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와 조선 공산당의 창립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통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계통의 독립운동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았다. 민족주의 운동의 목표는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극복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우선인 반면,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 농민 계급의 해방과 민족 해방을 함께 추구한다. 일제는 지주, 자본가 계급을 친일적 협력 세력으로 적극 끌어들이면서 노동자, 농민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수탈하고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계급 간의 모순과 갈등은 더욱 심해져 간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주목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계급 해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여겼다. 계급 해방을 민족 해방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가들 중에는 민족 해방보다 계급 해방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가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계급 해방을 위해서는 민족 해방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노선과 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민족주의 운동은 계급적 갈등보다는 민중들의 무지를 먼저 해결하려 하였고,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면, 사회주의 운동은 농민,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적 고통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지주, 자본가 계급의 착취에 있음을 일깨우면서 농민과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소작쟁의, 노동쟁의를 지도하는 등 대중적 투쟁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연해주 지방에서 1918년 5월 이동휘(李東輝) 등을 중심으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국외에서는 두개의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 성립되었는데, 소련 지역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중국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공산당은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 등을 놓고 서로 대립이 극심하였다. 코민테른이 두 공산당의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1922년에 두 공산당을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 그후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통일된 공산당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 조직으로만 남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은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진보적 청년, 학생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민족운동(民族運動)의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음에도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고, 여러 차례의 외교적 독립 노력이 아무런 성과가 없이 끝나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허구성에 크게 실망하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국제적 사회주의 운동이 크게 고양되는 가운데 코민테른은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 노서을 표방하면서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民族解放運動)을 크게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청년, 학생들은 이러한 주장에 기대를 걸게 된 것이다. 3·1운동 이후 소작쟁의, 노동쟁의 등 대중적 투쟁이 활발해진 점도 사회주의 운동이 더욱 확대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국내에도 많은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되는데, 서울청년회,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와 이를 계승한 화요회(火曜會), 북풍회(北風會) 등이 대표적 단체였다. 화요회를 중심으로 1925년 4월 17일 제1차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립되었고, 그 다음 날 공산주의 청년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도 조직된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곧바로 코민테른에 대표를 파견하여 승인을 얻었지만 신의주의 한 청년 당원이 변호사를 구타한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탄로나 11월에 해체되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일제의 검거를 피한 당원들을 중심으로 12월에 곧바로 다시 조직되었으나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탄로가 나서 해체되었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였던 권오설(權五卨)은 이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흔히 마르크스와 레닌의 머리글자를 따서 ML당이라고 부르는데, 화요회계가 중심이 된 1, 2차 때와는 달리 공산주의 운동의 고질적 병폐였던 치열한 분파 투쟁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다양한 사회주의 세력이 참여하여 1926년 9월에 통합 공산당을 이루었다. 특히 11월 '정우회(正友會) 선언'을 발표한 인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민족 유일당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제3차 조선공산당도 1년 남짓 활동을 하다가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고, 다시 제4차 조선공산당이 성립되었다. 이 제4차 당도 신간회와 더불어 활동하였으나 곧바로 조직이 발각되어 사실상 붕괴 상태에 빠졌고, 코민테른의 이른바 '12월 태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원 수백명이 검거되었고,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끈질기게 당이 재건되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 단순히 계급투쟁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공산당은 대부분 부르주아적 지식인과 학생층으로 구성되어 계급투쟁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 농민층과의 연대가 부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1930년대 이후 혁명적 농민조합, 혁명적 노동조합, 반제동맹 등 혁명적 대중조직운동의 형태로 계속되었다. 아울러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도 전개되었지만, 광복이 될 때까지 성공하지 못하였다.
● 대중적 항일투쟁의 활성화
사회주의 사상은 3·1운동 이후 크게 활발해진 청년, 학생 운동, 농민, 노동 운동, 여성 운동 등 대중적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 사상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않은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청년, 학생 단체는 주로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 수양과 계몽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많았다. 덕(德), 체(體), 지(智)의 수양, 교육의 진흥, 민족산업의 육성 등을 내세웠고, 금주(禁酒), 금연(禁煙)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많아짐에 따라 1922년경부터는 청년 운동의 주도권은 점차 사회주의 계열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활동 목표도 실력 양성보다는 무산 계급의 해방을 내세우는 경향이 많았다. 청년 운동의 새로운 지도 기관으로 출범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건설을 도모한다.', '조선 민족 해방 운동의 선구자가 될 것을 기한다.'는 등 사회주의 냄새가 솔솔 나는 강령을 내세웠다. 이와 같은 변화는 학생 운동이나 여성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 농민 운동을 조직화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또 있을 곳이 없어 길가에 방황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의 팔자이며 운수인가? 결코 팔자가 아니며 운수가 아니다. 다만 무리한 지주의 횡포에 기인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정당당히 무리한 지주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며 우리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여 한다.
