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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예수~ 프랑스에 망명후 80세쯤에 죽음?

진실은? |2011.11.06 00:56
조회 652 |추천 1

제가 쓴글이 아닙니다.

 

이 내용은 "성경이 사실이란 증거?"란 질문에 대한 어느분이 답변한 내용입니다.

 

이런것도 있으니 진실여부는 각자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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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는 사실이 영국의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영국 BBC 방송국의 기자 세 사람은 10여년 간의 조사 끝에 1982년「성혈과 성배」(TheHoly Blood And The H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하여 위와 같은 놀라운 내용을 밝힌바 있는데 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녀까지 두었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구세주 행세를 하며 다윗 왕을 계승하여 유대의 왕이 될려다가 유대인의 반발로 인해 처형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예수의 처남 아리마대의 요셉을 통하여 많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연극을 하고는 그 뒤 부활의 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에 프랑스로 망명을 하였다.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자녀들과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를 넘게 살다 죽었다.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동화되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기독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혈족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로아 드 부 이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다.
이러한 예수가의 비밀에 대해 성당 기사단(聖堂騎士團, 1118년 예루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소수도원이라는 유명한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다. 그것이 중세 성당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기독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기독교인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심판사는 판결을 미뤄오다 빨리 판결하라는 법원의 독촉을 받고 판결하기를 나도 3대째 예수를 믿어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84살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예수는 로마 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라고 판결을 하였다.

이에 이러한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법정 방청석에서 옷을 찢고 통곡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지고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란이 영국 전역에서 확대되어 영국정부에서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재판과정을 지켜본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약 80%가 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하였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도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는 등의 소동이 이어졌다. 1982년 처음 책이 나와 세계적인 화제가 되자 대한 민국에서는 전 언론(동아, 조선, 중앙, 부산일보등)에서 보도(사진3 :1982.2.20자 동아일보 )를 하였으나 재판과 판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도가 없었다.
The UK population: by religion, April 2001
그래서인지 기독교가 급격히 퇴락하던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와 달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계속해서 급성장하는 이변을 낳았다.

그리고 또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성의(聖衣)라고 하여 기독교와 로마 교황청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증거로 삼던 세마포(토리노 성의로 불려왔음)가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을 감쌌던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 분석과 여러 가지 문헌의 고증에 의해 밝혀진 바 국내에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앨마 그루버, 홀거 케르스텐 지음, 홍은진 번역, 아침이슬 간행)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토리노 성의는 1세기 때 부터 유대와 유럽의 교회와 왕가에 때로는 공개 전시 되며 보관 되어오다 1460년에서 1983년까지 성의를 보관해 오던 사보이 왕가에서 교황청에 기증을 하게 되어 현재 로마 토리노의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시체에는 필요가 없는 100근(40kg)이나 준비 된 상처 치료제인 몰약과 침향 (알로에추출물)(요한복음19:40)과 피, 땀 등에 의해 얼굴과 전신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 토리노 성의는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상처 입은 산사람을 싼 세마포라는 것이 밝혀져 오히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유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88년 10월 13일 토리노의 대주교 발레스트레오 추기경은 토리노 성의가 13∼14세기에 만들어 진 모조품이라고 발표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검증을 계속 요구하자 1997년 9월5일에는 토리노의 성의가 예수의 시신을 쌓던 진품이라고 번복 발표를 하고는 감정 요구에는 일체 응하지 않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의 몸을 감쌓던 것이지만 그 마저도 죽지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음을 더욱 분명히 증명 하고 있다.

=> 정말 이런 재판이 있었는지 여부만 알면 될일.
누구 아시는 분 ?
근거없이 엉터리라고 하시는 분 사절..
근거없이 맞다고 하시는 분 역시 사절..
질문 내용추가 (2004-08-25 12:27 추가)
재판 결과를 믿던, 안믿던, 그건 각자가 선택할 일이구요.
제가 알고 싶은건, 과연 저 재판 자체가 있었는지 여부 입니다.
질문자가 선택한 답변
근거가 있습니다

com424 (2004-08-25 12:22 작성) 이의제기 (2)

