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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무엇을 말하는가?

대모달 |2011.11.09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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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은 우리 민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산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처음 이 땅에 역사를 시작한 곳이 바로 백두산이며, 나라 땅의 모든 산줄기 역시 백두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英山)과 아울러 우리 영토의 중심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백두산 너머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 이북의 땅도 우리 영토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생각의 한가운데에는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있다. 3백여년 전 백두산 기슭에 세워진 이 정계비는 당시 조선(朝鮮)과 청(淸) 사이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백두산 정계비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먼저 그 백두산 정계비가 있는 곳부터 찾아가 보기로 하자.

백두산으로 가는 가장 일반적인 루트는 송화강(松花江)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이다. 중국 땅을 거쳐 가야 하는 것이다.

백두산 입구에서 만나는 물줄기, 백두산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상류이다.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직접 발원하는 장백폭포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하늘로부터 거대한 물기둥이 내려오는 듯한 장백폭포, 광활한 대륙을 뒤로 하고 오르는 백두산 정상, 천지가 태고의 신비를 품은 채 제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인다. 둘러선 16개의 봉우리들이 천지의 장엄함을 더한다. 천지는 해발 2천 2백여미터 높이의 분화구에서 생겨난 고산호수이다.

민족의 염원과 동경까지 품고 있는 천지, 그러나 천지는 현실의 공간이다. 천지를 가로질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지나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천지 한가운데를 국경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이 국경선으로 인식된 것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1712년, 비로 이곳 백두산 기슭에 국경비인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졌던 것이다. 백두산 정계비는 일제강점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백두산 정계비는 1931년 7월에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다면 백두산 정계비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만든 백두산 등산로 지도, 천지 동남쪽 기슭에 백두산 정계비가 뚜렷이 표시되어 있다. 정확한 위치 확인을 위해 최근 북한 지역을 통해 백두산을 답사한 고구려연구재단을 찾았다.

현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계비는 천지 아래, 북한에서 만든 주차장 왼쪽 모퉁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금은 북한에서 세운 정계비 표지석만 남아 있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위성사진을 활용하기로 했다. 확인된 정보를 위성사진과 대조하는 작업, 정계비의 위치는 천지로 올라가는 두 도로가 합쳐지는 바로 위쪽, 위성사진을 통해 도로와 주차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경 128.09, 북위 41.992, 백두산 정계비의 정확한 좌표다.

1931년까지 중요한 국경비로 존재했던 정계비, 정계비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한 장의 지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08년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는 두만강 북쪽의 간도가 조선 영역으로 표기돼 있다. 그런데 3년 후 역시 조선총독부가 만든 1911년 '조선공업분포 및 상업개요도'라는 또 다른 지도에는 조선의 영역을 두만강 이남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간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과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회도서관의 마이크로 필름자료에서 의미있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909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간도협약(間島協約). 간도협약 전문에는 청나라와 일본 양국은 두만강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삼는다는 조문이 명기되어 있다. 당사자인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과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해 버린 것이다. 같은 날, 청과 일본은 이른바 만주협약(滿州協約)도 동시에 체결했다. 일본은 만주, 즉 간도 지역의 철도부설권, 탄광채굴권 등의 이권을 얻는 댓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다.

노명돈 인하대학교 법학과 교수 "만주협약은 청나라가 일본에 제공한 다섯가지 이권이고, 간도협약은 그 댓가로 일본이 청에게 인정해준 사항이었다. 그런데 앞의 다섯가지 중에 한가지는 일본이 제시한 동삼성 개발이권 중에 하나에 제한해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을 교묘하게 청일 양국이 두개의 조약으로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조약의 체결과정을 보면 두개의 조약은 불가분의 일치의 관계이고, 상호 교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보아서 하나의 조약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천지 아래 세워졌던 한중국경비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 정계비는 사라지고 간도협약에 의해 간도는 중국의 영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백두산 정계비, 그러나 이 비석은 오랫동안 한국과 중국 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논란의 핵심은 간도였다. 이 정계비에 따라 간도가 어느 나라의 땅이냐가 정해진다고 믿어왔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간도는 어느 지역을 말하는 것일까?