대덕군 가수원리 임시 농부대회 선언문(1922년 11월)'
앞의 글에는 지주의 부당한 횡포와 수탈에 항거하려는 농민들의 투쟁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과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으로 지주의 권한은 더욱 강화된 반면, 다수의 농민은 영구 결작권을 상실한 기한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생활 여건이 크게 열악해졌다. 또한, 조선 농민은 소작료와 지세, 수리조합비 등 수확량의 50~80%에 이르는 각종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경제적 처지와 일본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겹쳐 3·1운동 이후에는 소작쟁의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20년대 전반기의 소작쟁의(小作爭議)는 주로 소작인 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농민들은 주로 시위나 농성의 형태로 쟁의를 전개하였으며,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거나, 경작과 추수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구 사항은 주로 소작료의 인하, 지세, 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이었으나, 1923년 이후에는 소작권의 이전을 반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지주들이 농민들의 소작료 인하 요구에 대하여 소작권의 박탈이라는 수단으로 협박하였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전반기의 대표적 소작쟁의로는 전남 무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가 있었다. 이 쟁의에서 소작인들은 악질 친일 지주인 문재철(文在哲)의 횡포와 일본 경찰의 억압에 맞서 1년여에 걸친 투쟁을 전개한 끝에 농민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소작쟁의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된다. 소작인 조합은 이제 자작농도 포함되는 농민조합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농민운동의 발전과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 속에서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이 독자적으로 수립되었다. 소작쟁의의 발생 및 횟수와 참가 인원수도 1920년대 전반기보다 크게 늘어났고, 쟁의가 장기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1929년 평북 용천군의 일본 토지 회사인 불이흥업이라는 기업의 농장에서 전개된 소작쟁의에는 수확량의 8할을 요구하는 농장 측의 횡포에 맞서 2천여명의 농민이 쟁의에 참가하였고, 지도부를 검거한 경찰서를 습격하여 구출하기도 하였다. 이 소작쟁의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고 경찰과의 빈번한 무력충돌로 검거된 농민만도 1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소작쟁의가 농민들의 생존권 수호 투쟁의 성격에서 점차 반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항일투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930년대에는 군국주의 체제로 전환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합법적 공간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농민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반제항일투쟁(反帝抗日鬪爭)에 앞장섰던 선진적 농민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빈농과 농업 노동자를 위주로 편성된 혁명적 농민조합을 만들어 비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혁명적 농민조합은 '토지를 농민에게',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 반일운동을 전개하였고, 일본 경찰과 지주들의 탄압에 맞서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합법적 지하 운동으로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의 투쟁은 좀 더 큰 단위로 연대하지 못하고 서로 고립된 채 분산적으로 활동하였고, 일본 경찰의 집중적 공격을 장기간 견디기는 어려웠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투쟁은 1930년대 전반기에 가장 왕성하게 전개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도 치열하게 계속되지만,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위축되었다.
한편, 3·1운동 이후 일제가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자 많은 일본 기업과 공장이 세워졌고, 조선인 자본가들의 기업 설립도 늘어나면서 이에 따라 노동자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렇지만 조선인 성인 남자의 임금은 일본인 성인 남자의 절반 수준이었고, 조선인 여성의 임금은 조선 남성의 절반 정도였다. 노동 시간도 조선인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는 일본인은 0.3%에 불과했던 것이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민족 차별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가운데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됨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따라 많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쟁의가 급증하였으며,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과 같은 전국적 규모의 단체도 등장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의 노동쟁의(勞動爭議)는 임금 인상이나 임금 인하 반대 등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내용을 요구하였는데, 점차 '단체 계약권 확립', '8시간 노동제 확립', '악질 감독 추방',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표적 노동쟁의로는 1921년 9월에 일어난 부산 부두 운반 노동자 총파업이 있다. 이 노동쟁의는 임금 인하에 맞서 약 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결속하여 10여일간의 총파업을 단행한 끝에 임금 인상에 합의하였는대, 어찌나 그 여파가 컸던지 파업에 참여도 안 한 다른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전조선신문배달조합총동맹', '전조선인쇄직공총연맹' 등과 같은 직업별 노동조합이 많이 만들어진다. 또한, '임금 인상', '대우 개선' 등의 생존권 요구뿐만 아니라 '전 민족의 이익을 대표할 유일당 수립',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민족적 학대와 혹사 근절' 등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노동자운동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1929년에 일어난다. 4개월간이나 지속된 이 노동쟁의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유감없이 보여 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투쟁이었다.
