리에 은거한 사림파(士林派)의 세력 기반까지 침식해 들어갔고, 이에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 문종(文宗)의 요절과 단종(端宗)의 즉위

세종(世宗)에서 문종(文宗)까지 조선은 정상적인 왕조의 기틀을 잡았다. 세종과 문종의 즉위와 관련해서는 아무도 공신(功臣)으로 책봉되지 않았다. 더 이상 왕위 계승을 위해 공을 세울 필요가 없는 까닭이었다. 외국과의 전쟁이 아닌 한, 공신의 존재 자체는 비정상적인 정치 상황의 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현군(賢君)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병약했던 것이 문제의 단초였다. 문종은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상사(喪事)와 부왕 세종의 병환과 상사 때 지나치게 슬퍼한 것이 병을 낳았다. 문종의 병세가 심해졌을 때 세자 홍위(弘暐)의 나이 겨우 열두살이었는데, 그에 비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서른여섯,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서른다섯으로 강성해 우려를 낳았다. 문종이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난 날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통곡해 목이 쉬니, 소리가 궁정(宮庭)에 진동하여 그치지 않았으며, 거리의 소민(小民)들도 슬퍼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사왕(嗣王)이 나이가 어려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臣民)의 슬퍼함이 세종(世宗) 상사(喪事) 때보다 더했다.

문종실록(文宗實錄) 2년 5월 14일조'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남겼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하면 성인이 될 때까지 대왕대비(大王大妃)나 왕대비(王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어 있었지만, 단종에게는 대비가 없어 문종이 대신들에게 유명(遺命)을 내린 것이었다. 문종이 동생 수양이나 안평대군이 아니라 대신들에게 고명을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문종이 자신의 사후 동생들의 동향을 우려했음을 말해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축수록(逐睡錄)을 인용해 이런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문종이 병이 나자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불러 촛불을 켜고 서로 이야기하다가 밤중이 되자, 무릎 아래에 단종을 앉혀 놓고 손으로 그 등을 만지면서 술을 내려주며 "내가 이 아이를 그대들에게 부탁한다." 고 말했다. 임금이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술잔을 들어 술을 권하니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이 술에 취했다. 문종은 내시에게 명해 입직청(入直廳)에 나란히 눕혀 재웠다. 그날 밤에 큰 눈이 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신하들이 깨어 보니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고 온 몸에는 담비 갖옷이 덮혀 있었다. 문종이 손수 덮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신숙주의 거취는 저 모양이 되고 말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종(文宗)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선왕의 고명으로 대신들이 미성년의 임금을 보필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체제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만 운영되는 한시적인 체제였다. 삼정승(三政丞) 중에서 좌의정 남지(南智)는 병가(病暇) 중이었으므로,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端宗) 초의 정국을 주도했다.

단종은 즉위교서에서 통상적인 사면령 외에, 권세가의 집을 찾아 다니며 자리를 부탁하는 '분경(奔競)'을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어린 국왕의 즉위를 출세의 호기로 삼을 것에 대비한 사전 경고였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수양대군은 분경금지가 자신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동생 안평대군을 끌어들여 의정부(議政府)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은 원래 종친의 정사(政事)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굳이 이에 항의할 이유는 없었다. 수양대군이 반발하자 의정부는 '대군 집은 분경금지의 예외'로 후퇴했고 수양은 이를 이용해 세력을 끌어모았다.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했다. 정상적인 헌정 질서에 따라 즉위한 단종과는 달리, 법대로라면 임금이 될 수 없는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중 한명이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천번 이상 등장하는 한명회(韓明澮)였다. 그는 단종 즉위년 7월, 친구 권남(權藍)에게 수양대군을 만나라고 권고하는 것으로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 때 그의 직위는 궁지기였다. 태종 재위 15년(서기 1415년)에 태어난 그는 낙과(落科)를 거듭하다가 서른여덟살 때인 단종 즉위년에 음서(蔭敍)로 경덕궁(敬德宮) 궁지기가 되었던 것이다. 거듭되는 낙과 끝에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겨우 궁지기가 된 한명회에게 세종(世宗), 문종(文宗)대 같은 정상적인 정치체제는 의미가 없었다. 궁지기 시절 개경의 서울 출신 관료들의 동향계(同鄕契)에 가입하려다 멸시만 받고 거절당한 그에게, 미래는 정상적인 왕조체제가 무너질 때만이 열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한명회로부터 수양대군과 연결시켜 줄 것을 부탁받은 권남은 문종 즉위년 장원급제해 정7품 집현전 박사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낙과를 거듭했었다. 당시 그들은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면서 세상의 형세를 잊자는 망형교(忘形交)를 맺고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던 사이였다. 사실 권남은 전시(殿試)의 대책(對策)에서 4등이었으나, "옛날 신돈(辛旽)이라는 중 하나가 고려의 5백년 왕업을 망쳤는데, 하물며 두 중이겠는가?" 라며 당대의 명승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을 비난한 것이 유학자인 문종의 마음에 들어 장원으로 급제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사관이 "당시의 의논으로 후일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했다." 고 부기할 정도로 문종의 조치는 파격적이었다.

