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의 사망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이어졌고, 이는 삼정(三政)의 문란 등 국가체제의 파탄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과감한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힌 대개혁을 강행했고, 호포제(戶布制), 사창제(社倉制) 등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호포제와 서원(書院) 철폐로 양반 사대부의 지지를 상실한 데 이어, 무리한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일반 양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하면서 위기에 몰렸다. 대원군은 개혁정치의 목적을 왕권 강화를 통한 성리학사회의 재건에 둠으로써 세계 정세를 거슬렀다.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의 승리를 자주적 개방으로 연결시키지 못한 폐쇄적 정책은, 결국 조선을 세계의 경쟁 대열에서 낙후시키고 말았다.
● 신서파의 시련, 신유사옥(辛酉邪獄)
정조(正祖)의 사망은 신서파(信西派)에게 거센 시련이 밀어닥칠 것임을 예고했다. 열살의 어린 순조(純組)가 즉위하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아버지인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사주를 받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으로 모는 데 일조했으며, 그 동생 김귀주(金龜柱)는 영조 때에 세손의 지위를 흔들려 했다는 죄목으로 정조 때에 귀양 가서 죽었다. 이런 연유로 정순왕후는 정조의 치세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순조 재위 1년(서기 1801년) 정월 10일, 천주교(天主敎)를 반역죄로 다스리라는 사학(邪學) 엄금교서를 내리는 것으로 세계 카톨릭교회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신유년(辛酉年)의 천주교 대박해의 문을 열었다.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거라고 하셨지만 지금 듣기에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심해 간다고 한다. 지금 이른바 사학이란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스스로 오랑캐와 짐승으로 돌아가게 한다.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어 그릇되어 가니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아서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략)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릴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맡은 지방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밝게 실시하여 만약 그 통(統) 내에서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로 하여금 관가에 고해 죄를 다스려 사학을 뿌리채 뽑아 버려 남은 씨가 없도록 하라."
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조
정순왕후의 교서가 '정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는 정조의 말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된 까닭은, 그녀가 친정 노론 벽파의 시각에 따라 정조의 치세를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개입시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시키려던 황사영(黃嗣永)은 유명한 백서(白書)에서 정순왕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선왕(先王)이 돌아가시자 뒤를 이은 임금이 어려서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들었다. 대왕대비는 곧 선왕의 계조모(繼祖母)니, 본래 벽파(僻派)의 사람이다. 그 본가는 일찍이 선왕이 없애버린 바 되었으므로 여러 해 동안 한(恨)을 품고 있었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못했다. 뜻밖에도 정치에 간섭할 기회를 얻게 되자 벽파를 끼고 해독을 마음대로 끼쳤다.
황사영(黃嗣永) 백서(白書)'
백서가 암시하는 것처럼, 신유사옥(辛酉邪獄)은 정순왕후가 성리학을 정학으로 신봉하고 천주교를 사학으로 여겼기 때문에 발생했다기보다는 황사영이 백서에서 "(조선은) 당파 싸움이 매우 성하기 때문에 천주교를 빙자해 남을 몰아치는 재료로 삼는 까닭"이라고 말한 대로, 천주교를 빙자해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약종(丁若鍾), 이승훈(李承薰), 최창현(崔昌顯), 황사영 등 배교를 거부한 이들뿐만 아니라 이미 배교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협조했던 이가환(李家煥)이 장사(杖死)하고 정약용(丁若鏞) 또한 유배에 처해졌다. 이는 신유사옥이 사교 탄압을 빙자한 정적 숙청에 다름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던 일반 백성들은 더 많은 박해를 입었다. 한 집이라고 천주교도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화(禍)를 입게 했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국가로부터 수많은 의무만 질 뿐 아무런 권리가 없었던 수만여 백성들을 불행에 빠뜨렸다. 신유사옥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 및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姜完淑) 등의 양반들과, 정조(正祖)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부인 송씨(宋氏)와 그 며느리 신씨(申氏) 등의 왕족들을 포함해 약 3백여명을 처형하는 참극을 연출했다.