그 후 1930년대의 노동자운동에서는 농민운동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의 무력진압에 맞서 시위, 농성, 폭동, 공장 습격 등과 같은 비합법적 폭력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제의 공업화 정책이 집중된 북한 지역, 특히 함경남도 지방에서 가장 활발하였다. 1930년 5월 1일에 흥남공단에 뿌려진 격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 '노동자, 농민의 정부 수립' 등과 같은 혁명적인 구호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노동쟁의는 크게 위축되었다.
●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대중운동의 전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봉건적 차별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하여 발생한 계급적, 민족적 차별이 동시에 존재하였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에 이미 법제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신분적 차별 의식과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들 수 있다. 후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 또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더욱 강화되는 지주, 자본가 계급의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 운동, 형평 운동, 소년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여성 운동은 여성 교육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국권 피탈 이전부터 여성 선교를 목적으로 한 개신교 세력이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여학교가 세워져 1910년에는 그 수가 약 200여개나 되었다. 유관순(柳寬順)의 경우에도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은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이를 통해 정치, 사회 의식은 크게 높아졌다. 그 후 여성 운동은 여성 계몽과 종교 활동을 앞세우는 민족주의 계열 여성 단체와 여성해방, 계급해방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계열 단체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에는 이 두 계열의 여성운동가들이 단합하여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이라고 할 수 있는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였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지위 향상을 도모'한다는 강령을 내세우면서 '교육의 성적 차별 철폐', '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차별 철폐', '부인 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는 여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성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과거의 가부장적 권위를 뛰어 넘는 신식 여성도 등장하였다. 사회 변화에 따라 여성들만의 새로운 직업이 생기기도 하였고,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운전기사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여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식민지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열악하였다. 일제는 봉건적 관습으로 전해 오던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여성 차별을 법제화하였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 여성에겐 재산 소유권과 처분권이 인정되지 않았으며, 재산의 상속이나 친권 행사에도 많은 차별을 받았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동의나 허가 없이는 취업도 할 수 없었다. 노동 임금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여성 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는 운동은 과거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천한 신분으로 살아가던 백정(白丁)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백정들은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사회적 차별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호적에도 붉은 점 등으로 그 신분을 드러내야 했다. 이에 백정들은 진주에서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를 창립하고 다음과 같은 취지문을 발표하면서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 아래 형평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후 조선형평사는 전국으로 조직이 확대되었고, 다른 사회운동 단체와 연대하면서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지금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나온 어린이날 선전문의 구절이다. 1920년대에는 미래 사회의 주인인 어린이를 인격체로 대접하려는 소년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동학의 제2대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은 일찍이 "어린아이를 때리지 마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 하고 강조하였다. 방정환(方定煥)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천도교 소년회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라는 잡지도 간행하였다. 조철호(趙喆鎬)는 보이스카우트의 전신인 소년단을 창설하였다. 소년 운동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소년 운동 조직으로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가 결성되어 활동한다. 하지만 일제는 1931년부터 소년 운동을 탄압하였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금지시켰다.
