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위기에 처하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그 중 하나가 개혁적 유학인 실학이었다. 학문의 목적과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있어 현실론의 성격이 강했던 실학(實學)은, 개화사상(開化思想)으로 연결되어 조선 말기 정국의 주요한 축으로 기능할 개화세력을 태동시켰다. 개화론(開化論)이 개방을 통해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은 전통적인 성리학체제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은 비록 세계사의 조류에 역행했다는 한계는 있으나, 훗날 대일의병항쟁(對日義兵抗爭)으로 연결되어 민족해방전쟁(民族解放戰爭)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
● 실학의 발생과 그 내용
조선 후기 들어, 정치적으로는 노론 일당 독재 속에서 몇몇 특정가문들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벌열화(閥閱化) 현상이 전개된 반면,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자체가 붕괴해 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상업과 수공업이 함께 발전했고, 농촌에서는 계급 분화가 이루어졌다. 즉 부유한 양반 지주들과 일부 부농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대다수 농민들은 전호(佃戶)로 전락했다.
이런 사회적 현실 속에서 태동한 일부 양반 사대부들의 자기반성 철학이 실학이었다. 실학은 유학의 한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개혁적 유학이라는 데 차이점이 있었다. 성리학이 관념론의 요소가 강한데 비해, 실학은 학문의 목적과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있어 현실론의 성격이 강했다. 유학은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으로 나눌 수도 있는데, 경학이란 사서삼경(四書三經) 같은 경전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이고 경세학은 경전에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경세(經世)의 원리를 도출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익(李瀷), 유형원(柳馨遠), 정약용(丁若鏞)으로 대표되는 실학의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는, 농촌 문제에 깊이 천착해 유학의 경전에서 그 해결 방책을 제기한 일군의 학자들을 일컫는다. 실학의 또 다른 학파인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는 농촌 문제보다는 상공업과 기술 혁신, 해와 통상 증딘 등을 통해 국민 경제를 향상시키 것을 주장한 일군의 학자들을 말한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으로 대표되는 이용후생학파는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명나라에 대한 존주대의(尊主大義)나 존화양 등의 명분론에서 벗어나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 등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경세치용학파가 주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인 반면, 이용후생학파는 집권 노론의 일부였던 점은 그들의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의 실상을 직접 경험한 결과 농촌 문제 해결에 가장 큰 관심을 쏟게 되어 농업 중심의 경세치용을 주장한 것이고, 집권 노론은 사신 등으로 청나라를 왕래하며 발전된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목도하면서 상공업 중심의 이용후생을 주장하게 된 것이었다.
정권에서 소외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부 남인들은 일반 백성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익이 '우리의 가난이 날로 심하여 송곳을 꽂을 땅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성호문집(星湖文集)에서 기록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반 농민들과 차이가 없었던 경세치용학파는 이런 견지에서 농촌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게 되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일체의 토지를 공전(公田)으로 삼아 사적인 토지 지배를 타파해야 한다는 토지 국유화를 주장했다. 또 노비제도의 세습에 반대해 당대로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소위 혁파한다는 것도 갑자기 현재의 노비를 모두 혁파한다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재의 노비에서 그치게 하여 노비세습법을 혁파함을 의미한다. (중략) 노비세습법을 혁파하고 대신 고용제도를 채택함이 어찌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당연한 길이 아니겠는가?