한명회의 부추김을 받은 권남이 수양대군을 찾아가자, 수양대군은 그를 와내(臥內)로 맞아들일 정도로 우대한다. 이 자리에서 권남은, "명공(明公)께서는 대행왕(大行王)의 영제(令弟)요, 세종의 여러 아드님 중에서도 가장 연장이시고 또 어지시니, 만일 종사와 생민(生民)을 염려하지 않으신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부추기면서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추천했다.

한명회가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치 않으며 포부도 작지 않으나, 때를 못 만나 지위가 낮다.'는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예로부터 영웅은 또한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 내가 비록 그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이제 논하는 바를 들으니 참으로 국사(國士)로다. 내가 마땅히 대면하여 상의하겠다."며 받아들인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만남은 왕위에 뜻을 둔 야심가에 권력에 목숨을 건 출세주의자의 만남이었다. 그 둘의 만남은 세종에서 문종 재위기까지 34년간 이어져 온 평화로운 헌정 질서가 혼란 속에 돌입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수양의 모사가 된 한명회는 여러 부류의 인물을 끌어들였다. 신숙주(申叔舟) 등의 조사(朝士)와 양정(楊汀), 유수(柳洙), 유하(柳河) 등의 내금위(內禁衛) 소속 군사들과 강곤(康袞), 홍윤성(洪允成), 임자번(林自蕃), 곽연성(郭連城) 등의 백두(白頭)들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수양대군이 세력 확장에 나서면서 단종은 즉위 초부터 위기에 처했다.

● 수양대군이 북경에 간 이유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단종(端宗) 즉위년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를 자청했다. 그는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런 논리를 폈다.

"고명(誥命)에 사은하는 것은 큰일인데, 황보인(皇甫仁)은 최근 갔다 왔고 김종서(金宗瑞)는 늙었고 남지(南智)는 병이 들었으니, 만약 하관(下官)을 보낸다면 중국의 조정에서 이를 비난할 것이다. 반면 종친이 가면 중국에서 황제의 명을 존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종친이 공(功)이 없이 녹(祿)만 먹고 있으면서 임금을 위해 사신(使臣)이 되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단종실록(端宗實錄) 즉위년 9월 10일조

안평대군이 "국론이 반드시 따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고, 실제 수양대군이 사신으로 가는 것은 정승은 물론 단종도 부마(駙馬)가 가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반대했으나, 수양대군은 강행을 주장했다. 그런데 훗날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는 당시 임금이었던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신하였던 수양대군을 세조(世祖)로 기록하는 특이한 필법의 사서인데, 단종 즉위년 10월 11일 수양의 이복동생 계양군(桂陽君)이 "공(公)이 떠나면 국가가 위험하니, 그 계책을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수양대군은 "부득이하다. 국가의 안위가 이 한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노산군일기는 이 때 매일 밤 대왕대비가 몰래 울었고, 이날 밤 세조도 또한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명나라 사행길은 위험한 길이 아니라 영예스런 길로 대접받았고, 더구나 그 때는 명(明)이 정도전(鄭道傳)의 압송을 요구하던 태조(太祖) 때와는 달리 양국관계가 아주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수양이 맡은 고명사은사는 통상적인 외교사절의 하나일 뿐,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이었다. 사신 중 어느 누구도 수양대군처럼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바란다."라는 식의 과장된 감정을 표출한 경우가 없었다.

노산군일기가 이처럼 과장된 표현으로 일관한 것은, 그만큼 명분이 부족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양대군의 명나라행은 사실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수양은 향후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명나라의 태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명나라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으면 반대 세력이 봉기할 우려가 있었다. 쿠데타를 결심한 수양에게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따라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수양은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단종 즉위년에 명나라 사신 이부낭중(吏部郎中) 진둔(陳鈍) 등을 위해 베푼 하마연(下馬宴)에서 과공(過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진히 대접한 것, 사신들이 떠날 때 모화관(慕華館)까지 나가 전송한 것 등이 그런 예들이다.

한편으로 수양대군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발목을 묶어두기 위해,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과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수종으로 데려가려 했다.

일부 종친들은 이 시점에서 이미 단종 대신 수양대군을 지지하고 나섰다. 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종친들이 전별식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모두 술에 취해 쓰러진 가운데 수양만이 취하지 않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서자 경녕군(敬寧君)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라고 말했는데, 이는 이들 종친이 수양의 야심을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며칠 후 양녕대군은 또 수양대군의 손을 잡고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왕조국가에서 임금 외의 인물에게 '천명'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그 자체로 '역모'나 '모반'의 증거였다. 양녕대군은 어쩌면 단종과 수양의 야심이 충돌해 세종가(世宗家)가 혼란에 빠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효녕대군(孝寧大君)도 마찬가지였다. 백부 양녕과 효녕 중 누구도 수양에게 어린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숙부와 조카 사이에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음 기록은 수양대군이 왜 중국에 갔는지를 스스로 설명하는 글이다.