질문자 평


저는 한때 신실한 크리스챤이었지만 지금은 신과 악마같은 그 어떤 영적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모든 종교도 그 교리는 훌륭하나 역시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악의를 품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제가 지어낸 이야기도, 누군가가 지어낸 픽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크리스챤이나 이 이야기에 불만을 품으신 분이라도 저에게 비난을 보내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도 이 이야기를 신뢰하지는 않으며, 제가 크리스트교 신앙을 철회한 이유도 이 이야기를 알고 나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불과 최근의 사건도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하고 논란이 일고 있는데, 하물며 2천년 전의 먼 옛날에 일어난 사실들을 그 누가 어떻게 정확하게 파헤칠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챤들은 부인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마그달레나(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자손을 뿌리며 84세까지 살다 죽었다는 사실은 영국 BBC방송국 기자들에 의해 알려지고 영국 법정에서 공식 확인된 사실입니다. 때문에 법정 결과를 지켜 본 천주교 사제,수도사,수녀들과 개신교 목사,강사들은 그런 판결이 나오자 옷을 찢고 통곡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사태를 우려한 영국 정부는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에 보도를 통제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판결을 본 영국 크리스챤의 80%가 크리스트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로 돌아 서거나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유럽과 아메리카의 교회와 성당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각지에서 사제와 목사들이 "예수에게 속았다."라며 목을 메고 자살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대사태를 불러온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그 증거를 제시한 이들이 말하는 예수의 생애는 대략 이렇습니다.

로마 제국 초기.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한 유대 왕국에서 태어난 예수는(로마 병사인 판델라가 마리아를 강간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말이 있고 실제로 독일에서는 판델라의 묘비까지 발견 되었습니다.) 13세가 되어 헤브라이 관습에 따라 아내를 맞이해야 될 즈음 많은 신분 높은 이들이 그를 사위로 맞이 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어려서부터 그의 총명함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 인디아의 오릿사주(州)에 있던 나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 왕실의 제례에 참례하러 왔다가 예수의 총명함을 보고 인디아에 유학할 것을 권유합니다. 라반나의 권유에 마음이 끌린 예수는 부모에게서 은밀히 나와 상인들을 따라 인디아의 신드지방으로 오게 됩니다. 그후 10년 동안 인디아와 네팔, 티베트에서 팔리어(語)와 산스크리트어를 익히고, 열심히 종교와 각종 학문을 공부하는데 처음에는 브라만교(힌두교의 뿌리)에 속하였으나 나중에는 붓다(불타=부처) 샤키야무니(석가모니=고카마 싯다르타)의 교리에 눈을 뜨게 되고 그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여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이사(Issa)'라는 법명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24세 때 페르시아를 경유하여 귀국하던 중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온 조로아스터교 사제 '홀', '룬', '메루'의 3인의 동방박사와 재회합니다. 집에 돌아온 예수는 오래지 않아 다시 아테네로 건너가 '아폴로'라고 하는 성자와 대화를 나누며 소크라테스를 근원으로 하는 그리시아의 정신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25세가 된 예수는 이집트로 건너가 형제단이라는 성자들의 모임에 입회해 활동하며 최고의 칭호인 크리스토스(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법명을 수여 받게 됩니다. 그리고 30세가 된 예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신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릅니다.

위의 이야기는 1887년 러시아의 언론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디아와 티베트를 여행하던 중 라마교 승려에게서 예수의 13세에서 24세까지의 인디아 행적을 담은 불경인 <이사전(傳)>을 보고 고사본(古寫本)들을 입수하여 불어판으로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聖 이사의 일대기>를 출판함으로써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후 수십명의 사람들이 인디아와 티베트를 방문하여 이를 확인하여 왔던 바 이를 종합하여 1984년 엘리자베스 C. 프로펫트가 발간한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의 줄거리입니다.