●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앞장서는 학생들
학생층은 구한말 계몽운동(啓蒙運動)과 1910년대의 비밀결사운동(秘密結社運動)을 펼쳤고,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때에는 만세 시위를 촉발하는 등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이후에는 많은 학생 조직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학생 조직은 대체로 덕(德), 체(體), 지(智)의 수양과 계몽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했지만 점차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와 같이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 연구하는 단체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가장 일반적인 투쟁 형태는 동맹휴학(同盟休學)이었다. 등교 거부, 수업 거부, 교내 농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동맹휴학은 초기에는 주로 학내 문제나 일본인 교사 배척을 내걸고 비조직적, 충동적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6·10반일시위운동(六十反日示威運動) 이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서회나 비밀결사조직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동맹휴학도 훨씬 조직적이고 장기적으로 전개되었다. 학생들의 요구도 '식민지 교육 제도의 철폐'와 '조선어를 교수 용어로 사용하기', '조선의 역사와 지리 교육 실시' 등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주장하는 내용이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는 학생운동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는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제의 탄압으로 동맹휴학이 크게 줄어들고, 대신 학생들로 이루어진 비밀결사조직이 많이 결성된다. 학생 비밀결사조직은 소수 정예가 모여서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는 독서회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대중적 투쟁을 전개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 6·10반일시위운동(六十反日示威運動)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일어났듯이, 6·10반일시위운동(六十反日示威運動)은 순종(純宗)의 인산을 계기로 일어났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이며 대한제국의 두번째 황제였던 순종이 승하하자, 제2의 3·1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일제(日帝)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선 공산당을 중심으로 천도교계, 노동자 단체, 학생운동 단체 등이 서로 연대하여 거족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이를 감지한 일제는 무려 1만명 이상의 애국지사들을 사전에 검거하여 투옥했고, 이로 인하여 거족적 시위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비롯한 일부 학생 단체들은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인산 행렬을 따라가며 모여든 군중에게 격문을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이에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또한, 지방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이에 호응하였다.
6·10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사전 봉쇄로 3·1운동처럼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사회주의 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민족운동의 이념과 노선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3·1운동 때의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과 그로 인한 민중의 고단한 현실에 대한 구체적 비판이나 고발 없이 난해하고 현학적인 표현만 담고 있었다. 이것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와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의존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던 당시 민족 지도자들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6·10운동 때의 격문에는 '동양척식회사를 철폐하라!', '일체의 납세를 거부하라!', '일본인 공장의 직공들은 총파업하라!', '일본인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지 말자!' 등의 경제 투쟁의 구호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일제 타도를 위해 민중이 실천해야 할 행동 지침과 투쟁 방법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6·10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조선 공산당은 천도교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는 장차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연대하여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 광주학생반일운동(光州學生反日運動)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향하는 통학 기차 안에서 광주 중학교에 다니는 일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성희롱(性戱弄)한 일이 계기가 되어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대규모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하여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만을 두둔하고 조선 학생인 박준채(朴準埰)를 구타한 뒤 주재소로 끌고 갔다. 그러던 중 11월 3일 일본 제122대 황제인 오무로 토라노스케[大室寅之祐; 明治帝]의 출생일 기념식에 동원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일본국가(日本國歌) 제창에 침묵으로 항의하고, 식이 끝난 후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일부 학생들은 사건에 대한 편파보도를 일삼은 광주일보(光州日報) 사옥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광주의 다른 학교 학생과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시위가 광주 전역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리고 관련 학생 70여명을 검거하였다.
첫번째 시위 직후 광주 지역 각 학교의 독서회를 통솔하던 독서회 중앙본부를 중심으로 각 청년 단체의 지도자들이 모여 학생 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였다. 학생 투쟁 지도본부는 일본 학생에 대한 투쟁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투쟁으로 한 단계 승화시킬 것을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11월 12일 광주 시내 각 학교가 참여한 두번째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후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전라도 전역과 서울로 확대되었고, 해를 넘겨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광주학생반일운동(光州學生反日運動)은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 이후 최대의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으로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학생운동이 종래의 동맹휴학에서 가두시위로 바귀었다는 점이다. 물론 6·10반일시위운동(六十反日示威運動) 때에도 가두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광주학생운동처럼 광범위한 학생 대중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둘째는 투쟁 구호가 운동 초기의 '조선인 본위 교육 실시', '검거된 학생 즉각 석방'에서 점차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피억압 민족 해방 만세!' 등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20년대 후반 학생운동의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원산 총파업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의 대중 투쟁의 활기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대중적 항일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 실력양성운동(實力養成運動)과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을 신봉한 20세기 초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나라가 위태로워진 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일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세력에게 계승되어 '먼저 실력을 기른 이후에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실력양성론(實力養成論)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실력양성이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무장력을 기르자는 것이 아니고, 경제, 문화 방면에서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키움으로써 일본이나 서구처럼 자본주의 문명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 산업의 육성, 신교육의 보급, 농촌 개량, 민중 계몽 등을 내세우는 실력양성운동(實力養成運動)을 활발히 전개한다. 그리고 민족의 역량을 모아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과 민립대학설립사업(民立大學設立事業)을 추진하였다.