반계수록(磻溪隨錄) 속편(續編) 하(下) 노예'
노비제도 대신 고용제도로 전환하자는 유형원의 주장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개혁 제안이었다.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익은 고대 중국 주(周)대의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으로 생각했으나, 정전제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토지 소유에 제한을 두는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했다. 즉 한 가구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정 정도의 토지는 매매할 수 없게 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은 또 생산의 장려를 위해서는 놀고먹는 사람을 없앨 것과 관제를 간소화하여 관리의 수를 줄일 것, 지방관은 농사철에 부역을 금지하고 국토를 합리적으로 이용할 것, 사치를 금하고 근검을 장려할 것 등을 제기했다. 그리고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여섯 가지의 좀으로 들었다. 첫째가 노비제도, 둘째가 과거제도, 셋째가 문벌제도, 넷째가 수공업, 다섯째가 승려, 여섯째가 놀고먹는 것 등이었다. 한편 노비들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인(賤人)이라도 과거(過去) 응시를 허가한다. 그 중에 문과, 무과 및 진사시에 합격한 자는 관에서 값을 치러주고 양인으로 풀어준다. 그리고 사서(四書)와 경서(經書) 가운데 한 가지 이상에 능통한 자는 3년마다 한 차례씩 서울과 각 도에서 시험을 보게 한다. 매권에 한 문제씩 제목을 내어 그 뜻을 쓰도록 한다. 이 중에서 글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쓴 몇 사람을 뽑아 역시 관에서 전례에 따라 속량(贖良)시킨다. 이와 같이 하면 노비도 점점 줄고 국가도 반드시 그 힘을 입게 된다. 참으로 발군의 재능이 있다면 뽑아 쓴다 해도 무엇이 도리에 해롭겠는가?
성호문집(星湖文集) 논노비(論奴婢)'
그는 또 당쟁의 시작이 과거를 자주 보아 관직 수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을 급제시켰기 때문이라며 과거제를 비판했다.
'그러면 당파는 왜 생겼는가? 그것은 과거를 너무 자주 보아 많은 사람을 급제시켰기 때문이고, 관도에 오른 다음에는 정실(情實)로 인사가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벼슬 할 사람은 무수히 많은 데 벼슬자리는 적고 보니, 여기에 당파가 걸리는 최대의 계기가 있는 것이다. (중략) 중국에도 당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같이 3백여년에 걸쳐서 갈수록 격화된 나라는 없다. 선조(宣祖)대부터 당파가 둘로 갈리더니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여덟이 되어 서로 역적으로 모함하는 혈투를 벌인 끝에 원한은 누적되고 세습되어 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한 동리에서 살하도 서로 왕래도 통혼도 안하게 되었다. 마침내는 복식에 있어서도 당파에 따라 서로 모양이 달라져 길에서 만나도 곧 알아볼 수 있게까지 되었다. (중략) 일단 당파가 갈리면 당인의 눈에는 자파의 이해가 있을 뿐, 국민복리에 눈 돌릴 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쟁을 없애려면 과거 횟수를 줄이고, 벼슬길을 엄격히 제한하며, 성적을 보아 무능한 자는 도태시킬 것이며, 적재를 적소에 배치하여 구임시키고 공정한 인사로 각자가 자기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이익(李瀷) 곽우록(藿憂錄) 붕당론(朋黨論)'
이익은 남인이었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이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평안도 운산으로 귀양갔다가 사망한데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집권 노론을 공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 때문에 정치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이익은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은 물론 천주교 서적까지 광범위하게 섭렵하는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서양 과학기술의 우수성은 인정하면서도 천주교 교리의 천당 지옥설과 천주 강생설에 대해서는 유학자의 견지로 비판하기도 했다.
유형원, 이익 등의 개혁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로 평가되는 정약용은 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커다란 신임을 받으며 수원성 축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사후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을 저술해 조선 후기 사회 개혁에 관한 전반적인 사상체계를 제시했다.