순조(純組) 재위 4년(서기 1804년)에 정순왕후의 철렴(撤簾)으로 순조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연결되었다. 세도정치는 당초 '세도(世道)'라고 불렸으나 차차 '세도(勢道)' 또는 '세도(勢塗)'로도 불렸는데, 그 시초는 정조 재위 초의 홍국영(洪國榮)이었다. 정조가 아직 세손(世孫)이었을 당시 벽파의 공세에 맞서 정조를 지킨 공이 있는데다가, 즉위 후에도 노론의 암살을 우려한 정조가 홍국영에게 도승지와 금위대장(禁衛大將)까지 겸하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누이동생을 정조에게 바쳐 원빈(元嬪)으로 봉하게 함으로써 척족세도(戚族勢道)의 양태까지 보였으나, 정조의 후사 문제에 개입하다가 1780년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말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는 기간도 짧은데다가 정조가 현명한 임금이었으므로 그리 큰 폐해는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순조 때 시작된 김조순(金祖淳)의 세도정치는 조선 정치에 기나긴 어둠을 드리웠다. 김조순은 노론 시파였고 그래서 정조는 그녀의 딸을 세자빈 초간택과 재간택에 통과시켰으나, 삼간택을 앞두고 사망했다. 김조순은 경종(景宗) 재위 1년에 김일경(金一鏡)의 신축소(辛丑疏)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6촌 김관주(金觀柱)에게 세자빈 간택 방해공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 순조 재위 2년 10월에 자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 데 성공했으니, 그녀가 바로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다.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듬해(서기 1805년)에 사망함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형식상의 친정일 뿐, 실제로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이 부상했다. 그는 정순왕후의 6촌인 김관주를 왕비의 삼간택을 방해한 죄와 정조를 배신한 죄로 귀양 보내고, 이미 죽은 김대비의 오라비 김귀주 또한 정조를 해치려 했다는 죄로 역률로 다스렸다. 이로써 같은 외척 정순왕후 일가를 제거한 김조순은 국정을 장악했다. 이른바 안동(安東) 김씨(金氏) 세도정치(勢道政治)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노론 벽파가 축출됨으로써 생긴 빈 공간은 김이익(金履翼), 김이도(金履度), 김달순(金達淳) 등 안김(安金) 일문이 차지했다.
세도정치 아래 국왕은 명목뿐이었다. 이 무렵부터 민란(民亂)이 시작되는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정조 때까지는 마지막 희망을 국왕에게 걸었다. 격쟁(擊錚)으로 지방관의 잘못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로 국왕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백성들은 자구(自救) 수단으로 민란을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순조 재위 11년(서기 1811년)에 발생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은 조선 후기 사회의 모든 모순이 집약된 것이었다.
수차례 낙과(落科)했던 홍경래가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부각시킨 점이나, 역노(驛奴) 출신으로 대청(對淸)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嘉山) 부호 이희저(李禧著)가 거사 자금을 제공한 사실 등은 지역차별과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봉기의 주력군이 광산 노동자, 빈민, 유민이라는 점은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일부 농민들이 부를 축적한 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농토에서 유리되어 떠돌아다니는 사회 현상의 반영이었다.
정치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세도정치로 퇴행하자, 직접 조선왕조를 타도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 홍경래의 반란이었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라 자칭한 홍경래는 격문에서 '정감록(鄭鑑錄)'의 도참을 토대로 정씨(鄭氏) 진인(眞人)의 추대를 주장하면서 안김 세도정권의 타도를 주창했다. 그들이 삽시간에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개 지역을 점령한 것은 조선왕조의 정상적인 체계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홍경래는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 등의 주장을 내세웠을 뿐, 당시 사회적 모순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소농, 빈농, 유민, 임노동자층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할 새로운 이념체계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봉기가 결국 실패하고 마는 데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은 그러나 조선왕조 타도를 내걸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역모 사건들과는 다른 양상이었고, 그만큼 집권층의 근본적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조순은 안김 세도정치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자 다른 시파가문들을 끌어들여 정권의 외연을 넓히려 했다. 순조(純組) 재위 19년(서기 1819년)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으로 풍양(豊壤) 조씨(趙氏) 가문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간택하는 것이다. 이로써 외척 반열에 합류한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와 권력을 다투며 세도정치의 한 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효명세자가 1827년부터 세자 대리청정을 하게 됨에 따라 그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대거 발탁되어 안동 김씨와 경쟁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830년에 사망하고 말았는데, 이에 따라 풍양 조씨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순조가 재위 34년만에 사망하고 그 뒤를 효명세자의 아들이 이어 헌종(憲宗)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일곱살의 어린 헌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된 것은 풍양 조씨 효유왕후(孝裕王后)가 아닌, 왕실의 가장 웃어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였다. 게다가 헌종 재위 3년(서기 1837년)에는 김조근(金祖根)의 딸이 왕비에 책봉됨으로써 안동 김씨는 중첩된 외척관계를 맺으며 장기 집권의 기틀을 쌓을 수 있었다.