실력양성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적 발전을 추구하고, 이를 통해 민족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살펴 볼 수 있다. 하지만 실력양성운동은 민족 독립의 실현이란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실력양성운동은 우리 민족이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원인을 포악한 일제의 무력(武力) 침략에서 찾기보다 민족 내부의 실력 부족에서 찾았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일제의 수탈정책을 비난하고 거기에 맞서 저항하기보다는 민중의 무지와 게으름을 먼저 탓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계몽운동에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실력을 먼저 길러야만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은 현재 상태에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럴 경우,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서지 않으면 언제라도 타협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민족주의 세력의 상당수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셋째, 실력양성운동은 대체로 일제가 문화정책을 통하여 허용하고, 범위 안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적극적인 항일투쟁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고, 일제의 탄압에 쉽사리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다.
3·1운동 이후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막아 내려는 경제적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조선인들 중에서도 공장과 기업을 세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는 중에 일제는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920년에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였고, 조선에 대한 상품 판매를 확대하기 위해 1923년에 일본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철폐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산품의 사용을 장려하는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 처음 시작되자,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도 자작회(自作會) 등의 이름으로 많은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후 1923년 1월 각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갔다.
물산장려운동은 처음에는 토산품 애용 의식을 심어 주는 등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갈수록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사회주의자들도 물산장려운동이 상인과 자본가 등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운동이라고 비난하였다.
토산품을 이용하여 민족 경제를 일으키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어째서 외면당하고 비난받게 되었을까? 물산장려운동이 토산품 이용을 장려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보호하고 이를 통해 민족 자본 축적을 도모하려는 의도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이 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계 인사들은 애초부터 반일 의식을 배제하고 시작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본 상품 배척과 같은 좀더 적극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또 일부 상인의 농간으로 상품 가격이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지만 식민지 대중들의 적극적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선전, 계몽 활동만으로 이어져 갔다.
● 구국교육(求國敎育)을 내세운 민립대학설립사업(民立大學設立事業)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시켜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응하게 하고, 기초적인 실업 교육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이용할 하급 기술 인력을 양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맞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일어났다.
먼저 민간 차원에서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을 설립하려는 민립대학설립사업(民立大學設立事業)이 1923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민중의 보편적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도 가능하지만 심오한 지식과 학문은 고등 교육이 아니면 불가'하며,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취지를 내세우며 대학 설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하지만 이를 정치적 운동이라고 파악한 일제의 방해와 탄압, 모금 실적의 부족 등으로 실패하고 1925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한편, 이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고등 교육보다 대다수의 문맹 인구를 줄일 수 있는 대중 교육이 더 시급하다는 반론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조선인의 고등 교육 기관 설립에 대한 열기를 무마하기 위해 서둘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설립하였다.
민족교육운동은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보다 대중 교육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중을 깨우쳐 독립의 기초를 세우려는 취지 아래 많은 수의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이 설립되어 일제의 식민지 우민화 교육에 저항하였다. 특히 1920년대에는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이 일제의 탄압으로 수가 줄어든 반면, 야학의 설립은 크게 늘어나 전국적으로 2천여개나 되었다. 일제가 세운 공립 보통학교는 수용 능력이 부족하였고, 학비도 무척 비쌌기 때문에 야학이 더욱 많아진 것이다. 야학은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자녀뿐만 아니라 성인까지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야학은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을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노동쟁의, 소작쟁의가 활발히 일어나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로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 일제와 영합한 자치권운동(自治權運動)
3·1운동 이후 일제가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책은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친일 세력을 적극 양성하여 민족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부합하여 민족주의 세력 내에 일제와 타협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이광수(李光洙)는 1922년 5월 '개벽'에서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이란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우리 민족성을 '거짓되고 공상과 공론만을 즐겨 게으르고,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비하여 용기가 없고, 극히 빈궁하다.'고 단정짓고 이를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이고, 민족성을 개조하지 않고는 독립도 이룰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열등감을 강조하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
타협론자들은 이와 같은 민족성 개조의 바탕 위에서 조선의 경제, 문화적 처지를 개선하려는 민족개량주의의 입장에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 속에서도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대지주, 예속 자본가, 친일 지식인들이었다. 그 대표적 집단으로는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이광수 등 동아일보(東亞日報)계와 최린(崔麟)의 천도교 신파 세력이 있었다. 과연 이들 타협론자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과 민립대학설립사업(民立大學設立事業)의 열기가 차츰 식어 가던 때에 다음과 같은 글이 발표되었다.