'백성을 위해 목(牧)이 존재하는가, 백성이 목을 위해서 태어나는가? 백성들은 곡식과 피륙을 내어 목을 섬기고, 백성들은 수레와 말을 내어 추종하면서 목을 보내고 맞이하며, 백성들은 고혈과 진수(津髓)를 모두 짜내어 목을 살찌게 하니, 백성들이 목을 위해서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목이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옛적에는 백성만이 있었을 뿐이니, 어찌 목이 존재했을 것인가? 몇 사람들이 현명한 노인을 추대하여 이정(里正)으로 삼고 (중략) 또 몇개 구역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당정(黨正)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사정과 순서를 밟아서 (중략) 사방의 방백(方伯)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최고의 장(長)으로 삼아 황왕(皇王)이라 부르니, 제왕의 근본은 이정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목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정약용(丁若鏞)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원목(原牧)'
원목(原牧)에서 제시하는 정약용의 권력론은, 통치자의 권력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 아니라, 당에 사는 백성들이 합의하여 위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상이었다. 정약용은 이런 견지에서 백성들 위주의 토지 개혁사상을 주장했는데 바로 전론(田論)에서 설파한 여전제(閭田制)이다. 여전제는 자연 촌락의 단위가 되는 30가(家)를 1여(閭)로 삼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여장(閭長)의 지휘 아래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는데, 노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여장이 매일 기록해 추수기에는 세금과 여장의 녹봉을 제외한 나머지를 연인원의 총노동일수로 나누어 노동일수대로 개인에게 차등있게 분배하자는 것이다. 즉 노동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받을 수 없게 하자는 노동 위주의 사상이었다.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의 주장들은 이렇듯 위기에 처한 조선 사회의 근본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이미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인 까닭에, 그 사상은 실제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유형원(柳馨遠)이 사망한 지 5년 후인 1678년에 전(前) 참봉(參奉) 배상유(裵尙瑜)가 반계수록(磻溪隨錄) 속의 전제(田制), 병제(兵制), 학제(學制) 등 7조목을 시행하기를 청하자 숙종(肅宗)이 이를 묘당(廟堂)에 내렸는데, 묘당에서 그 말이 오활(汚闊)하다는 이유로 내버려 두었다는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기록이 실학자들의 개혁사상이 조정에서 논의된 보기 드문 예다. 그 후 정조(正祖) 때 채제공(蔡濟恭),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들이 등용되면서 이들의 사상이 일부 국정에 반영되기는 했으나, 정조 사후 남인들이 몰락하면서 무산되었다.
경세치용학파는 이렇듯 농촌 문제에는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 반면, 이익이 수공업을 여섯 '좀' 중의 하나로 지적한 것처럼 수공업이나 상업에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익(李瀷)은 상품 화폐의 발달이 농민층의 토지 상실을 촉진시키며,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이 고리대를 발생시키고 소비와 사치 또 관리의 가렴주구를 조장하는 등 각종 폐해를 낳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리는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는 상공업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소론 계열이었던 유수원(柳壽垣)은 경종(景宗) 때 과거에 급제한 이후 장령 등의 요직을 거쳤으나 소론 강경파로 분류되어 영조(英祖) 중반 이후 관계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던 영조 재위 31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과 토역경시사건(討逆慶試事件)에 연루되어 능지처참당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우서(迂書)에서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이 모두 양반을 우대하는 헛된 명분에서 나오고 있다'면서,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개혁적 사상가였다. 그는 사민의 직업적 분화를 이루고 수취체제를 정비해 국부(國富)를 증대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국부 증대의 방안으로 상업적 농업의 장려, 상공업의 진흥, 농기구의 개량 등을 들어 이용후생학파의 선구로 평가된다.