백두산을 기점으로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西間島), 두만강 이북을 북간도(北間島)라고 한다. 이들을 통틀어 간도라고 부른다. 간도 전체를 합치면 지금의 한반도보다 훨씬 넓은 땅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간도의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백두산 정계비인데, 이 비석은 청나라의 주도로 세워졌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려고 했던 것일까?

1712년 압록강변에는 조선 측 관리와 청나라 측 관리의 회동이 있었다. 접반사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가 조선 대표였으며, 길림성(吉林省) 지역을 다스리는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이 청나라 대표였다. 청나라 황제 성조(聖祖)의 명령에 따라 조선과 청의 국경을 확정짓기 위한 만남이었다.

1616년 후금(後金)이라는 나라 이름으로 심양에 도읍했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까지 진출,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청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성조는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청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683년 대만을 접수한 데 이어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타결하고 서역의 신장(新疆)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가 조선과의 국경 확정이었던 것이다.

양국 대표단은 백두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목극등은 조선 측 대표단의 백두산 동행을 거부했다. 조선 대표단의 나이가 많아 배려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목극등은 자신의 일행과 조선의 하급군관 서너명만 데리고 백두산을 올랐다. 조선 대표를 배제한 청나라 대표단만의 산행이었던 것이다. 백두산으로 오른 목극등은 천지 주변의 물줄기를 살폈다. 그리고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이라고 판단되는 곳에 하나의 비를 세운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워진 최초의 국경비, 백두산 정계비다.

그렇다면 당시 제3자였던 서양은 조선과 청의 국경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1735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중국전지(中國全地)는 중국의 역사와 인문, 지리를 담은 총서이다. 이 지도에는 청과 조선, 그리고 간도 지역의 국경이 점선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조선과 청의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라 그 이북지역에 표기하고 있다. 압록강 이북지역까지 평안도라고 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의 많은 서양 고지도들도 조선의 국경을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서 표기하고 있다.

김우준 연세대학교 동서문화연구소 소장 "1750년에 제작된 보곤디 지도에는 압록강 이북의 남만주가 우리 영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1780년 칼빈슨 지도에는 요동 지역을 다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서양 고지도들은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김우준 박사 "18세기 많은 서양 고지도들은 1708년 성조 황제가 서양 선교사들에게 중국 지도를 만들도록 명령한 것이 시초가 되는데 프랑스의 선교사 조아생 부베가 총편찬을 맡았고 경위도법과 사다리꼴투영법을 채용하여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라는 최초의 근대식 중국 지도를 1716년에 완성하게 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지역이 우리 영역으로 되어 있고 황여전람도의 동판 41쪽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거기서 유럽판 황여전람도가 출판되는데, 이 지도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 청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남만주 지역을 조선 영역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계비를 세우게 했던 성조(聖祖)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서양 고지도들에 따르면 백두산은 명백한 조선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청은 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려고 했을까?

천지에서 동쪽으로 약 20킬로미터, 천녀욕궁지라고 하는 원지가 있다. 신비감마저 감도는 이 아름다운 원지를 청은 자신들의 조상이 발원한 곳으로 여겼다. 중원을 점령한 이후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려는 정책을 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직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청의 만주 중시 정책을 알 수가 있다. 즉 만주 지역을 무인지대화하자고 청이 먼저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과 청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자 지키자는 이른바 각수봉강(各守封彊)을 제안했는데, 이 무인지대를 봉금지대라 했다.

그렇다면 봉금지대는 어디였을까? 서양 고지도에 따르면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일정한 지대,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봉금지대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이성환 계명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봉금지대는 중국 측에서 설정해놓은 곳이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놓고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일정한 지역은 비무장 중립지역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당시로서는 비무장 중립지역은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 상황을 놓고 보면 휴전선의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그 사이의 일정한 지역, 그런 형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봉금지대가 조선과 청의 중립지대였다면 백두산 정계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성환 교수 "그때 당시 중국에서 정계비를 세운 의도는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성지를 신성시하고 싶었고 중국의 영지로 삼고 싶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으로 백두산 남쪽 정상에 부자연스럽게 정계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청의 주도로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그것은 봉금지대를 자신들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조선의 영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제한하려는 청의 의도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백두산 정계비는 이렇게 당시 중립지대였던 간도 땅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청나라의 의도를 담고 있다. 높이 약 83센티미터, 폭 56센티미터, 그리 크지 않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 수는 82개, 대청(大淸)이라는 글자가 유독 크게 보이는 백두산 정계비. 이 비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여덟글자,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인데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압록강은 그 경계가 명확한데 문제가 된 것은 바로 토문강이었다.