풍양 조씨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과거 공서파가 그랬던 것처럼 천주교를 이용했다. 순조 재위 31년(서기 1831년), 프랑스의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는 중국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분립시키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한 데 이어 헌종 재위 2년(서기 1836년)에는 프랑스의 성직자 모방(Maubant, P.P.) 신부와 샤스탕(cHASTAN j.h.), 앵베르(Imbert, L.M.J.) 등을 밀입국시켜 교세(敎勢)를 크게 확장했다. 안동 김씨는 노론 시파답게 천주교에 관대한 자세를 취했고, 풍양 조씨는 이를 공격해 정권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헌종 재위 5년(서기 1839년) 3월,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 조용현(趙溶鉉) 등은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을 내려 기해사옥(己亥邪獄)의 문을 열었다. 이 때에 모방, 샤스탕, 앵베르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유진길(劉進吉) 등 7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었다. 조인영은 자신이 써서 올린 척사윤음(斥邪淪音)을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반포하면서 천주교 박해의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헌종 재위 7년(서기 1841년)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헌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외척 풍양 조씨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헌종 재위 12년(서기 1846년) 조만영이 죽으면서 그 세력이 약화되고 다시 안동 김씨가 세력을 확보했다.
외척 사이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계속되면서 정상적인 국가체제는 붕괴해 갔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해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헌종(憲宗) 재위 10년(서기 1844년)에는 중인 출신인 의원 민진용(閔晉鏞)의 모반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왕권의 권위는 실추되고 말았다. 이 모반사건으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李光)의 장남 회평군(懷平君) 이원경(李元慶)이 사사되었다.
1849년 헌종이 재위 15년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인물인 뜻밖에도 이광의 셋째 아들 원범(元範)으로,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哲宗)이었다. 역모에 연류되어 사사된 화평군이 동생을 임금으로 책봉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정치가 국왕의 존재를 무시하고 명목만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철종을 추대한 세력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였는데, 그의 즉위는 순원왕후의 또 한번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다. 철종 재위 2년(서기 1851년)에는 대왕대비의 近親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어 안김의 세도정치는 절정에 달했다.
세도정치는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져, 철종 재위 13년(서기 1862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하삼도 대부분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바로 임술민란(壬戌民亂)이다. 임술민란은 같은 해 경상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탐학에 항거한 진주민란이 도화선이 되었다. 진주민란에는 수만명의 농민이 가담했다. 농민들은 백낙신을 감금하고 권준범(權準範), 김희순(金希淳) 등의 관리들과 향리 4명을 타살하는 한편, 부호들을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농민들은 효수 10명, 귀양 20명 등의 형을 받았으나, 관리 측도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등 처벌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부정의 정도가 심각했다. 철종은 같은 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세도정치 아래 국왕의 권력으로는 세도가의 이익에 손을 대는 그런 일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임술민란 이듬해인 철종(哲宗) 재위 14년(서기 1863년) 12월에 철종이 사망했고, 대왕대비 조씨의 전교로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고종(高宗)이다. 고종의 즉위는 파란의 대원군시대의 시작이었다.