이를 근거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펼친 이들은 신약성서와 불경에 비슷한 내용이 많은 이유가 위의 이야기처럼 예수가 원래 인디아와 티베트에서 공부한 불교승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예가
♤붓다는 40일 단식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불경 상응부경전)
-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 (루가 복음 4장 1절)
♤붓다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에게 파견하였다 (아함경)
-예수는 12제자를 유대 전역에 파견하였다 (마테오 복음 10장 1절)
♤붓다의 열성적인 제자가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던 중 붓다의 확신을 받고 다시 끝까지 걸어갔다 (본생경 무쌍품)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믿음이 약해 물에 빠지는 것을 예수가 건져 주었다(마테오 복음14장 25절)
♤붓다는 발위에 있는 한 개의 떡으로 5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 (본생경 주석78)
-예수는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아서 버렸다(마테오 복음 14장 17절)
♤붓다는 과부의 두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잡보장경)
-예수는 과부의 한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하였다 (루가 복음 21장 1절)
♤사기꾼이 인도하면 개천에 빠진다 (무문자설경)
-소경의 인도로 구덩이에 빠진다 (루가 복음 6장)
♤아시타가 천사들을 목격 (본생경)
-목자들이 천사를 보다 (루가 복음 2장)
♤니르바나(열반)와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무문자설경)
-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루가 복음 16장)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아 타향에서 허랑 방탕하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오히려 환대하며 돌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인 장자궁자(법화경 신해품)와 신약성서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루가 복음 15 : 11)는 똑같은 줄거리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불교적 교리들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부분으로 법구경에서 붓다가 설파한 사랑과 자비의 설법과 똑같다.

고향에 돌아와 핍박받는 헤브라이 민중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불어 넣던 예수는 인류구원신화의 완성을 위해 가장 신뢰하는 제자 이스칼리오트의 유다스(가룟 유다)에게 고육지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끔찍하게도 유다스에게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승인 예수 자신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설득당해 스승이 원하는대로 그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고 예수는 다시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6시간 후에 죽은 뒤 3일만에 부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계획한 시나리오로 원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최소 일주일은 걸려야 죽는 데 이상하게도 예수는 6시간 만에 죽습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신화를 완성하려는 예수의 연극이었고, 처음부터 예수의 계획에 가담한 마그달레나(막달라) 마리아는 재산이 많은 고급 매춘부로서 예수와 깊이 사랑을 나눈 연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로마 총독과 그 대리인들에게 뇌물을 주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척 하는) 예수의 몸을 장사지내고 계획대로 3일 후에 무덤에 가서 꺼내주고 데려오죠. (애초에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것은 예수가 아닌 바라파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후 예수는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일련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로마 제국 영토인 프랑스(당시 갈리아)에 와서 마그달레나 마리아와 결혼하여 씨를 뿌리다가 84세 때 죽었습니다. 현재 프랑스 남부의 마을 렌느 르 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예수의 무덤이 있으며 마그달레나 마리아는 렌느 르 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으로 지내다가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으며 예수의 제자 라자로는 마르세이유(당시 마실리아)에 주교관구 켈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예수의 후손들은 4세기 후에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를 세웠으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고트 등 8개의 가문을 이루었으나, 이후 크리스트교가 번성함에 따라 예수의 후손들은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습니다. 1099년에는 예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십자군 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이 세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잠시 다윗 왕을 계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혈족 징표를 가진 귀족을 포함하여 많은 예수의 후손들이 현재에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고 있으며, 이러한 예수가문의 비밀에 대해 성전기사단(聖殿騎士團, 1118년 성지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수도사 군대)과 그 모체인 시온수도회라는 악명높은 비밀조직은 깊이 믿고 신뢰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들은 근대에 들어와 프리메이슨의 모체가 되어 현재 은밀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비밀에 대해 자세한 비밀기록들을 간직하여 남겨 놓았고, 그것이 중세 성전기사단의 지방지부의 성터가 남아있는 프랑스 남부 마을 렌느 르 사토에서 1891년 폐허가 된 이 성채의 성당을 복원하던 교구 신부 베랑제르 소니에르에 의해 양피지 문서와 보물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물과 고문서를 팔아 막대한 부를 누린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조사하던 기자들에 의해 모든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BBC 방송에서 부분적으로 3차례에 걸쳐 방송까지 된바 있는 이러한 내용의 책 <성혈과 성배>가 출판이 되어 세계를 경악케 하자 이에 놀란 영국의 개신교와 천주교인의 사실 확인 소송이 영국 법정에 제소되어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대로 예수를 믿어온 가문의 크리스챤이 주심판사를 맡아 3년 간에 걸쳐 심리를 하였으나 프랑스에 사는 예수의 27대 후손 피에르 프랑타르 씨 등 많은 증인과 증거들을 비롯해 조상이 예수로 되어 있는 족보 책과 프랑스의 렌느 르 사토에 예수의 묘비명이 있는 예수의 무덤까지 현지 답사하여 확인하고는 무덤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책의 내용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저는 크리스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말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저는 역사상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복음서를 보면 목수 요셉과 그 아내 마리아가 호구조사에 등록하러 가던 중 예수를 낳았다고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 당시에는 아직 호구조사나 그와 비슷한 것도 없었음을 알 수 있고 예수가 9살 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와 언행을 기록한 4복음서(마테오 복음, 마르코 복음, 루가 복음, 요한 복음)도 예수의 언행을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 뒤 몇십 년 뒤에야 씌어졌으며 그 내용도 풍문, 일화에 대한 기록이거나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결국 예수의 생애와 언행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도 증거도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셈인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든 허구인물이었든,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했든, 메로빙거의 왕조의 시조가 누구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만약 신이 정말로 있다면 그는 우리의 신념 속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저에게는 없지만요).