'그러면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한다는 것이 첫째 원인이다. 또,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해야만 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활권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하는 독립운동조차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이 있었던 것이 둘째 원인이다.....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이광수(李光洙) '민족적 경륜' 동아일보(東亞日報), 1924년 1월
위 글에서 이광수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단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고, 그 아래에서 조선인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바로 타협론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되자 사회주의계의 주도로 동아일보 불매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 주장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도 조선에 대한 자치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식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이에 천도교 신파의 최린은 일본에 건너가 정치인들을 상대로 조선 의회를 설립하여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는 자치권 운동을 이용하여 조선의 민족운동을 이간질하고 분열시키려 하였을 뿐이었다. 결국, 타협론자들이 추진한 자치권 운동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1930년대 초에 완전히 막을 내린다. 그리고 타협론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더욱 악랄해져 간 1930년대 후반에는 적극적인 친일 협력의 길로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자치권 운동의 본질이 독립의 유보가 아니라 사실상의 포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타협에서 친일 협력으로 변질의 길을 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주의 세력은 실력양성운동(實力養成運動)의 일환으로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토지를 농민에게!'와 같은 주장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고, 소작쟁의와 같이 계급 갈등을 전제로 한 농민 운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반면, 당시 농촌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문제들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촌계몽운동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적으로 전개되었고, 정치적 성격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은 농촌의 문맹 퇴치와 교양 수준의 향상, 농민 생활의 질적 개선, 보건, 위생 의식의 확대, 농업 생산성의 향상 등에 역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농촌계뭉운동을 주도한 것은 종교 단체와 언론 기관이었다. 천도교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와 개신교의 기독교청년회[YMCA] 등은 한글 보급, 보건 교육 등의 농촌계몽운동과 더불어 협동조합운동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언론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전 인구의 10000분의 20밖에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취학 연령 아동의 10분의 3밖에 학교에 갈 수 없는 조선의 현실에서 간단하고 쉬운 문자의 보급은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라 하겠다.....
조선일보(朝鮮日報), 1934년 6월 10일자'
1929년 신간회(新幹會)에서 이탈한 조선일보(朝鮮日報)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문자보급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협조를 얻어 '한글원본'이란 책을 널리 배포하고, 전국 순회 조선어 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아일보(東亞日報)도 이에 질세라 1931년부터 브나로드(Vnarod)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지도하여 문맹을 퇴치하고 위생 의식을 보급하는 등 농촌 계몽에 나섰다.
일제는 농촌계몽운동을 처음에는 단순한 문화운동으로 생각하여 방관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에 의해 민족운동의 색채를 띠게 되자 1935년부터는 완전히 금지시켰다.
농촌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의 현실적 문제점과 폐해를 개선하기 위한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농민의 빈궁한 생활이 그들의 무지와 게으름보다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수탈과 지주 계급의 착취에 좀더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 노동자 운동에 비하여 항일투쟁의 강도가 매우 약했고, 이 운동을 추진한 천도교 신파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계열의 인물들 대부분은 결국 친일 세력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운동에 뛰어들어 젊음을 바친 수많은 학생들의 정성과 노력만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부터 자치권 운동,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던 타협론자들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시체제를 강화하자, 대부분 적극적인 친일 협력의 길을 걸어갔다. 그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우선 그 대표적 인물인 최린(崔麟)을 살펴보자. 그는 3·1운동 때의 민족대표의 한 사람에서 1920년대에는 자치론을 주장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더니 193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적극적은 친일 활동가로 굴절된 삶을 살았다. 어떤 이는 그를 두고 친일 행위보다 변절이 더 밉다고 말했다. 그만큼 최린은 민족 지도자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었다. 근대 문학의 대표적 인물로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을 쓴 최남선(崔南善), 조선청년독립선언(朝鮮靑年獨立宣言)을 쓴 이광수(李光洙)의 경우는 비교적 친일 활동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1920년대에 이미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내면서 지금의 고려대학교를 키운 김성수(金性洙)나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활란(金活蘭) 등은 관련 대학에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지금도 세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도 중일전쟁 이후 각종 친일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라디오 강연이나 시국 순회강연 등을 통해 징병제를 찬양하고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등 일제의 전시동원체제와 그 선전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귀한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내지(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 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황국신민으로서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김활란(金活蘭) '징병제와 여성의 각오' 신시대(新時代), 1942년 12월호'
이상과 같은 몇몇 대표적인 인물과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20년대의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결국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 협조하는 친일 협력의 대열에 앞장섰다.