북학파는 이후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이 뒤를 이었다. 중국 견문록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긴 박지원은 청나라를 현실적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했으며, 그의 제자 박제가는 더욱 적극적인 북학론을 전개했다. 정조 재위 2년(서기 1778년) 1차 연행(燕行)에서 돌아와 지은 북학의(北學議)와 정조 재위 23년(서기 1799년)에 지은 진소본북학의(進梳本北學議) 등의 저서에서 박제가는 '재물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면 가득 차고 버려두면 말라버린다.'며 적극적인 중상론을 개진했다. 그는 또한 전 인구의 반이나 되는 비생산적인 양반들을 상업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에서는 중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과의 통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박제가의 주장에는 개혁군주 정조 까지도 그 급진성에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당시 농업 생산성의 발달에 따른 조선 상공업의 발달을 대변하는 것이자, 조선을 통한 대청(對淸) 간접 무역을 하던 일본이 해로를 통해 중국과 직접 무역함으로써 대일(對日), 대청 중개 무역이 쇠퇴하는 상황에 놓인 상업계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용후생학파는 서울의 권세가와 결탁되어 잇는 서울 육의전(六矣廛) 등의 특권 상인과 도고(都賈) 행위를 통해 독점적 이익을 누리는 대상인에 반대하고, 소상인, 소생산자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성장을 옹호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경세치용학파에 속하지만 이용후생학파의 기술 혁신 주장도 받아들여 두 학파의 주장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했다. 실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조선의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식인의 자기개혁 움직임이었지만, 노론 일당 독재체제는 이런 개혁정책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실학자들의 이런 개혁 주장들은 조선의 위기가 계속되면서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이후 개화사상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 개화사상의 형성
서구 열강 및 일본과의 접촉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면서 조선 내부는 둘로 갈렸다. 하나는 서구 열강 및 일본을 배척하고 성리학사회를 고수하자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었고,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서구 열강과 일본을 배우자는 개화론(開化論)이었다.
'개화(開化)'라는 용어는 주역(周易)의 '개물성무(開物成務) 화민성속(化民成俗)'의 첫글자를 딴 것으로, '만물의 근원을 궁구해 새롭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변회시켜 옳은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개화사상은 사상의 논리나 인적 계보에 있어 실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분제 타파 등의 민권사상과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은 실학자들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으며, 개화파의 중요 인물인 박규수(朴珪壽)는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였다.
개화파의 3비조(鼻祖)는 박규수와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다. 박규수만 양반 출신이었고 나머지 둘은 중인 출신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터득한 인물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북경을 자주 왕래하던 오경석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태평천국혁명(太平天國革命)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군의 힘을 빌렸는데, 이는 중국의 선각적 인사들과 청년들에게 큰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켜,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서술한 서적들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오경석은 1853년에 사행(使行)의 통역으로 처음 북경을 방문한 이래, 1858년까지 네차례나 북경을 왕래하면서 이런 '신서(新書)'들을 구입했다. 해국도지(海國圖志),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이 그런 서적들이었다.
오경석은 1860년 8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운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 해 10월, 동지사의 역관으로서 북경에 들렀다. 여기서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아 개화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혔다. 오경석의 개화에 대한 확신은 단순히 조선의 낙후성에 대한 자각이 아니었다. 즉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본 봉건제도의 낙후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는 조선도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해야 한다는 확신을 오경석이 갖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경석은 귀국 후 친구인 의관 유홍기에게 자신의 견문을 전하고 '신서'들을 전해주면서 개화가 대책이라고 설득했다. 역시 중인 출신이었던 유홍기는 이 같은 오경석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둘은 부패한 봉건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서는 서구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조선이 멸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을 단행해 조선을 세계 추세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반 출신이자 박지원의 손자였던 박규수도 1861년 1월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점령사건에 대한 위문사절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그 역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무기력한 청나라의 실상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신서'들을 구입해 읽고 개화사상을 습득했다. 오경석, 유홍기, 박규수, 3인은 이런 경로로 1860년대 초 각각 개화사상을 습득했던 것이다.