'세조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장군(大將軍)이다."라고 말하고, 국왕이라 일컬어 공경했다. 경사(京師)에 이르니 조관(朝官)들이 모두 '대왕(大王)'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전하(殿下)'라 칭하기도 하며, 혹은 '권왕(權王)'이라 칭하기도 했다. 세조가 궐문(闕門)에 들어가니, 여덟 마리의 코끼리가 (수양대군을) 보고 일시 놀라 머뭇거리며 두어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세조가 예부직방(禮部直房)에 나아가 하사(下賜)하는 표리(表裏)를 받고자 하니, 낭중(郎中) 웅장(熊壯)이 아래 섬돌에서 읍례(揖禮)로 맞이하여 자리에 앉기를 권하고, 종자(從者)로 하여금 대신 받게 했다. 세조가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일어나서 받으니, 웅장이 놀라서 일어나며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했다.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1년 2월 26일조'

당시 명나라는 4년 전에 몽고족을 친정(親征)하던 황제 영종(英宗)이 오히려 적군의 포로가 되는 바람에 그 위세가 땅에 떨어진 때였다. 영종은 다음 해인 1450년 몽고족이 석방하는 바람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 복위할 명분이 없어 상황(上皇)으로 머물러 있고 대종(代宗)이 그냥 제위에 있다가 1457년에야 다시 복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명(明)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주변 이민족들이 우습게 보고 있을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일개 낭중(郎中)이 주는 것을 일어나 받는 예를 취했으니, 가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조선의 왕자가 이런 예를 취한 것은 명의 입장에서 보면 명나라를 우습게 보는 다른 이민족을 순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수양이 북경에 간 이유는 자신이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킴으로써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사행길의 결과에 만족했다. 명나라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 귀국한 직후인 단종 재위 1년 3월, 수양이 한명회(韓明澮)에게 자신을 위한 계책을 요구하자 한명회는 이런 대책을 제시한다.

"두루 옛날의 일을 보건대, 국가에 어린 임금이 있으면 반드시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았고, 옳지 못한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 여러 사특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붙어서 불우(不虞)한 화가 항상 일어났습니다. 그 때 충의로운 신하가 있어 일어나 반정(反正)을 한 뒤에야 그 어려움이 곧 형통해지니, 이는 천도(天道)의 자연스러움이라고 하겠습니다."

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3월 21일조

수양대군에게 반정을 일으키라는 말이었다. '반정(反正)'이란 '거짓된 사(邪)를 바른 정(正)으로 돌린다.'는 뜻의 성리학 용어지만 그 내용이란 결국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명분이 없었기에 이들은 안평대군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설을 자가발전시켜 반정명분으로 삼았다.

'한명회가 틈을 타서 먼저 양정(楊汀)을 데리고 와서 알현하게 하고, 다음은 유수(柳洙), 그 다음은 유하(柳河)를 데리고 와서 알현하니, 세조가 충심을 기리어 후하게 대우하여 모두 환심을 가졌다. "이용(李瑢)은 부도하여 권간(權姦)들과 결탁했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불안하고 생령(生靈)들이 죽어 가니, 의리상 대난(大難)을 평정하지 않을 수 엇다. 그대들은 힘을 다할 수 있겠느냐?" 하자, 양정 등이 사례하며 말했다. "무부(武夫)는 비천한 사람이지만 공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진퇴에 오직 명을 따르고 두 마음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1년 3월 23일조'

실제 김종서, 황보인 등의 정승들은 수양대군 대신 안평대군을 파트너로 삼아 정국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이 안평을 선택한 이유는 안평은 적어도 왕위를 꿈꾸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변을 결심한 수양대군은 단종의 국혼(國婚) 문제를 제기해 조정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 약 5개월 전인 단종 재위 1년 5월, 양녕대군 등 여러 종친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당시 열세살의 단종은 미혼이었다. 문종 시절 단종은 최종심인 삼간(三揀)을 앞둔 상황에서 문종이 세상을 떠나 자연히 파혼되었는데, 선왕의 국상기간 중에 국혼은 불가하다고 생각한 단종은, "이 일은 불가할 뿐만 아니라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말이다."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수양은 거듭 국혼 문제를 제기해 조야의 시선을 그 쪽으로 돌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한명회, 홍달손 등과 만나 쿠데타를 모의했다.

국혼 주청에 대한 단종의 답변은 단호했다.

