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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9제2차 여당전쟁과 연개소문의 사망 ⑵

개마기사단 |2011.10.16 23:29
조회 132 |추천 0

●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실패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고구려

 

이렇게 유일한 동맹국 백제가 패망함으로써 고구려는 완전히 고립됐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토록 막강하던 고구려와 백제의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상실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3천여척의 군선에 나누어 싣고 마음 놓고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오로지 신라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백제는 당나라의 국가안보에 거의 해가 되지 않았지만, 단지 고구려의 동맹국이며,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는 이유로 망국지화를 맞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이는 결국 고구려를 포위 공격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자신감으로 고구려를 정벌할 대규모 군대를 편성했다.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이 패강도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좌효위대장군 유백영(劉伯英)이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정주자사 정명진(程明眞)이 루방도행군총관(鏤方道行軍摠管)으로 각각 임명됐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고구려로 출정하지 못했다. 백제부흥운동 세력의 끈질긴 저항 때문이었다.

 

풍달군장(風達郡長)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성(任存城)에서 병력을 정비하여 소정방의 군대와 벌어진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순식간에 군사 3만을 모았다. 뒤이어 남잠성과 정현성에서도 부흥군이 거병하였고,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는 좌평 정무(正武)가 군사를 모아 신라군을 공격하였다. 한편 백제의 왕족(王族)인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저항하면서 당군이 점령하고 있는 사비성에 대한 탈환을 시도하였다. 한편으로는 귀지(貴智)를 왜국으로 보내 지원군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열왕이 친솔(親率)하는 신라군이 백제부흥군의 거점 가운데 하나인 이례성(爾禮城)을 함락시키자, 이례성 주위의 10여개 성이 모두 신라군에게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복신의 군대는 사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劉仁願) 휘하의 당나라 군사들과 후방을 교란하는 신라군으로부터 협격을 받아 대패하고 흑치상지가 주둔하고 있는 임존성으로 퇴각하였다.

 

왜국의 제명여왕(斉明女王)은 백제 무왕(武王)의 사촌 누이동생으로 백제부흥운동을 군사적으로 원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비조(飛鳥)에서 근무하던 부여풍(扶餘豊)을 백제 땅으로 돌려보냈다. 흑치상지가 지키고 있는 임존성은 복신과 도침의 합류에 이어 부여풍까지 당도함으로써 명실상부 백제부흥군의 중심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부여풍이 귀국한 이후 복신과 도침, 부여풍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침은 정통성을 내세워 부여풍 왕자가 백제의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복신으로서는 도침에 대해서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침은 부여풍을 등에 업고 영군장군(領軍將軍)을 자칭해 군사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자 복신은 이에 반발하여 자칭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고 자신의 세력을 규합했다. 두 사람이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자 흑치상지가 이들 사이에서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복신과 도침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는 부여풍에게 사신을 보내 “당나라의 조정에서는 백제 땅을 신라에 편입시킬 생각이 없으니 부여풍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해 실질적인 백제의 통치자로 인정할 것이다”는 뜻을 전했다. 물론 이것은 복신과 도침을 이간질하는 유인궤의 계략이었다. 

 

나중에 궁중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 유인궤가 보낸 사자가 다녀갔는데, 부여풍에게 웅진도독의 벼슬을 제수하겠다는 당나라 측의 제안을 도침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복심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우리가 군대를 조직해서 당군과 싸우는 것은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몇몇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도침이다. 도침이 어라하의 눈을 가리고 전횡을 일삼으니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저 간악한 도침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 저항군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복신은 마침내 도침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당나라의 유인궤가 신라의 김흠(金欽)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임존성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데 백제부흥군은 내분이 시작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거의 손을 놓고 있다가 유일한 동맹국 백제가 멸망하는 실책을 뼈저리게 느끼고 때늦었지만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는 군사작전에 적극 나섰다. 그 해 11월에 대모달(大模達) 뇌음신(惱音信)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략하여 성주인 필부(匹夫)의 목을 베고 성을 점령한 것도 백제부흥군을 돕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연개소문은 이듬해 5월에도 뇌음신으로 하여금 연정토의 친구인 말갈족 장수 생해(生偕)와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술천성(述川城)과 북한산성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한편,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돕기 위해 출정했던 김흠 휘하의 신라군 3만은 탄현을 넘어 사비성으로 가지 않고 고사비(古沙比)에 주둔하면서 단독으로 복신의 군대와 고비천 일대에서 맞붙었다. 복신의 군대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밀리면서 우금산(禹金山) 쪽으로 달아났다. 김흠은 후퇴하는 백제군을 뒤쫓아 개암골에 들어섰다가 매복작전에 휘말려 8천여명의 군사가 사살당하는 피해를 입고 군대를 퇴각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백제부흥군은 사비성과 웅진성을 제외한 옛 백제 땅 전역으로 그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부여풍은 제장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의 건승을 비는 의미로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복신이 숨겨둔 갑사들이 느닷없이 연회장을 덮쳐 도침을 척살했다.