이글을 읽으시면서 크리스챤들은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고 이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무신론자이기는 해도 크리스트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악의는 없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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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신전 기사단과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 전략 ----

시온기사단

비밀문서에 의하면 템플러스 기사라는 '무장 신부단'의 내부 조직이라고 한다. 1118년 제1차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에게 개방한 후, 위그 드 페이앙이라는 한 기사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소수의 기사단에서 성지의 위험한 도로를 경호하는 것이었는데 주위의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 시온산의 솔로몬 신전 옆에 본부를 설치하는 것도 허가되었다. 순례자들은 감사하며 그들에게 많은 헌금을 한다. 이윽고 기사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성지의 실질적인 금융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세기 후에 그들에게 몰락이 찾아온다. 프랑스의 필립 4세(1268~1314)는 1307년 10월 13일에 전격적인 검거를 시작했다. 그들 전원을 신에 대한 모독과 외설행위의 죄상으로 규탄했으며 수십 명이 고문에 처해졌고 처형되었다. 1312년에 이르러서는 신전 기사단은 마침내 괴멸한다. 필립 4세는 그의 최대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며 그들의 부를 무너뜨린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최대의 거점의 하나인 '베즈'에 있는 보물을 압수하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이 베즈라는 지방이 렌 르 샤토 근방이라고 한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의 교외이며 문서에는 예루살렘에 대해 단순히 시온이라고 표현된 경우가 많다. 비밀문서에 의하면 시온기사단(처음에는 이 명칭이었던 것 같다.)이 신전 기사단의 모체가 되는 조직으로 후자가 1307년에 괴멸했어도 그 모체는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온수도원이라는 조직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메로빙거왕조를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메로빙거 왕조란 6세기 초에 클로비스왕에 의해서 수립된 왕조로 후에 이 왕조는 역대로 병약한 왕이 계승한다. 고문서에도 '병약의 왕'으로 등장하며 그래서 국사의 대부분을 중신들이 맡아 했다.