"혼인은 인륜의 시초인 부부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니, 시작을 올바르게 하는 도리로서 그 예가 매우 중하다. 나는 또 나이가 어려 대를 놓치지 않은 것인데, 하물려 상중에 감히 대례(大禮)를 행할 수가 있겠는가? 결단코 들어줄 수 없다."

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5월 20일조

수양대군은 단종의 이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다시 종친들을 거느리고 국혼 주청에 나선다. 이렇듯 세번에 걸친 국혼 주청은 자신의 쿠데타 모의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수양의 의도대로, 효과를 거두었다.

● 조선 초기의 물줄기를 바꾼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김종서(金宗瑞) 제거 여부를 집권의 최대 승부처로 보았다. 계유정난이 발생하기 두 달쯤 전인 단종(端宗) 재위 1년 8월의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는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이 정부에서 의논할 일이 있어도 "영의정은 손님이오."라고 사양하면서 김종서에게 모든 일을 미루었기 때문에 홀로 출근할 때가 많았다고 적고 있다. 김종서는 그의 나이 이미 일흔이었지만 세종 시절 북방을 개척하면서 '대호(大虎)'라는 명성을 얻었고, 여진족과 몽고족의 준동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도체찰사를 맡아 북방으로 달려갔던 문무겸전의 인사였다.

객관적인 서술이라 평가받고 있는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계유년(癸酉年)에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大君)들은 장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 하고 의심했다. 황보인, 김종서, 정분(鄭苯)이 삼정승이 되었는데, 종서는 지략이 많아 당시 사람들이 대호(大虎)라고 지목하니, 세조가 그를 먼저 제거하려 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수양대군은 황보인과 김종서 등 재상들이 10월 12일에서 22일 사이에 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황보인의 가동(家童) 중에 권남의 종 계수(桂壽)와 함께 갖바치를 동업하는 자가 있다. 그가 계수에게 "네가 나라 일을 아느냐?"라고 물으니, 계수가 "내가 어찌 알겠느냐?"고 대답하자, "우리 주인 영상(領相)이 김 정승 등 여러 재상과 모여서 의논하여 장차 임금을 폐하고 안평대군을 세워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는 10월 12일과 22일로 기한을 정했다."라고 말했다. (중략) 권남이 이를 듣고 세조에게 "간당(姦黨)의 음모를 이미 다 알았으니 일이 이미 급박합니다. 어찌하여 손을 묶고 죽임을 당해 종사를 저버리겠습니까? 원컨대 공은 큰 계책을 빨리 결정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1년 9월 25일조'

온 집안이 도륙날 지도 모르는 대사를 일개 가동이 상세히 알고 있다는 것도 어색하지만 이런 결정적 증거를 알려준 그 가동의 이름도 적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는 역시 수양대군 쪽의 자가발전으로 볼 수 있다. 수양은 단종 재위 1년 9월 말 봉장(封章)을 올려 네가지 사항을 진달하는데, 첫째 바른 사람을 가까이 할 것, 둘째 백성의 힘을 아낄 것, 셋째 군사를 사랑할 것, 넷째 도적을 그치게 할 것 등이었다. 그리 비밀스럽지도 긴박하지도 않은 내용을 봉장으로 올린 의중에는 단종과 김종서 등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봉장을 올린 직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남, 홍달손, 양정 등을 불러 단종 재위 1년 10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10월 10일 수양대군과 한명회, 권남, 홍달손 등은 그간 교결(交結)한 무사들을 활쏘기 시합을 벌인다는 명분으로 불러모았다. 그러나 믿었던 무사 곽연성(郭連城)이 상중(喪中)임을 핑계로 동조하지 않는 등 그 반응은 차가웠다. 수양은 활쏘기를 빙자해 무사들을 후원 송정(松亭)으로 모이게 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정사와 권세를 희롱하면서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하게 이용(李瑢)에게 몰래 붙어서 장차 불궤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은 어떠한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1년 10월 10일조'

그러나 수양의 이 연설은 무사들의 반발을 샀다. 심지어 "마땅히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사까지 있었다. 이들은 수양의 '대의(大義)' 주장을 사실상의 역모라고 생각한 것이다. "혹은 북문을 따라 도망하여 나가는 자도 있었다."는 이 날의 노산군일기 기록은 이들 쿠데타의 명분 없음을 잘 보여준다. 수양은 다급하게 한명회를 불러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상의했는데, 한명회는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며 결행을 주장했고, 이에 따라 수양대군은 송석손(宋碩孫) 등 말리는 무사들을 발로 차며 중문을 나섰다.