그 후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1866년 8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화공(火攻)으로 격침시켜 대원군의 신임을 받았고, 1869년에는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와 형조판서까지 겸직했다. 한편 오경석과 유홍기는 개화사상의 탐구에만 머물지 않고,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게 이를 교육시켜 개화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둘이 박규수를 찾아가 이런 생각을 피력하자 그는 선뜻 받아들였다. 중인 신분인 오경석과 유홍기는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지만 양반 박규수가 이에 동조함으로써 개화파 형성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 갑신정변(甲申政變)
1870년대 초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양반 자제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때 박규수는 양반들을 모으는 역할뿐만 아니라 조부인 박지원(朴趾源)의 연암집(燕巖集)을 비롯한 실학사상을 강의해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켜주는 교량 역할도 수행했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박영교(朴泳敎), 홍영식(洪英植), 유길준(兪吉濬), 서광범(徐光範) 등이 일차로 선발되어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받았고, 박규수의 이웃에 살던 김홍집(金弘集)과 어윤중(魚允中) 등도 사랑방에 출입하며 개화사상을 접했다. 박규수는 또한 사신과 역관들의 중국 견문과 이들이 중국에서 구입해 온 '신서(新書)'들을 가르쳤고, 김옥균 등의 양반 자제들은 개화사상에 동조하게 되면서 직접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 중인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개화사상을 매개로 신분제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박규수는 실제로 개국을 앞장서서 실천하기도 했다. 고종(高宗) 재위 12년(서기 1875년)에 일본의 군함 윤요[雲揚]호가 강화도에 나타나 초지진(草芝鎭)에서 포격전을 벌였고, 이듬해 1월 일본은 이를 구실로 군함 7척으로 침략해 회담을 요구했다. 조정 내에는 척왜파(斥倭派)가 다수였으나 우의정 박규수는 이에 맞서 개항을 주장함으로써, 그 해 2월 일본의 치외법권을 포함하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맺고 조선은 개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 재위 14년(서기 1877년) 박규수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개화사상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유홍기는 김옥균에게 봉원사(奉元寺)의 개화승(開化僧) 이동인(李東仁)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는 이들이 개화사상을 매개로 신분을 뛰어넘은 동지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원, 승정원 우부승지 등의 청요직을 역임한 핵심 관료였으나, 중인 출신 유홍기의 소개로 역시 중인 출신인 이동인과 동지가 되었던 것이다. 김옥균이 관계(官系)에 진출한 후 개화파는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었다. 개화사상의 신봉자가 된 김옥균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 구습을 변혁코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정치적으로는 자주독립에 기초한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하려 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실각 후 문호개방은 대세가 되어 고종 재위 19년(서기 1882년) 4월에는 서구 열강 가운데 최초로 미국과 통상조약(通商條約)을 맺었다. 대원군 집권 때의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있은 지 11년이 지난 후였다. 며칠 후에는 영국과도 통상조약을 맺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청나라와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맺어 문호가 활짝 열리면서 조선에는 개화(開化)란 말이 유행할 정도가 되었다.
개화파들은 서구와 일본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조선도 이런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개화파는 1880년대 들어 조정의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정도로 그 세력이 급신장했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한 자세와 개화정책 추진의 강도를 둘러싸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김홍집(金弘集) 등 정부 고위 관료로 구성된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에 종속된 현실과 민씨정권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들과의 적절한 타협을 통해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온건 개화파는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대표되는 청의 점진적 개혁노선을 지지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은 청나라를 추종하는 '사대당(事大黨)'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서양의 기술과 문물은 수용하되, 그 정신은 전통 유학에 바탕을 둔다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펼쳤다.
반면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 소장파 개화 관료로 구성된 급진 개화파는 일본식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청나라에는 독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려 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조선의 바람직한 개화 모델로 삼은 급진 개화파는 일본처럼 서양의 기술과 문물뿐만 아니라 그 사상과 제도까지 수용하고자 하는 '변법자강론(變法自彊論)'의 논리로 개혁을 추구했다. 그리고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군사적으로 개입한 청나라가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의 속방(屬邦)이다.'라는 글귀가 쓰인 큰 깃발을 광화문(光化門)에 걸어놓은 것을 보고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꼈다.