678년, 중신의 한 사람이 다고베르 2세의 암살을 기도하여 창으로 잠을 자고 있던 왕의 눈을 찌른다. 이 중신의 계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카롤링거왕조이다. (카롤링거왕조는 정식으로는 751년 페펭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98년, 독일에서는 752년에서 911년, 이탈리아에서는 774년에서 961년까지 계속된다.) 다시 비밀문서에 따르면, 다고베르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는 남 랑그독까지 도망해서, 그의 숙부에게서 라제공과 레데백작의 칭호를 계승하는데, 레데는 당시 큰 지방이었던 렌 르 샤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라제는 렌이 포함되어 있는 군의 이름이었다. 이로부터 300년 후 다고베르의 자손 고드프레이 드 블리옹이 1차 십자군을 인솔하고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러나 '병약의 왕'이라고 알려진 왕조를 왜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누가, 왜 그런 일에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을까? 튜더왕조(1485년부터 1603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왕가) 또는 스튜어트 왕조(1603년부터 1714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왕가)를 영국의 왕좌로 부활시킨다고 하면 영국인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떠난 야망과 소니에르를 갑부로 만든 보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링컨은 조사를 확대함에 따라 미스테리의 미로에 말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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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을 둘러싼 보물에 대한 전설을 또 하나 소개해보겠다. 서고트족의 보물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쇠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게르만계의 야만인이었다. 다고베르의 시대에 렌 르 샤토는 서고트족의 유일한 거점이었다. 다고베르는 서고트족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서고트족은 전유럽을 공략하여 많은 보물을 축적했다. 여기에는 로마황제 티투스(40?~81)가 69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가지고 간 예루살렘 신전 보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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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이윽고 이것이 시온수도원의 위대한 비밀인 것 같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졌다. 메로빙거왕조의 진짜 시조는 전설의 왕 메로베크(또는 메로베)가 아니라,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이것이 메로빙거왕조의 후손들이 프랑스의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였다. 조사 과정에서 링커는 성배 또는 상그레알과 반복해서 만난다. 어느 전설에서는 신전 기사단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한편 몽세귀의 4명의 카타르파 신도가 짊어지고 산을 탈출한 것이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상그레알이라는 프랑스어는 왕의 피를 의미하며 성배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 그리스도가 포도주를 마신 술잔이라고 한다. 영국 남서부 서머싯 주의 옛 도시 글래스톤베리의 전설로는 아르마티아의 요셉이 이것을 그 고장에 가지고 왔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예수는 다비드 왕의 후예로서 왕의 혈통이라는 기술도 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유다의 왕이라고 되어 있고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신랄한 풍자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예수의 가까운 친구에 의한 현시적인 주장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링컨이 이 놀라운 설을 명확히 한 것은 1982년에 출판된 '성혈과 성배'라는 저서로 이것은 마이클 베이젠트와 리처드 리의 공저이다. 이 책에서는 어디까지가 증거에 입각한 설이며 어디까지가 가설인지 알 수 없다. 가설은 전술한 제라르 드 세드와 피에르 플랑타르 드 생클레이다. 후자는 다고베르 2세의 직계 자손이라고 하며 메로빙거왕조의 왕정 복고설 자체는 명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는 죽지 않았으며 그에게 제공된 스펀지에는 약제가 들어 있었다. 이 형벌로 보통 인간이 죽기까지는 며칠 또는 몇 주일이 걸리는데 예수는 금방 사망한 듯 하다. 그는 두 다리를 기둥에서 내리기 전에 죽었다. 이것은 자비의 행위로 이렇게 하면 처형되는 죄인이 못이 박힌 다리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필요가 없이 양팔에 체중이 걸리기 쉽기 때문에 죽음이 빨리 온다. 스펀지는 순식간에 예수에게 주어졌다.

이 설에서 예수는 그후 결혼을 하는데 아내는 막달라의 마리아이다. 이 마리아는 마르타와 라다르의 자매인 마리아(통칭 베타니아의 마리아. 누가복음에 나온다. 예수의 말에 자주 귀를 기울인다.)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링컨의 설에 따르면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랑그독으로 온다. 그는 서기 74년에 마사다의 성채 공격 때 그의 생애를 마친 것 같다. 푸생이 그린 언덕 중간의 무덤을 예수의 진짜 무덤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설을 역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별도로 하고 분명한 것은 이것이 시온수도원과 소니에르 자신의 굳은 신념이었다는 점이다. 소니에르는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 탑과 같은 건물을 세우고 이것을 '막달라의 탑'이라고 칭하고 있다. 또 자기의 집을 '빌라 베타니아'라고 칭했다. 베타니아란, 마리아의 또 하나의 출신지로 예수가 탄 적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노새를 두 제자가 데리고 온 장소이다. 링컨에 따르면 노새를 제공한 인물은 라자로로 이것도 거짓 처형을 포함하는 교묘한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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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나 사실이 여러 가지로 얽혀 있으나 이것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는 스스로의 처형과 그 후의 부활을 연출한다. 그 목적은 '신앙의 확보, 강화'와 그리스도교단의 확립이었다. 이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메로빙거 왕조가 예수를 시조로 믿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왕조 부활의 야망과 장미십자단

다고베르가 암살되자 교황측은 국왕 살해와 왕조의 교체를 시인한다. 카롤링거왕조의 창시자 '난쟁이 페펭'은 교황의 이 죄에 보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해서 당시 교회에 반발하고 있던 롱바르인을 격파하고 탈취한 토지를 교황 쪽에 건네준다. 이것이 그후의 교황령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메로빙거왕조는 당연히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적으로 생각한다.