양정(楊汀)과 가동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간 수양은 임어을운의 품 속에 김종서에게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잇다면서 임어을운을 가까이 가게 한 후,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려치게 했다. 아들 김승규가 김종서 위에 엎드려 보호하려 하자 양정이 칼을 뽑아 김승규를 내리쳤다. 조선 전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시작이었다.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대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창덕궁이 완성되기 전 단종이 임시로 기거하던 시좌소(時坐所)로 가서 환관 전균(田畇)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하여 널리 당원(黨援)을 심어 놓고 지방과 연락해, 종사의 위태로운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 지금 부득이 김종서 부자를 미리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한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1년 10월 10일조'

김종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은 수양의 손을 잡고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빌었다. 기선을 잡은 수양 측은 왕명을 빙자해 한밤중에 여러 대신들을 급히 불렀고,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李穰),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대궐로 들어오다가 수양의 근신들에게 살해당했다. 또한 수양대군은 역사(力士)를 윤처공(尹處恭), 이명민(李命敏) 조번(趙藩), 원구(元坵) 등의 집으로 보내 이들을 격살하도록 했고, 삼군진무(三軍鎭憮) 최사기(崔賜起)를 보내 환관 김연(金衍)을 그의 집에서 죽였으며, 역시 삼군진무 서조(徐遭)를 보내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고 있던 민신(閔伸)을 비석소(碑石所)에서 참살하게 했다.

조선 개국 이래 초유의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임어을운(林於乙云)의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 김승벽의 처가에 은거했다. 그곳에서 원구를 보내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성문지기로 하여금 단종에게 이 사실을 고하게 했으나, 양정과 의금부진무 이흥상(李興商)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계유정난은 성공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상적인 헌정 질서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수양대군 측에서 기록한 노산군일기는 "이 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해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들은 수양 측의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움에 휩싸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자 수양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무엇 있는가? 조용히 진압하라."고 명해 진정시켰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실권을 잃은 단종(端宗)은 다음 날 날이 밝자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서운관사(領經筵書雲觀事),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라는 긴 관직을 제수했다. 수양 한 사람이 영의정과 영경연 그리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모두 장악한 것이다. 서사권이 있는 의정부(議政府)와 인사권이 있는 이조, 그리고 병권이 있는 병조를 모두 장악했으니, '군왕(君王)'이란 말만 붙이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임금은 수양대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양 측의 대규모 살육전(殺戮戰)이 전개되었다. 김종서(金宗瑞) 부자와 황보인(皇甫仁), 이양(李穰), 조극관(趙克寬), 민신(閔伸), 윤처공(尹處恭), 조번(趙藩), 원구(元坵) 등의 머리는 저자에 효수(梟首)되었고, 철퇴를 맞고 도망간 왕족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은 홍달손(洪達孫)이 보낸 호군 박제함(朴悌緘)에게 붙잡혀 죽었다. 지정(地淨), 정분(鄭奔), 조수량(趙遂良), 이석정(李石貞), 안완경(安完慶) 등이 오지로 귀양을 갔으며, 한숭(韓崧)과 황귀존(黃貴存)은 변방으로 끌려간 후 노비가 되었다. 허후(許珝)는 김종서 등의 효수에 반대했다가 귀양에 처해진 후 사형당했다.

계유정난 발생 후 약 한달 후인 단종 재위 원년 11월 11일, 가족들에게 연좌형(緣坐刑)이 내려졌다.

'황보인, 김종서, 이양, 민신, 윤처공, 이명민, 이현로, 김승규(金承珪), 이경유, 이징옥(李澄玉), 조번, 원구, 김대정(金大丁), 하석(河石) 등의 친자(親子)로서 16세 이상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15세 이하는 어미를 따라 자라게 해 성년이 된 뒤에 거제(巨濟), 제주(濟州), 남해(南海), 진도(珍島)의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켜라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원년 11월 11일조'

뿐만 아니라 유배형에 처해졌던 조수량, 안완경, 지정, 이보인(李保仁), 이의산(李義山), 허후, 김정(金晶), 김말생(金末牲) 등에게도 교형(絞刑)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들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수괴로 지목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살려둘 수 없었고,. 결국 그는 교형에 처해졌다. 또한 안평대군의 첩과 그 아들 이우직의 아내를 변방의 관비(官婢)로 삼았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변란을 일으킨 약 1년 후인 단종 재위 2년 8월 15일 추석날,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과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에서 추석제를 지낸 후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亭所)에 들러 살아 남은 이들의 사형을 명한다. 단종의 명령을 빙자했지만 단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므로 사실상 수양이 내린 명이었다.