청의 군사적 개입으로 대원군이 청으로 압송되면서 권력을 겨우 되찾은 민씨정권은 내적으로 가문과 개인의 이득을 극대화하면서 외적으로는 권력을 되찾게 해 준 청나라에 대해 극도의 사대주의 자세를 취했다. 급진 개화파는 이에 맞서 일본을 협력 대상으로 삼았다. 국가 재정의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민씨정권의 재정고문인 뮐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는 화폐 발행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고, 김옥균 등 개화당은 일본 차관 도입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했는데, 김옥균의 차관 교섭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
급진 개화파는 무력(武力)을 사용해 이런 정치적 난관을 일거에 뒤엎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베트남 영유권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면서 그 해 8월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 군사 3천여명 중 절반을 철수시킨 것을 청과의 관계를 끊고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할 수 있는 호기로 여긴 것이다. 갑신정변 한 달 전에 김옥균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년간 평화적 수단으로 고생을 이겨내면서 모든 힘을 다했으나, 그 성과는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은 이미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수를 눌러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결심에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다."
김옥균(金玉均) 갑신일록(甲申日錄)
1884년 10월 7일, 급진 개화파는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郵政局) 개설 피로연을 이용해 민시정권을 제거하는 일대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씨정권의 소장파 핵심인 민영익(閔泳翊)에게 자상(刺傷)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된 갑신정변은 민씨정권의 대표적인 거두라 할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등 6명을 제거하고 고종에게는 청나라 군사가 습격했다면서 일본군 동원을 요구했다. 고종이 김옥균의 강권에 따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에 병력을 요청해 조선군과 일본군의 호위 속에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면서 정변은 일단 성공하는 듯했다. 정권을 장악한 급진 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적 외교의 폐지와 입헌군주제 정치체제의 수립, 지조법(地租法)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를 통한 국가 재정의 충실화,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확립 등을 내걸어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했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의 이런 대담한 개혁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 버렸다. 19일 오후 청나라 군사들이 공격하자 일본군은 철수해 버렸고, 서울의 상인들과 빈민들까지 급진 개화파를 친일파로 인식해 공격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에게는 대역부도죄가 적용되어, 그 해 12월에는 정변에 참여했다 피신한 이희정(李希程), 김봉균(金鳳均), 신중모(愼中摸) 등 11명의 개화파 인사들이 사형당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은 비록 외세에 의존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수구파 및 온건 개화파와 다퉈가면서 개화를 추진하다가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급진적 방법으로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지향한 정치개혁운동(政治改革運動)이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개화정책은 다소 위축되었으나 세계사적 추세였던 개화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었다. 갑신정변 이후에는 온건 개화파가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수구파의 반대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개화파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 와중인 1894년 출병한 일본이 내정개혁을 강요한 것이 계기였다. 이렇게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시작되었다.
● 갑오경장(甲午更張)과 그 한계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빌미로 조선에 출병했다. 일본은 1894년 6월 경복궁을 점령해 민씨정권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입궐시켜 섭정으로 삼았다. 이때 성립된 내각이 제1차 김홍집(金弘集) 부일내각(附日內閣)이다.
이 내각은 개혁 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회의총재(會議總裁), 박정양(朴定陽), 김윤식(金允植), 김가진(金嘉鎭) 등 17명이 의원이 되어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제1차 김홍집 부일내각은 이처럼 배청(排淸), 친일(親日)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의욕적으로 단행한 근대적 제도 개편이 갑오경장(甲午更張)이었다. 대원군이 실각하기 전까지를 제1차 갑오경장, 대원군이 실각한 1894년 12월 이후를 제2차 갑오경장으로 분류한다. 갑오개혁은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간섭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농민항쟁을 비롯해 조선 백성들의 오랜 요구 사항이었던 반봉건적인 요구들이 대폭 수용되었다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제1차 개혁은 정치제도의 개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채택해 모든 공, 사문서에 사용했다. 이는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님을 내외에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조선과 청의 대외관계를 끊으려는 일본의 의도로 취해진 조치였다. 일본 정부는 또한 일본인 고문관 및 군사교관을 초빙케 하고 일본 화폐의 조선 내 유통과 방곡령(防穀令)의 반포를 금지하는 등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내부적으로 갑오경장은 많은 개혁 조치들을 단행했다. 중앙 관제를 의정부(議政府)와 궁내부(宮內府)로 나누고, 종래의 6조(六曹)를 내무, 외무, 탁지,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의 8아문(八衙門)으로 개편하여 의정부 직속으로 삼아, 종래 유명무실했던 의정부를 명실상부한 중앙 통치기구로 만들었다. 관료제도는 종래 18단계의 품계(品階)를 척임관(刺任官), 주임관(奏任官), 판임관(判任官)의 3단계로 축소했으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주임관과 판임관의 임용권을 의정부의 총리대신 및 각 아문의 대신들에게 부여했다.