친일 세력은 19세기 후반 일제의 조선 침략과 더불어 이미 등장하였다. 그후 일제의 국권 강탈 과정과 식민통치 시기에 민족을 배반하고 매국, 친일의 길을 걸어간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크게 다음의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국권 피탈 이전부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을사조약(乙巳條約) 또는 한국 병합 조약의 체결 과정에서 매국 행위를 한 경우가 있는데, 이른바 친일 1세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매국 협력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막대한 양의 토지를 받았고, 이를 자식에게 대물림해 주었다. 그저 잘 알려진 인물 몇명만 추려 보면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과 송병준(宋秉畯), 이용구(李容九) 등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 부르는 일진회(一進會) 관련자를 비롯하여, 친일 개화 인사로 일제에 협력하고 작위를 받은 박영효(朴泳孝)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 하나의 유형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적극적인 친일을 한 경우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에 관료, 경찰, 군인, 판검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동포들을 괴롭히고,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한 자들이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박춘금(朴春琴), 송종헌(宋鍾憲) 한상룡(韓相龍) 등 일본의 제국의회에서 활동한 자들과 홍사익(洪思翊), 김응선(金應善), 박정희(朴正熙), 백선엽(白善燁) 등 일본 군인으로 활동한 자들, 계광순(桂珖淳), 김대우(金大羽) 등 경찰 간부나 관료로 있던 자들이 여기에 포함되는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는 광복 후에도 독재정권에 협력하면서 자기 분야의 고위직에 오른 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한때 민족주의 세력을 자처하다가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거나 일신의 안위와 기득권의 유지를 도모하여 일제에 적극 협력한 경우가 있다. 이들은 식민지 수탈 경제체제에서 성장한 예속 자본가와 지주, 그리고 교육자, 학자, 종교인, 언론인, 문학인, 예술가 등 부르주아 지식인들인데,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대외침략정책과 전시동원체제에 적극 협력하였다. 앞에 언급한 타협론자들은 대부분 여기에 속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다른 유형에 비해 자기 분야의 명망가들이 많았고 한때는 민족주의 계열에 몸담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있어서, 누구보다도 대중적 영향력이 큰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친일 행위는 우리 민족에게 더욱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친일 행위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이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학계, 언론계, 경제계, 문화, 예술계 등을 주도하면서 우리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신간회(新幹會) 창립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서로의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고 단일화된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민족협동전선운동(民族協同戰線運動)이라 한다.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安昌浩), 원세훈(元世勳), 조성환(曺成煥) 등을 중심으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가 1926년에 개최되었는데,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영향을 받았다. 만주에서도 참의부(參議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등 독립운동 세력들이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전개하였다.
국내에서도 1926년 6·10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등 민족주의 세력이 연대함으로써 민족유일당이 형성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또한, 1926년 7월에는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계열의 민족주의 세력과 일부 사회주의 세력이 손잡고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결성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민족유일당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6·10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은 사회주의 계열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그것이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할 것을 밝히는 '정우회 선언(正友會宣言)'을 발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대하여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국내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였다.
'첫째,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둘째,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셋째,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1927년 11월 신간회 강령(新幹會綱領)'
신간회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하기 위해 항일투쟁(抗日鬪爭)과 관련된 적극적인 구호를 생략했다. 그러나 타협론자들의 자치권운동(自治權運動)을 철저히 배격하고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서로의 이념,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하나로 뭉쳐서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을 전개하려는 뜻을 품었다. 신간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천도교 구파, 조선일보(朝鮮日報)계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 그 밖에 불교 및 기독교 대표 등이 모여 창립하였다.
민족 유일당인 신간회(新幹會)는 창립되자마자 대중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특히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등 대중 단체의 회원이 적극 참가함으로써 1928년 말에는 총 143개의 지회에 회원 수가 2만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당세(黨勢)를 확장하였다.