황사영(黃嗣永)의 백서(白書)
천주교도 황사영이 1801년의 신유사옥(辛酉邪獄) 내용과 그 대응책을 써 북경의 구베아(Gouvea, A. de) 주교에게 보내려던 편지다. 백서(白書)는 흰 비단에 모두 1만 3천 311자의 먹글씨로 적었는데 크게 세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1785년 이후의 조선 천주교 상황과 신유사옥의 과정,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고, 둘째는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서양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셋째는 청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통해 조선 반도를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키거나, 서양 열강의 무력(武力) 사용으로 천주교를 공인시켜야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황사영 등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하고, 백서의 내용 중 서양의 군대 파견을 요청한 부분만 간추린 축소본과 토사주문(討邪奏文)을, 동지사 편에 청나라 조정에 전달해 천주교 탄압의 구실로 삼았다. 백서 원본은 압수 이후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옛 문서를 파기할 당시 교구장이던 뮈텔(Mutel) 주교가 입수했다. 1925년 로마 교황에게 전달되었으며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과 개혁정책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은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이지만,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은신군(恩信君)의 양자로 입적됨으로써 족보상으로는 사도세자의 가계(家系)가 되었다.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진 그는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 종친들이 형식적으로 맡는 한직을 지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는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렸던 천의현(千宜鉉), 하청일(河淸一), 장순규(張淳奎), 안석주(安石柱) 등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지내고, 세도가들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하응은 이런 한편 안동 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익종비(翼宗妃) 조씨(趙氏)의 조카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해 조대비(趙大妃)에게 접근해 반(反) 안동(安東) 김씨(金氏)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1863년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하세(下世)했을 때 준비된 안이 없었던 안동 김씨 세력은 우왕좌왕했으나, 미리 흥선군과 결탁했던 조대비는 궁궐 웃어른의 지위를 이용해 전격적으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을 철종의 후사로 발표함으로써 대역적극을 연출했다. 장안의 파락호로 알려졌던 이하응은 이로써 일약 임금의 생부인 대원군(大院君)으로 승격되었다.
조대비와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력을 꺾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으나 그 최종 목적은 달랐다. 조대비의 목적은 대원군을 이용해 안동 김씨 문중에 눌린 풍양(豊壤) 조씨(趙氏) 일문을 부흥시키는 것이었고, 대원군의 목적은 안동 김씨는 물론 풍양 조씨를 포함한 외척세력에 억눌려 극도로 위축된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위 당시 명복은 12세였으므로 조대비가 섭정했고, 흥선대원군이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권력을 장악했다. 신하의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비신지례(非臣之禮)'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절대권력을 장악한 대원군은 재야에 묻혀 있을 때 수없이 구상했던 개혁적인 이념과 정책들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외척들에 농락당해 실추된 왕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가로부터 마음이 떠난 민심(民心)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대원군의 집권은 이미 수명을 다한 조선왕조가 다시 소생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마지막 승부수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대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자본주의 열강들의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 조선의 상국이었던 청(淸)은 1841년, 이른바 아편전쟁 끝에 막대한 배상금과 함게 홍콩 할양, 광동(廣東), 상해(上海) 등 5개 항의 개항 및 영사재판권과 관세협정권 등을 규정하는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1860년에는 프랑스, 영국 연합군의 천진 함락과 북경 진격에 굴복해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체결하고, 구룡(九龍)을 영국에 할양하는 등 서구 열강들에 완패하고 말았다. 이 두 차례의 전쟁은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의 종주국인 청나라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었다.
일본 역시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의 무력시위(武力示威) 끝에 1856년 신내천(神奈川) 등 5개 항의 개항과 외국인 거류지의 치외법권 인정 등 불평등 내용이 담긴 미일통상조약(美日通商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모두 열강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서, 조선에도 미구에 닥칠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은 이런 대외적 위기 상황 속에서 국력을 모으기는커녕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 3대에 걸친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삼남 지역 전체가 민란에 휩싸인 '임술민란(壬戌民亂)'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곡창지대 백성들이 대거 가담한 이런 대규모 민란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조선이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도 있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 대원군의 내정 개혁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등장한 것은 그가 과감한 개혁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충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 대원군은 이런 기대를 반영하듯 먼저 내부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서대문을 낮추고 남대문을 높이겠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서인(노론)을 약화시키고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즉 노론 일당 전제와 세도정치 아래 소외되어 왔던 남인, 북인, 소론계의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했으며, 지역 차별에 시달리던 서북인과 구(舊) 고려왕실의 후손들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주었다. 대원군은 일부 안동 김씨를 등용하는 방법으로 극렬한 저항을 완화시키면서 안김 백년세도를 무력화시켜 나갔다.