"이용(李瑢)의 아들 이우직(李友直)과 황보석(皇甫錫)의 아들 황보가마와 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金木臺),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과 김수동(金壽同), 이승윤(李承胤)의 아들 이계조(李繼祖)와 이소조(李紹祖), 장군(將軍)의 종제(從弟) 이승로(李承老), 민신(閔伸)의 아들 민보석(閔甫釋)과 민석이(閔石伊), 윤처동의 아들 윤개동(尹介同)과 윤효동(尹孝同),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李乾金), 이건옥(李乾玉), 이건철(李乾鐵), 이경유의 아들 이물금(李勿金), 조번(趙藩)의 아들 조계동(趙季同), 이징옥의 아들 이성동(李成同), 이보인(李保仁)의 아들 이해(李諧)와 이심(李諶), 사문(沙門), 주령(住令), 이모(李謨), 이의산(李義山)의 아들 이우경(李友敬), 김말생의 아들 김산호(金珊瑚), 김정(金晶)의 아들 김개질동(金介叱同), 김상충(金尙忠)의 아들 김득천(金得千)과 김복천(金卜千), 황귀존의 아들 황경손(黃敬孫), 황장손(黃長孫), 황의헌(黃義軒)의 아들 황석동(黃石同), 정효전(鄭孝全)의 아들 정원석(鄭元碩), 그리고 정분(鄭奔), 이석정(李石貞), 조완규(趙完珪), 조순생(趙順生), 정효강(鄭孝康), 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해 처치하라. 이제부터 간당(姦黨)의 근본이 영원히 근절되었으니, 만약 또 다시 역당(逆黨)의 옛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 마땅히 용서하지 않겠다. 이것을 중외에 효유(曉諭)하라."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2년 8월 15일조

'법에 의한 처치'란 사형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들 40여명은 가장(家長)이 선왕의 유명(遺命)을 지켰다는 이유로 억울한 원혼이 된 것이다. 조선 개국 이래 이런 정치적 보복은 전례가 없었다.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경우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을 수군(水軍)으로 삼았다가 재위 16년에 직첩을 돌려주고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삼았으며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승진시켰었다. 태종은 정권을 잡기 위해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했지만 그의 가족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기는커녕 벼슬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선왕 문종의 유명을 지키려 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정치적 보복을 가했다.

● 부패적인 논공행상(論功行賞)

이런 토대 위에서 새로이 공신이 탄생했다. 43명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책봉된 것이다. 태종 재위 원년(서기 1401년)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후 42년만의 대규모 공신책봉이었다. 수양대군과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한명회, 권남 등 14명이 1등 공신, 신숙주(申叔舟), 홍윤성, 양정(楊汀), 곽연성(郭連城), 전균 등 11명이 2등 공신, 이홍상, 임자번, 한명진(韓明鎭), 강곤(康崑) 등 20명이 3등 공신이었다. 당연히 막대한 부상(副賞)이 뒤따랐다. 주동자 수양대군에게는 1천호의 식읍(食邑)과 5백호의 식실봉(食實封), 전(田) 5백결이 주어졌다. 여기에 3백구의 노비와 해마다 별봉(別俸) 6백석이 따로 주어졌다. 그리고 임금이 타는 내구마(內廐馬)가 4필이나 주어졌으며, 기타 금은보화가 뒤따랐다. 한 달 뒤에는 이것도 부족하다 하여 노비 3백구가 더 주어졌다.

다른 공신들에게도 이보다는 적지만 많은 포상이 내려졌다. 정난 1등 공신에게는 전지(田地)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丘史) 7명, 반당(半螳) 10인을 주게 했으며, 그 부모와 처, 그리고 직계자손은 자급을 3등급 올려주었다. 2등 공신에게는 전지 150결, 노비 15구, 구사 5명, 반당 8인을 주었으며, 부모와 처, 직계자손의 자급을 2등급 올려주었고, 3등 공신에게는 전지 100결, 노비 7구, 구사 3명, 반당 6인을 주었으며, 부모와 처 그리고 직계자손의 자급을 1등급 올렸다. 공신의 자손들은 죄를 범해도 영원히 용서토록 하는 특혜 또한 주어졌다.

그러나 명분 없는 이 쿠데타에 대한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대한 반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함길도절제사 이징옥(李澄玉)이 김종서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問)을 보냈다. 이에 이징옥은 박호문을 죽인 후 종성으로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하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했다. 그는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수양대군을 타도하려다가 종성판관 정종(鄭種) 등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변방의 장수를 반란의 길로 내몬 이 사건은 명분 없는 쿠데타가 낳은 불필요한 진통이었다.

이런 정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이 없을 리 없었다. 이징옥의 뒤를 이어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의 넷째 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반발했다. 계유정난에 불만을 품은 금성대군이 수양대군의 전횡을 비판하자 수양은 단종 재위 3년 초 사돈인 우의정 한확(韓確), 좌참찬 강맹경(姜孟卿), 병조판서 이계전(李季甸) 등과 함께 금성대군의 고신(告身)을 빼앗을 것을 단종에게 요구했다. 금성이 집에서 세종의 서자 화의군(和義君) 영(瓔), 최영손(崔泳孫) 등과 더불어 활을 쏘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따라 그 해 윤6월 금성대군은 삭녕으로 유배되었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와 세종의 서자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등도 금성과 결탁했다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문종의 큰달인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사위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도 영월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이는 결국 단종(端宗)으로 하여금 양위하라는 압박이었다. 단종은 금성대군의 귀양을 추인한 그 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노라고 한확 등에게 전지하게 했다. 이방원(李芳遠)은 일단 정종(定宗)을 추대하고 왕세제(王世弟)가 된 후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그 때까지 수양은 왕세자(王世子)도 왕세제도 아닌 신하에 불과했다. 역사상 왕세숙(王世叔)은 없어던 것이다. 수양은 이 전지를 몇번의 형식적인 사양 끝에 당일로 수락했다.

