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어이 일어난 비극
격화되는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분단 국가의 수립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국내 지주 세력의 협조와 미군정에 참여했던 친일 관료 세력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등 우익 계열의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민중과 연결된 좌익 세력의 광범위안 반발에 직면한다. 좌익 세력은 4·3제주봉기(四三濟州蜂起)와 10·19여순반란사건(十一九麗順叛亂事件) 이후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유격지구를 설치하고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반면, 토지개혁 등 각종 개혁을 통해 빠른 속도로 안정된 국가체제를 구축한 북한은 이른바 '조국 해방 전쟁'을 일으켜 '미국 제국주의 세력과 그 꼭두각시인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키겠다'는 무모하고 비극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련과 군사비밀협정을 맺어 항공기와 탱크 등 많은 군사장비를 지원받았고 중국 공산당 소속의 조선인 군인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을 수립한 것도 북한 정권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대남(對南) 전면전에 사전 동의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0년 1월 16일에 미국, 한국 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기에 앞서 애치슨(D.G. Achcson) 국무장관이 태평양 지역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고 발표하는 등 정책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8선 부근에는 크고 작은 무력(武力)충돌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이미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전면전이 발발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북진통일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드디어 북한은 사전 선전포고 없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였다.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하여 이른바 낙동강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 지역을 장악한 시기이다. 개전 초기 이승만은 대전(大田)으로 피신한 채, 정부군이 적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하고 있으며 서울을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거짓 방송을 하여 여러 차례 내보내는 등 지도자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치사한 행동을 벌였다.
두번째 단계는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미국군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의 국제연합군이 참전한 시기이다. 국제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을 감행하여 1950년 9월에 서울을 수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세번째 단계는 북한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의 참전으로 전쟁이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는 국제전(國際戰)으로 확대되는 시기이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대장의 북한 및 만주에 대한 원폭공격 계획이 거부된 상태에서 남한군과 국제연합군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다시 서울을 내주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반격하여 서울을 되찾은 후 전쟁은 38도선 부근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전개되면서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네번째 단계는 소련이 전쟁의 확대를 우려하여 휴전(休戰)을 제의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휴전은 군사분계선의 설정과 포로송환문제 등으로 난항을 거듭하여 무려 2년이나 전쟁을 더 끌고 갔다. 이승만 행정부와 국민들이 분단의 고착화를 우려하여 휴전반대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결국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과 미국은 1953년 10월에 '한국, 미국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미국군의 계속적인 한국 주둔을 공식화하였다.
● 전쟁이 남긴 것은
전쟁이 할퀴고 간 한반도는 폐허와 통곡만 남았다. 3년 1개월 동안 진행된 6·25남북전쟁에서 150만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남한 산업 시설의 절반 가까이가 파손되었다. 북한 지역은 미국 공군의 무차별적 폭격으로 더욱 큰 피해를 입었다.
남한과 북한이 한반도의 대부분을 교차 점령하면서 학살과 보복이 점철되었고, 이는 남북간의 적대감을 고조시켜 민족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은 남북간의 무력적 긴장 상태를 이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장기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북한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전쟁 중에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로 여겨진 연안파의 김무정(金武亭)을 숙청하였고, 뒤이어 소련파와 남로당계도 차례로 제거되었다. 남한에서도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학살하거나 월북자의 가족에 대해 연좌제를 적용하는 등 반공 극우 이데올로기를 크게 강화하였는데, 이는 이승만 독재정권 유지에 기본 수단이 되었다.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도 전쟁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인구 이동이 극심하게 일어났다. 북한에서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였고, 농촌 사람들이 먹고살 길을 찾아 도시로 이동하였다. 인구 이동으로 촌락 공동체나 대가족 제도 등 전통적 사회 구조가 크게 흔들렸고, 이산가족이 양산되었다. 또한 미국의 경제, 군사적 원조 속애서 서구의 대중문화가 무분별하게 유입되면서 우리의 전통적 가치 규범이 무너지고, 전통문화를 경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국제전의 양상을 띠고 전개된 6·25남북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냉전 구조를 더욱 심화시켰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으며,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감소한 대신 중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한편, 전쟁 특수를 크게 누린 패전국 일본은 경제 부흥의 기클을 잡아 갔다. 미국은 대륙의 소련, 중국 연합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일본의 군비 강화와 경제 부흥을 서둘렀다.
●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
6·25남북전쟁처럼 그 원인과 성격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전쟁도 매우 드물 것이다. 한때는 남침이다 북침이다 하면서 논란도 많았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에 의해 전쟁이 촉발되었다는 '남침론(南侵論)'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우선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정책과 김일성 정권의 적화통일 추구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소련이 수많은 군사장비를 북한에 지원해준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반면, 미국에 의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된 것은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을 방해한 것이며, 미국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전쟁을 유발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소위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된 점과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가 북한으로 이동하는 것을 미국이 몰랐을 리가 없는 데도 미국이 사전 대비하지 않은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6·25남북전쟁의 성격도 다양하게 분석된다. 우선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냉천 체제 속에서 대립하고 있던 미국, 소련 사이의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내전이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남북 양자가 무력에 의한 통일을 시도한 '민족통일전쟁'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한이 압록강까지 진격한 것은 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삼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 전쟁 기간 중의 민간인 학살
6·25남북전쟁중에는 군대와 경찰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개전 직후부터 전국적으로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어 최소 5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형무소 재소자들도 집단적으로 학살되었다. 남한 정규군이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3백여명의 어린이를 비롯한 719명을 무차별 학살한 1951년 2월 '거창 양민학살사건', 미국군에 의해 자행된 1950년 7월 충북 영동읍의 '노근리 학살사건' 등이 대표적인 참극이었다.
미국군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항공기 기총 사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사건은 1999년에야 세계의 주목을 받아 본격적 조사가 착수되었는데, 영동군청에 사망 177명, 부상 51명, 행방불명 20명 등의 피해 신고가 접수되었다. 또한, 함평, 산청, 문경 등 수많은 지역에서도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대부분의 양만학살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리던 군사독재시대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양민학살 이외에도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들을 아무런 사법적 절차도 없이 무차별 학살한 경우가 많았다.
한편, 정부는 중국군의 참전 직후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청,장년을 소집하여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였는데, 간부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려 1백만명의 장정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1천여명의 장정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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