이런 인사정책은 집권 노론, 특히 안김 일문의 독식에 불만을 품고 있던 노론 이외 여타 사대부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다. 이는 정권의 세력 기반이 취약한 대원군의 개혁운동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지지 정치세력의 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대원군은 사색당파(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고루 등용하는 인사정책으로 사대부들의 지지기반을 넓힌 데 이어, 민란의 주요한 원인이던 '삼정(三政)'을 바로잡아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넓히려고 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을 일컫는 삼정의 폐단은 비단 이 시기의 문제만은 아니었으나,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민란이 전국을 휩쓰는 데 중요한 원인이 될만큼 심화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역대 국왕들이 실패를 거듭해 온 군정 개혁에도 착수했다. 군정의 폐단은 영조(英祖)대의 균역법(均役法)으로 일부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양반 사대부들은 군역의 부담에서 면제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군정, 즉 군역의 폐단은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일반 양인들과 똑같이 군역을 부담지워야 해소될 수 있는 문제였다. 대원군은 바로 이런 방향으로 군정의 폐단을 개혁했다. 호포법(戶布法)이 그것이다. 대원군은 과거에 면제 대상이었던 양반 사대부들에게서도 군포를 거두었다. 이로써 일반 양인들만 지고 있던 군역(軍役)의 의무를 양반 사대부들도 지게 되었다. 양반 사대부와 일반 양인 사이의 조세 차별이 해소된 것이었다.
한편 대원군의 전정(田政) 폐단 해소책은 지방관과 양반 토호들이 의도적으로 토지대장을 누락시켜 전세(田稅)를 착복하던 땅을 찾아내 과세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다.
대원군은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폐단이었던 환곡(還穀) 문제의 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환곡은 당초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되돌려 받는 빈민구제책으로 시작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16새기 중엽 명종(明宗) 때, 환곡 이식(利殖)의 10분의 1을 호조의 국가 회계에 편입시키는 일분모회록(一分耗會錄)제도가 제정되면서 빈민구제책에서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세입의 일부로 변화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와 관가의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지방관과 아전들의 수탈이 극심해졌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고리대로 평가될만큼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 환곡은 지방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주요한 수단이 되어 이 때문에 각처에서 민란이 빈발하는 등 사회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대원군은 집권 초부터 환곡에 대한 지방관의 중간 착취와 횡령 등을 적발해 가차없이 처벌하는 한편, 고종(高宗) 재위 3년(서기 1866년)에는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바꾸는 근본적 개혁을 추진했다. 사창제란 각 면 인구가 많은 곳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부유한 자를 사수(社首)로 삼아 그 주관하에 면민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한 제도다. 사창제의 특색은 주민자치제를 표방함으로써 지방관이나 아전의 농간이 개재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쇄했다는 점에 있다. 환곡 폐단의 핵심은 지방관이나 아전의 착취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창제를 사환제(社還制)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근대적 금융조합을 출현시키는 밑바탕이 될 정도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호포제나 사창제 등의 개혁 조치들은 대원군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신장시켰다. 그러나 고래의 특권의식에 젖어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호포제에 불만을 가졌다. 양반이 군포를 납부하는 것은 상민과 같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서원(書院)의 폐단에 손을 댔다. 원래 서원은 선현을 제사 지내고 양반 자제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교육 및 인격 수양의 장이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붕괴되고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서원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당쟁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 갔다. 서원은 당쟁의 근거지가 되어 중앙 조정에 저항하고, 그 힘을 이용해 일반 백성들을 수탈했으며, 심지어 지방관까지 무력화시켰다.
가장 심한 곳은 명황(明皇) 신종(神宗)을 제사하는 만동묘(萬東廟)를 관할하던 화양서원(華陽書院)이었다.
'사족(士族)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그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편지 하나를 띄워서 먹도장을 찍은 다음, 고을에 보내 서원제수전(書院祭需錢)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했다. 그렇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서원 같은 곳은 더구나 그 권위가 강대하여 그 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묵패지(華陽墨牌旨)라 했다. 백성들은 앞서부터 탐락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들로부터 침탈을 당하게 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박재형(朴在馨)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대원군은 서원 철폐가 양반 사대부의 극심한 반발을 부를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서원의 횡포를 직접 경험했던 그는 고종 재위 1년(서기 1864년) 이미 서원 폐단 문제 해결을 조정에 지시한 데 이어, 고종 재위 8년(서기 1871년)에는 전국 47개소의 서원을 제외하고 화양서원을 비롯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백성들에 대한 양반들의 수탈을 막는 동시에 서원에 딸린 땅과 노비를 몰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효과도 갖고 있었다. 서원 철폐 조치에 충격받은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상경하여 그 중지를 탄원했으나, 대원군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비록 공자(孔子)가 살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으며, 주자(朱子)가 살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써 철폐를 단행했다.