'노산군(魯山君)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들어가고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했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액(扶腋)해 나가게 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윤6월 11일조'

수양대군은 당일로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즉위했다. 수양대군은 "대위(大位)를 나에게 주시는 것을 굳게 사양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또 종친과 대신들도 모두 종사의 대계로 보아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고 하는지라, 억지로 여정(與情)을 쫓아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으로 받들게 되었다."라며 왕위 찬탈을 합리화하였다.

국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임금이 되었으니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른 공신이 없을 리 없었다. 세조 재위 1년 책봉된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바로 그들이다. 1등 7명, 2등 12명, 3등 27명 등 모두 46명이었다.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한확(韓確), 윤사로(尹師路) 등이 1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붙인 이 처사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문종으로부터 단종의 미래를 부탁받은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세칭 사육신사건(死六臣事件)으로 불리는 상왕복위기도사건(上王復位企圖事件)이 일어나는 것이다. 상왕복위기도사건의 주모자 성삼문(成三問)은 정난공신 3등과 좌익공신 3등을 책봉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지 않고 훗날을 기약했다. 그는 도총관(都摠管)인 부친 성승(成勝)이 명나라 사신 환영연에 별운검(別雲劍)이 된 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고 단종 복위계획을 세웠다. 창덕궁(昌德宮) 광연전(廣延殿)에서 열리는 명나라 사신 환영연을 이용해 세조(世祖)와 세자를 벤 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또 다른 별운검 유응부(柳應孚)와 공조첨의 박쟁(朴錚)도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뜻을 같이했다. 유응부는 성승과 박쟁에게 "임금과 세자는 내가 벨 테니, 나머지는 그대들이 맡으시오."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으나, 세조의 모사 한명회가 행사에 별운검을 들이지 않기로 함으로써 무산되었다. 당황한 좌부승지 성삼문이 거듭 별운검을 청했으나 소용없었다.

계획이 무산되자 상왕 복위를 꾀하던 신하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성승과 유응부 같은 무장들은 결행을 주장한 반면, 성삼문과 박팽년(朴彭年) 같은 문관들은 훗날을 기약하자고 말렸다. 성승과 유응부 등의 결행론은 뒷날 다시 기회를 잡자는 문관들의 연기론(延期論)에 밀려 연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 출신의 동지였던 성균관 사예 김질(金瓆)이 장인인 우찬성 정창손(鄭昌孫)에게 상왕 복위계획을 털어놓는 바람에 계획이 탄로났다. 세조가 성삼문을 꿇어앉힌 후 김질과 무슨 일을 논의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동안 있디가' 김질과의 면질(面質)을 요구했다. 그리고 김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말하지 말라"고 막으며 혐의를 시인했다. 세조가 곤장을 치며 동조자를 대라고 다그치자, 박팽년,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 박쟁 등의 이름이 나왔다. 세조는 단종에게 동부승지 윤자운(尹子雲)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두려움에 휩싸인 단종은 상왕궁의 술을 꺼내 윤자운에게 대접했다.

세조(世祖)는 다음 날 광주목사에게 급히 치서(馳書)를 보내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유(李愉)의 배소(配所)에 네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하라."고 명했다.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및 정종(鄭悰)의 유배지에도 같은 글을 보내 엄히 감시하게 했다.

조정은 곧 거대한 고문장으로 변했고, 수많은 연루자가 죽어갔다. 이개, 하위지, 성삼문, 박중림(朴仲林), 김문기(金文起), 유응부, 박쟁, 송석동(宋石同), 권자신(權自愼), 윤영손(尹令孫), 아가지, 불덕 등은 모두 수레에 묶여 사지가 찢겨 죽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죽었으며, 자식들은 교형(絞刑)을 당해 죽고 어미와 달, 처첩,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 사건을 적발해 역모로 처리하고도 내외에 공표하지 못했다. 사건 발각 나흘 후에도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한 내용은 정통성 없는 세조 정권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근일에 이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유응부, 박쟁, 송석동, 최득지(崔得池), 최치지(崔致池), 윤영손(尹令孫),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등이 몰래 반역(反逆)을 꾀했으나, 다행히도 천지신명과 종묘사직의 신령에 힘입어 흉포한 역모가 드러나서 그 죄상을 다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소민(小民)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경 등은 소민들을 경동하지 않게 하라