군국기무처는 사회제도 개혁에도 착수해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 문무(文武) 차별, 공사(公私)노비제, 죄인 연좌제(緣坐制) 등을 폐지하는 한편, 조혼(早婚)을 금지시키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다.
경제제도도 개혁했다. 국가의 모든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시켰으며,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을 의결하여 은본위제(銀本位制)를 채택했다. 또 세제(稅制)를 금납제(金納制)로 대체했다.
제1차 갑오경장 와중에 10년 전 발생했던 갑신정변의 주모자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해 박영효가 내부대신, 서광범이 법부대신으로 입각했다. 이들은 1894년 12월 대원군을 제가한 뒤 깁홍집, 박용효 연립내각을 조직해 더욱 광범위한 개혁에 나섰다. 이를 제2차 갑오경장이라 한다. 제2차 갑오경장 때에는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반포했다.
일본은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승리를 발판으로 다수의 일본인 고문관들을 기용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기도했다. 그러나 일본 차관 도입이 지연되는데다,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은 데 대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제동을 거는 삼국간섭(三國干涉)이 일어나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러자 박영효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킨 후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內閣)'과 '부(部)'로 바꾸었으며,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農商工部)로 통합함으로써 모두 7부가 되었고 내각과 분리된 궁내부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행정제도를 23부 337군으로 개편하고, 내부대신의 관할 아래 각 부에는 관찰사(觀察使), 경무관(警務官)을 두고 군에는 군수를 파견해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수립했다. 그 밖에 행정과 사법을 분리시키기 위해 '재판소구성법(栽判所構成法)'과 '법관양성소규정(法官養成所規程)'을 공표했으며, 교육입국조칙(敎育立國詔勅)에 따라 '한성사범학교관제(漢城師範學校官制)' 및 '외국어학교관제(外國語學校官制)'를 제정 실시했다.
박영효가 주도한 일련의 게혁 조치는 조선을 근대 시민국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박영효의 독주에 일본 측은 물론 고종도 반발하고 나섰다. 그런 가운데 1895년 윤5월에 박영효는 역모사건에 연루한 혐의를 받아 일본에 재차 망명함으로써 실각하고, 그 해 7월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 무렵 고종과 민비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에 급격히 기울면서 제2차 개혁도 암초에 부딪쳤다. 청일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영향력이 축소된 데 불만을 품은 일본은 그 해 8월, 대궐에 군인과 무사들을 난입시켜 반일정책을 주도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켜, 각지에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斷髮令)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벌어졌다. 이런 와중인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개혁내각은 붕괴되고 갑오경장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갑오경장은 내부적으로는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이념의 실천이자 동학농민혁명에서 제기된 반봉건 이념이 구체화된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타율적 측면과 고종의 기회주의적인 처신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때 제시된 근대 국민국가의 이념은 이후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제의 강점 후에는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사업으로 연결되어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이 전개되었다.