대원군은 비변사(備邊司)에도 손을 댔다.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처음 설치된 비상대책기구였으나, 1555년의 을묘왜란(乙卯倭亂)을 계기로 정식 관청이 되었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계기로 군사는 물론 정치, 경제, 외교, 문화를 총괄하는 거대 기관으로 변모해 왕권을 크게 위축시켰다. 대원군은 1864년에 비변사의 기능을 외교, 국방, 치안관계로 제한한 데 이어, 나머지 업무는 의정부(議政府)로 환원했다. 그리고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정(政), 군(軍)을 분리시키고, 비변사는 폐지했다.
그런데 대원군의 이런 모든 개혁정치의 목적은 왕권 강화에 있었다. 바로 이것이 대원군 개혁정치의 한계였다.
경복궁 중건은 그의 개혁사상이 지닌 한계를 잘 말해주는 사례다. 그가 고종 재위 2년(서기 1865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정궁(正宮)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려 한 이유도 왕권 강화에 있었다. 대원군은 1865년에 경복궁 중수계획을 발표하며, 그 재정 마련을 위해 왕실과 중앙 대신으로부터 지방 관리에 이르기까지 재력에 따라 원납전(願納錢)을 납부하게 했다. 그런데 납부한 자금과 벼슬을 연결시킨 이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대원군의 심복인 '천하장안(千河張安)'이 위임받은 원납전 징수는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원납하는 자에게 벼슬을 준 방법이 큰 효과를 거두어, 착수 10여개월만에 468만 6천 298냥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6년 대화재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순조롭던 중건공사가 어려움에 봉착했다. 대원군은 벼슬 수여정책을 더욱 확대해 10만냥을 기부하면 수령에 임명하는 방법까지 사용했으나, 한번 제동이 걸린 징수는 원활하지 못했고 원납전(怨納錢)이라고 지칭되는 등 불만만 샀다.
그러자 대원군은 문세(門稅)와 결두전(結頭錢)을 징수하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했는데, 경제원칙을 무시한 당백전 발행은 경제 질서를 심하게 왜곡시켰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常平通寶)에 비해 액면가치는 100배였지만 소재가치는 5, 6배에 지나지 않는 악화(惡貨)였던 것이다. 경복궁 중건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대원군은 이를 위해 양반의 묘지림까지 벌목하고, 많은 백성들을 '서민자래(庶民自來)'라는 명목으로 재건공사에 강제로 징발함으로써 양반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서도 원성을 샀다.
이는 호포제와 서원 철폐로 양반 사대부들의 지지를 상실한 데 이어, 일반 양민들의 지지까지 상실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결국 신분제 철폐나 생산력 발전 등을 통한 국력 강화라는 전망이 아니라 왕권 강화라는 현상에 집착한 결과, 대원군은 양반과 양민 모두의 지지를 상실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대외정책(對外政策)이었다.
● 쇄국으로 일관한 대외정책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대외정책은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정학(正學)인 주자학 외의 모든 사상과 체계는 사학(邪學)으로 보는 대외관의 반영이었다. 주자학 이념에 따라 천주교는 사교(邪敎)로 규정되었고, 그 교도는 사도(邪徒)로 규정되었으며, 서구 열강은 나라의 문을 닫고[鎖國] 몰아내야 할 서양 오랑캐[攘夷]로 규정되었다.
당초 그는 한 천주교 공인 국가를 이용해 다른 천주교 공인 국가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구사해 천주교에 관대했었다. 그러나 천주교 교세가 꾸준히 성장하고 이들이 주자학과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명백해지자, 서양[攘夷]과 연결해 조선에 해를 가할 수도 있는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할양받은 러시아가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함으로써, 대원군을 포함한 조정 대신들은 위기의식에 빠졌다. 대원군은 고종(高宗) 재위 3년(서기 1866년)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를 시작해 국내에 있던 프랑스 사제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베르뇌(Berneux) 신부를 선두로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鐘三) 등 수천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해 처형시키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었다.