 

복신은 도침이 당군과 내통하여 백제부흥군을 배신했다면서 그를 살해한 정당성을 밝히고, 부여풍을 협박하여 임존성을 떠나 피성(避城)에 도읍을 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피성은 신라군의 주둔지역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고, 지대가 낮아 적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무열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임금이 된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즉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백제부흥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남부 피성 주위의 거열성, 거흘성, 사평성, 덕안성 등이 신라군에 의해 점령되자 부여풍은 급히 신하들과 의논하여 주류성으로 피할 것을 결정했다. 당장 신라의 대군과 정면으로 붙어봤자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주류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자, 복신의 굳건했던 지위가 흔들렸다. 피성 천도(遷都)의 실책으로 인해 그의 권위가 손상되었을뿐 아니라 주류성에 터를 잡고 있는 도침의 잔존세력이 부여풍과 손을 잡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마지못해 복신에게 눌려 지내던 귀족들도 부여풍 쪽으로 돌아서며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복신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을 공격했으나 유인원(劉仁願)이 이끄는 당군에게 패배하고 지라성과 윤성을 빼앗겼으며, 진현성(眞峴城)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또 패배하여 많은 군사와 장비를 잃었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는커녕 패장의 멍에까지 짊어지게 되자, 복신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때부터 부여풍은 노골적으로 복신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마침내 복신은 수하들과 모의한 끝에 칭병을 하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부여풍이 문병을 오면 잡아 죽이려고 수십명의 장사들을 무장시켜 집 안에 몰래 배치했다. 그러나 부여풍은 복신이 병을 핑계로 자신을 유인하여 죽일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고 충고한 왜국의 장수 박시전래진(朴市田來津)의 말에 따라 5백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복신의 집을 역습하여 그를 결박했다. 부여풍의 병사들이 복신을 처형하자 백제부흥군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복신을 따르던 병사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몰래 주류성을 빠져 나가 도망쳤다. 그리하여 백제부흥군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복신이 부여풍에게 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유인궤는 이를 백제부흥군을 섬멸할 기회로 여기고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했다. 먼저 황제인 고종에게 증원군 파병을 상주하고 신라의 문무대왕에게도 전군을 동원할 것을 요청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동안의 열세를 만회하고 백제부흥군의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장안성(長安城)의 고종은 손인사(孫仁師)에게 5만 대군을 주어 바다를 건너 유인궤를 돕도록 했고, 더불어 백제부흥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백제의 왕자 부여융(扶餘隆)을 함께 보냈다. 문무왕 또한 몸소 정예군을 이끌고 웅진성에 당도해 당군과 합류했다. 이로써 전열을 정비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은 주류성의 백제부흥군과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을 펼쳤다.

 

며칠 후, 여원군신(如原群臣)과 간인연대개(間人連大蓋)가 이끄는 왜군 선단이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백강에 도착했다. 왜군의 병력은 병사 3만에 군선 5백여척이었다. 부여풍은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이라면 충분히 나당연합군을 섬멸할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왜장들에게 당 수군이 주둔하고 있는 기벌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백강 어귀에서 벌어진 네 차례의 전투에서 왜군은 2만의 병사가 몰살당하고 4백척의 군선이 격침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대패하였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여풍은 이제 고구려의 도움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연개소문을 만나서 구원을 청하기 위해 배를 타고 고구려 땅으로 향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왜군이 참담한 패배를 맛보자 주류성에서 항전하던 백제부흥군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었다. 주류성은 결국 나당연합군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주류성을 함락시킨 유인궤는 여세를 몰아 임존성으로 향했다. 흑치상지는 복신이 죽고 주류성마저 함락당하자 전세는 이미 기울었음을 절감하고 성문을 몰래 빠져나와 유인궤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 흑치상지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지수신(遲受信)은 끝까지 임존성에 남아 항전했다. 그러다가 임존성이 마침내 함락되자, 그는 이민족인 당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싫다며 부하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이로써 마지막 남았던 부흥군마저 소멸되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백제는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백제가 완전히 붕괴되자 당나라는 마침내 그동안 미뤄두었던 고구려 원정을 단행했다. 661년 4월에 고구려원정군의 편제가 대폭 수정되는데, 임아상(林娥相)이 패강도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 계필하력이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 방효태(龐孝泰)가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 소사업(蕭嗣業)이 부여도행군총관(夫餘道行軍摠管)으로 각각 임명됐으며 정명진은 루방도행군총관으로 유임되어 6개 방면군 35개 군단 4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치게 했다.

 

연수영의 퇴장과 백제의 멸망으로 서해의 주인은 더 이상 고구려와 백제 수군이 아니었다. 당 수군은 마음놓고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침공한 당 육군의 역할은 오로지 양동작전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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