세조실록(世祖實錄) 2년 6월 6일조'

이 사건이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지면 동조하는 소요가 잇따를 것을 두려워해야 할 정도였으니, 세조 정권이 얼마나 명분 없는 정권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며칠 후에는 용안(龍眼)이라는 무녀(巫女)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금년에 상왕(上王)께서 복위(復位)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점을 친 사실이 발각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이 잇따르자 민심이 뒤숭숭할 것은 당연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다시 논공행상을 베풀어 좌익 3등 공신 정창손을 2등으로 올리고 김징을 새로 좌익공신 3등에 포함사켰다. 그리고 사형당한 상왕복위기도사건 관련자의 부녀자들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세조는 상왕 복위기도사건이 발생한 석달 후인 1456년 9월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그 부녀자들을 대신들의 노리개로 나누어 주었고, 이듬해 3월 상왕복위기도사건 관련자들과 그 부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도 빼앗아 자신의 즉위에 공훈이 컸던 대신들에게 지급하기도 했다.

사건의 여파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상왕 단종과 귀양간 금성대군, 화의군 등 세조의 형제들에까지 미쳤다.

상왕복위기도사건(上王復位企圖事件)이 발생하자 의금부(義禁府)는 금성대군과 화의군, 한남군 등 귀양 가 있던 인물들을 분산해 안치시키자고 청했고, 이에 따라 금성대군은 경상도 순흥, 한남군은 함양, 화의군은 전라도 금산, 영풍군은 임실, 문종의 부마 정종은 광주에 안치하고 난간과 담장을 높이 쌓아 외간 사람들과의 교통을 금지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상왕복위기도사건이 발생한 지 약 1년 후인 세조 재위 3년 6월 말경, 경상도 안동의 이동(李同)이라는 관노의 고변에 따라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단종 또한 상왕복위기도사건의 책임을 물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귀양 보냈다. 한 나라의 지존(至尊)에서 유배객으로 전락한 단종은 영월에서 '원통한 새 한마리 궁에서 좇겨난 후, 외로운 몸 그림자 한자락 푸른 산 해매네.'라는 시를 지어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하늘은 귀 먹어서 이 하소연 못 듣는데, 어저다 서러운 이 몸은 귀만 홀로 밝았는고.'라는 자신의 시구대로 1457년 10월 21일 단종은 천명(天命)을 보존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이 열일곱, 재위에 있은 지 3년 2개월만이었다.

단종을 죽이는 것이 후세 역사에 불충으로 비난받을 것은 수양 측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이 단종의 자살설을 주장한 것은 훗날의 비난이 두려워 행한 역사왜곡으로, 단종이 장인 송현수(宋玹壽)가 교사(絞死)되고 자신을 동정하던 화의군 등에게 죄가 더해지자,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종(中宗)대의 사림파 문관 이자(李仔)는 음애일기(陰哀日記)에서 이 기록을 격렬히 비난한다.

'실록에서는 "노산이 영월에 있다가 금성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진(自盡)했다."고 하는데, 이는 단지 당시의 여우나 쥐새 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니, 대개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

음애일기(陰哀日記)'

연산군(燕山君) 재위기에 쓰여진 음애일기가 당대에 편찬되지 못하고 조선 후기 영조(英祖)대에 가서야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세조실록(世祖實錄)의 단종 사망 기록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병자록(丙子錄)은 단종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니, 나장(羅將)이 늦었다며 발을 굴렀다. 왕방연이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리고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대답을 못했다. 단종을 모시고 있던 통인(通引) 하나가 활시위에 긴 노끈을 이어 단종이 앉은 뒤의 창구멍으로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했다. 시녀와 종인(從人)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 뜬 시체가 강에 가득했으며, 천둥비[雷雨]가 크게 내려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구별할 수 없었고, 강렬한 바람이 나무를 뽑고 검은 안개가 공중을 꽉 메워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병자록(丙子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단종(端宗)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사육신 중 한명인 이개(李塏)는 형장으로 끌려가며 '새벽도 덜 깼는데 문 밖에 나서니 현릉(顯陵) 송백(松柏)만이 꿈 속에도 푸르구나'라는 시를 지었다. 신하들이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충성을 확신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헌정체제가 붕괴되자 신하들은 충역(忠逆)논쟁이라는 비생산적인 시비에 휘말려야 했고, 국가와 민생 발전에 사용할 정력을 충역 시비에 쏟아야 했다.

계유정난으로 조선의 정상적인 왕조체제는 붕괴되었고, 국왕과 동지인 공신들은 훈구파(勳舊派)가 되어 나라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독점했다. 법 위에 존재하는 훈구파들은 권력의 법칙에 따라 부패했으며 이런 훈구파들의 전횡에 반대하는 사림파(士林派)가 형성되었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화(士禍)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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