시온수도원이라는 비밀단체가 메로빙거왕조를 프랑스의 왕좌로 부활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시온수도원은 신성한 무기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성배거나 혹은 메로빙거왕조가 예수의 직계라는 것을 시사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물이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Et in Arcadia Ego'(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느니라)가 비밀 단체의 공동 구호였는지도 모른다. 12세기가 되자 신전 기사단이 이 비밀결사의 군사력이 된다.

이것은 예수 처형의 전설과 관련하여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것은 공포의 인식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속죄했다는 것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인식은 이 교단의 기초를 뿌리째 뽑겠다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처형은 없었으며 속죄도 없었고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 그 자체의 존재 이유도 없다.

신전 기사단 붕괴의 가장 이상한 측면은 신에 대한 모독과 악마 신앙이라는 규탄이다. 그러나 신전 기사단이 이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나 국가(곧 프랑스 역대의 왕)에 대해서 더 없이 위험한 존재였을 것이다. 신전 기사단과 카타르파와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시사하는 역사적 증거도 많이 볼 수 있다. 카타르파는 광대한 토지를 신전기사단에게 주고 있다. 신전기사단의 제4대 수령인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카타르파 출신이다. 베르트랑의 후예는 카타르파의 말살 때문에 교황에 의해 파견된 침략자에 대해 랑그독의 카타르파와 협력하여 저항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16세기에 이르면 메로빙거왕조는 로렌왕가(로렌은 프랑스 북동부의 중세 왕국)가 대표하기에 이른다(이것은 합스부르크 로렌왕조로 발전한다. 따라서 합스부르크왕가도 메로빙거왕조계가 된다.). 그들은 당시의 지배 왕조였던 발루아왕가(1328~1589, 필립 6세에서 앙리 3세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왕가)의 추격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발루아왕가는 멸망하게 되지만 로렌왕가도 기진맥진하여 다음 왕조를 이어갈 유력한 후보가 결핍되는 상태에 이른다. 루이 13세가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의 즉위를 방해하는 강력한 책동이 있었으나 이것도 실패한다.

 

21세기 들어 새로 발견된 유다복음서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초기 기독교 인들은

 

지금의 한국의 개신교와 달리 믿고 인믿음에 따라 천국지옥을 나뉘는게 아닌

 

자기 안에 영혼의 성찰(영성체)를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한 예로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12제자가 저녁식사시간에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자 예수가 이를 보더니 웃습니다.

 

그래서 12제자는 불만을 터트렸죠. 그러자 예수는 너희들은 왜 나를 향해서 분노하는가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죠. 너희 중에서 진정으로 강건한 자가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앞으로 나와보라. 12제자는 자기들은 강건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죠 그때 유다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감히 입에 담을수는 없지만 당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유다를 불러

 

속삭였죠. 다른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 너만이 나를 구원케 할 것이다. 그리고 유다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육체는 자기안의 영혼의 성찰를 가두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며

 

그 영혼의 성찰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것이고 그 영혼이 이끄는 길을 찾아내고 그 끝에

 

이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길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하나님을 신고하여

 

처영케 하고 자신은 자살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다복음서에는 유다는 배신을 한것이

 

아닌 예수의 영혼을 구원케하는 자기희생을 하게 된것으로 보여집니다 세크리파이

 

자기희생인 것이죠. 어느 복음서가 맞을수는 없다고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민중을 휘여잡기위해 마태 누가 요한등 4대복음서만을 채택하고

 

나머지를 버리게 됩니다. 그게 현제 까지 이어오고있죠. 특히 요한복음서는 유다를 철저희

 

악마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 예기는 여기까지 좀더 성경에 대해 깨어나고 싶

 

으시다면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다른 복음서 들을 찾아보세요 저도 아직 모르는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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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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