'이 때 나라 안을 크게 수색하니, 포승에 결박된 죄인이 길에서 서로 바라보일 정도였다. 포청옥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재결할 수 없었다. 그 중에는 어리석은 백성, 어리석은 아낙, 어린아이 등 무식자가 많았다. 포장이 민망히 여겨 배교(背敎)맹세를 하도록 설득했으나 신도들은 듣지 않았다. 이에 형장(刑杖)으로 때려서 기어코 회개시키려 하니,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고 피가 청 위에까지 튀어 올랐다. 신도들이 환호하기를 혈화(血花)가 몸에서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노라 했다. 포장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죄인들을 옥에 가두어 놓고 차례대로 목을 졸 라 죽였다. 죽일 때마다 "배교하겠는가?"라고 심문하면, 비록 어린아이라도 그들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 대원군이 듣고서 다 죽이도록 명하고 어린아이들만 살려주었다. 시체를 수구문 밖에다 버려 산같이 쌓이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위명(威命)을 더욱 두려워했다.
박재형(朴在馨)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병인사옥 때에는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베르뇌와 다블뤼(Daveluy) 신부 등 9명의 프랑스 사제도 처형되었다. 피체를 모면했던 리델(Ridel) 신부는 조선을 탈출해 청나라의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 해 8월 로즈 제독은 군함 7척으로 구성된 프랑스 해군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 강화읍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 관군이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 분견대 160여명을 격퇴시키자, 로즈 제독은 군대를 철수시켜 물러났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2년 후인 고종 재위 5년(서기 1868년)에는 대원군의 망부(亡父)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가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대원군을 격분시켰고, 대원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양이(攘夷)'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했다. 병인양요가 발발한 지 5년이 되던 고종 재위 8년(서기 1871년) 4월,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man)호가 평양 주민들에 의해 소각된 것을 구실로 주청(駐淸) 미국 공사 로우와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거느린 미국 군함 5척이 강화도를 공격한 것이다. 그 해 6월 초지진(草芝鎭)과 덕진진(德津鎭)을 점령한 미국군이 광성보(廣城堡)를 공격하자,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강화수비대 600여명이 응전했으나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로 무려 350여명이나 전사하고 말았다. 미국군 측 전사자는 불과 3명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전투를 중지하고 돌아감에 따라 조선은 이 전쟁을 자신들의 승리로 규정지었으니, 이것이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외형상으로는 프랑스와 미국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퇴군한 것이지만, 두 차례의 전쟁은 내용적으로는 조선의 승리라고 볼 수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책은 승리 주장을 발판삼아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합리적 자세였다. 그러나 양요(洋擾)를 조선의 승리라 규정한 대원군은 쇄국을 강화함으로써 조선을 더욱 고립시켰다.
대원군 자신도 점차 고립되어 갔다. 호포제와 서원 철폐, 그리고 경복궁 중건으로 이미 양반 사대부와 일반 양민들이 등을 돌린 상태에서 개방을 요구하는 개화론자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 와중에서 고종과 민비까지도 대원군을 외면했다
대원군 집권 10년만인 1873년에 성리학을 신봉하는 쇄국론자 대원군이 그의 내정 개혁에 불만을 품은 유생세력의 대표 즉, 또 다른 쇄국론자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무너진 것은 그의 내정 개혁의 목표와 쇄국정책이 갖고 있던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내정 개혁이 진정한 의의를 가지려면 신분제 철폐를 포함한 보다 평등하고 개방적인 사회로의 지향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호포제와 서원 철폐 등으로 내부의 모순을 일부 해결했을 뿐, 신분제 철폐라는 근본에는 다가서지 못한 채 왕권 강화라는 시대 역행적인 과제에만 매달린 것이었다. 또한 세계화의 진전이라는 세계사의 조류에 역행하는 쇄국정책을 고집함으로써 급기야 조선은 개방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종 재위 10년 11월 양주 곧은골로 은거한 대원군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권력 탈환을 시도했다. 1881년 전국 유림의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이 격렬하게 전개되자 대원군의 서자 재선(載先)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안기영(安機永)의 고종 폐립사건에도 간여했다. 이듬해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재집권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개입으로 청나라에 납치되어 3년간 유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귀국 2년 뒤인 고종 재위 24년(서기 1887년)에도 큰아들 재면(載冕)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심지어 고종 재위 32년(서기 1895년)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한 일본 세력과 결탁해 재집권을 꾀하다가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양주 곧은골에 은거해 세상을 떴으니, 그 말년의 정치 행적은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상실한 것이었다.
대원군은 조선 역사상 그 누구 못지 않은 개혁의지를 지닌 개혁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방향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개방에 역행하고 왕권 강화에만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보수정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혁의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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