● 개화에 대한 반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
고종(高宗) 재위 13년(서기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 이래, 개항과 개화는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회적 흐름이 되었다. 미국, 영국, 청나라와 잇달아 각종 조약을 맺은 조선 조정은 개화정책의 추진을 위해 고종 재위 18년(서기 1881년)에는 청의 제도를 본 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적극적인 개화정책 추진에 나섰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청나라에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해 개화정책을 배워오게 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와 같은 신문을 발간했으며, 근대적 공장이나 상회, 학교, 병원 등을 설립했다.
대원군 실각 10년이 채 안 되어 개화는 조선의 대세가 되었던 것이다. 최익현(崔益鉉)을 내세워 대원군을 공격함으로써 그를 실각시켰던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사태의 전개에 크게 당황했다. 양반 사대부들이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을 전개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의 위정척사론에서 지켜야 할 바른 것이란 성리학 사상과 그 질서였으며, 물리쳐야 할 그릇된 것이란 성리학 외의 모든 사상과 그 질서였다. 이들에게는 성리학만이 올바른 정학(正學)이었고, 다른 모든 사상과 질서는 그릇된 사학(邪學)이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김평묵(金平默), 최익현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여러 차례 변화를 겪게 된다. 1860년대에는 이항로, 기정진 등이 상소를 통해 서구 열강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반대운동(通商反對運動)으로 나타났는데, 이 때는 대원군 집권기였기 때문에 '척화주전(斥和主戰)'을 주장하던 정부와 별다른 갈등을 겪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원군 대외정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이들은 대원군이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을 제한하는 데 반발해 이항로의 제자였던 최익현이 대원군 실정 공격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러나 막상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격렬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은 여러 가지 이론으로 나눌 수 있다. 서구 열강과 맞서 싸우자는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과 내정 개혁을 통해 국력을 배양해 서구 열강을 물리치자는 '내수외양론(內修外壤論)'이 있으며, '인수론(人獸論)'도 있는데 이는 조선을 하늘의 도를 실천하는 인간의 나라[小中華]로, 서구 열강을 임금도 부모도 모르는 금수(禽獸)의 나라,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는[無君無父] 짐승의 나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은 일본이 서양과 같은 오랑캐라는 논리였는데, 일본인이 양복을 입고 서양의 대포를 사용하며 서양의 선박을 타고 있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이들은 물론 성리학 원리주의의 자리에서 위정척사론을 전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 집권 노론이 남인 중심의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해 천주교를 이용했던 것처럼, 정권 유지를 위해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항로의 제자이자 노론인 김평묵, 유중교 등이 개화정책이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남인, 소론 세력의 집권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의 유생들을 동원해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즉 위정척사운동에는 일본과 서구 열강에 대한 배척을 통해 남인, 소론 등의 집권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노론의 정치적 의도가 개제되어 있었다.
대원군을 실각시켰던 최익현의 상소가 이번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가운데, 1880년대에 청나라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유포되었다. 1880년 8월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고종에게 올린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 미국과 결합해야 한다는 이 주장은 위정척사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서, 당시 조정과 양반 사대부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은 이듬해 1월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는 것으로 이를 무시하려 했다.
그러자 영남 지역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책략을 반입한 김홍집의 처벌과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민씨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의 만인소를 올렸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이나 미국이나 다 같은 오랑캐인데,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 미국과 결합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영남 만인소를 시작으로 1881년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지역에서 상소운동이 일어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연대한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1881년 8월 말, 안기영(安驥泳) 등이 고종을 폐위시키고 대원순의 서자(庶子) 이재선(李載先)을 추대해 대원군을 재집권시키려던 사건이 발각되면서 고종과 민씨정권에 의해 철저한 탄압을 받으며 약화되어 갔다.
위정척사운동은 서구 열강에 맞서 조선의 전통적인 성리학 질서를 지키려는 것이기도 했으나, 이는 세계사의 조류인 개방과 근대화를 저지함으로써 양반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던 수구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위정착사운동은 1890년대에 들어 의병항쟁의 사상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특히 이 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이 의병으로 변신하는 등 '저항적' 민족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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