신간회 활동이 지닌 큰 의미는 사회주의 운동이 철저히 탄압을 받고, 여러 대중 단체들의 집회도 완전히 금지된 상황에서 민족운동의 합법적 공간을 확보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간회는 각 지회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강연회와 연설회 개최, 노동쟁의와 소작쟁의, 동맹휴학 지원 활동, 만주 독립군 군자금 지원 활동, 수재민 구호 활동 등 민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신간회는 광주학생반일운동(光州學生反日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전국적인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대규모 민중 대회를 개최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집행위원장 허헌(許憲)과 홍명희(洪命熹), 한용운(韓龍雲) 등 신간회 간부 44명을 검거함으로써 중단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은 신간회는 새로이 집행부를 구성하였으나 자치론자인 천도교 신파의 최린(崔麟)과 협력을 도모하는 등 개량화된 경향을 보였다. 기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신간회가 기회주의자와 손을 잡으려 한 중앙 집행부의 태도에 대하여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론을 주장하였다.
해소론자들은 신간회가 '소시민의 개량주의적 정치 집단으로 변질'되어, '무산 계급의 투쟁욕 성장에 장애'가 된다고 규정하고 좀더 강력한 계급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노동자는 노동조합으로, 농민은 농민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비타협적 민족주의계의 안재홍(安在鴻)은 '조선인의 대중 운동의 목표는 정면의 일정한 세력을 향해 집중되어야 할 것'이며,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은 동지적 협동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신간회 해소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1931년 5월 창당대회 이후 두번째로 열린 전체대회에서 신간회 해소가 결정되었다. 신간회가 해소되자 연이어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와 여성계의 민족유일당인 근우회(槿友會)도 해소되었다.
신간회 해소는 국내 민족운동 전선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연대가 깨지고,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가 사실상 해체된 것을 의미했다. 그후 민족주의 계열은 이를 대신할 새로운 민족운동 단체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정치, 경제적 투쟁보다는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국학운동, 고적보존운동 등 문화, 학술적 활동에 주력하였다. 반면, 신간회 해소로 사실상 합법적 활동 공간을 상실한 사회주의 계열은 당 재건 운동과 더불어 혁명적 농민조합, 혁명적, 노동조합, 반제동맹 등 혁명적 대중 조직을 통한 비합법적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하였다.
● 무장봉기론(武裝蜂起論)의 대두와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결성.
중일전쟁(中日戰爭) 이후 일제가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강화하면서 국내에서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은 갈수록 어려워져 갔다.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하던 농촌계몽운동(農村啓蒙運動)과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은 1935년 이후 이미 금지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아예 학술, 언론 활동까지 금지되고, 사상의 자유마저 완전히 억압당하였다. 심지어 친일 활동에 열을 올리던 조선일보(朝鮮日報)와 동아일보(東亞日報)마저 한글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폐간되기도 했다. 1942년 국어 연구 단체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일제(日帝)에 의해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변혁(國體變革)을 도모한 반일운동 단체'라는 죄명을 쓰고 강제 해산되면서 이극로(李克魯), 이윤재(李允宰), 최현배(崔鉉培) 등 조선어학회 소속 국어학자들은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에 의해 형사 처벌되었다. 이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은 조선 고유의 언어와 문자인 한글을 보존하는 연구 활동을 탄압하여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일제(日帝)의 악랄한 만행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당 재건 운동이나 혁명적 대중 운동은 1930년대 후반에도 계속되었지만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이후로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일제의 사상 탄압이 강화되어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검거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결과적으로 일제가 패망하게 된다는 믿음이 저점 커졌다. 특히, 1944년 여름 미국 공군의 항공기가 서울 상공에 출현했고, 1945년 5월부터 미국 공군의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이어졌다. 총독부는 일본군이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고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다고 선전하였지만 국내에서는 단파 방송과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접촉이나 풍문 등을 통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이에 반일(反日), 반제(反帝)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일제의 패망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나타난 것이 무장봉기론(武裝蜂起論)과 비밀결사운동(秘密結社運動)이었다.
무장봉기론이란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결정적 시기에 국외의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세력이 국내로 진격해 오면 국내에서 이에 호응하여 민중 봉기를 감행함으로써 일제를 몰아낸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미리 가정하여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많은 비밀결사조직이 만들어져 활동하였다. 당시 총독부의 어느 고위급 관리가 "1944년말 경부터 위기라고 생각했다. 조선인들은 언제 어디서 폭동을 일으킬지 몰랐다." 하고 회고한 것을 보면 점차 반일 무장봉기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패망을 1년 앞둔 1944년 8월 10일에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이 결성되었다. 조선건국동맹은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함께 참여한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중앙 조직뿐만 아니라 전국 10개도에 책임자를 임명하여 지방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국내의 무장봉기를 지도할 군사위원회도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에 연락원을 파견하여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의 합동작전을 계획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조선건국동맹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로 발전하였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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