지도를 보면 백두산 서쪽 기슭에서 압록강(鴨錄江)이 발원하고 있으며, 동쪽 기슭에서는 두만강(豆滿江)이 흐르고 천지에서 직접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松花江)이 있다.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 송화강과 두만강인데, 조선에서는 송화강의 지류 중 한 지류를 토문강(土門江)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주장대로라면 송화강 이남이 조선 땅이 되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이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토문(土門)이 어디냐에 따라 함경도만한 땅의 주인이 바뀔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과연 정계비에 씌여진 토문은 어디일까?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지 약 170여년 후, 두만강 이북의 간도 땅에 살던 조선 백성들은 놀라운 일을 당하게 된다. 청나라의 조정에서 간도의 조선 백성들을 대상으로 포고문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두만강 이북 간도 땅에 살고 있는 조선 백성들은 모두 철수하라는 쇄환령(刷還令)이었다. 조선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조치였다.

당시 간도 땅에는 이미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며, 간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다. 특히 1860년대 이후 대규모 간도 이주가 이루어져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자치기구까지 설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간도를 조선 땅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백두산 정계비가 있었다. 정계비에 새겨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이 바로 인식의 근거였다. 조선인들은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고 믿고 있었다.

토문강이 어디냐에 따라 조선의 영역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즉 토문강이 두만강이라면 그 남쪽만이 조선 영역이 되는 반면,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면 드넓은 간도가 조선 땅이 되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주장은 달랐다. 토문(土門)과 도문(圖文)은 같은 발음이며 도문은 두만(豆滿)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옛 기록들은 토문을 어디로 보고 있을까?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보면 토문은 두만강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토문과 두만을 다른 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청나라보다 앞선 명나라 때에 만들어진 요동지(遼東志)에는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이며 송화강으로 흘러든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토문과 두만은 다른 강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계비 이후에 제작된 조선전도(朝鮮全圖)에도 토문강은 두만강과 다른 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19세기 초의 관북도(關北圖)에도 역시 토문강은 두만강 북쪽에 별개의 강으로 그려져 있다.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정계비를 세운 후 토문강의 발원지까지 돌무더기와 목책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계비 근천의 물줄기는 건천, 즉 마른 계곡이었다. 그래서 물줄기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석퇴를 쌓았던 것이다. 석퇴는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조선총독부가 만든 사진첩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석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계비 부근에 군데군데 쌓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김득함(92세. 일제강점기에 세차례 백두산 답사) "토문강 바로 옆을 줄이어 쭉 쌓았다. 185개가 있다. 길이는 한 30리 가까이 된다. 그 연안에 토퇴 석퇴를 쌓은 것이다."

일본인들이 그린 백두산 부근 약도, 정계비 옆에 석퇴 토퇴가 그러져 있고 이들은 토문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토문강은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합류하고 있다. 물줄기를 명확히 하기 위해 쌓은 돌무더기와 흙무더기, 이들은 정계비에서 시작하여 토문강 상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송화강으로 이어지는 토문강, 토문강은 지금은 어떤 강으로 남아있을까? 총독부가 발행한 간도산업조사서의 지도에 따르면 송화강의 상류 지류는 삼도백하(三道白河), 사도백하(四道白河), 그리고 토문(土門)으로 되어 있는데, 토문은 바로 오도백하(五道白河)인 것이다.

이상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다른 지도는 고지도인데 이 지도는 축척이 들어가 있어 과학성이 높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토문강이 백두산 지류에서 나가고 두만강과는 별도로 송화강으로 흐른다는 사실은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이 지도에도 분명히 그렇게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KBS-TV 'HD 역사스페셜' 취재진은 토문강, 즉 오도백하를 찾아 나섰다. 오도백하가 송화강 본류와 합류하기 직전에 있는 마을 삼도(三道), 토문강 탐사는 이 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도로 사정이 오도백하가 송화강 최상류의 오지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점차 마을도 뜸해졌다. 현지에서는 토문강은 이름조차 잃어버린 강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의 차량 접근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강은 틀림없이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오도백하였다.

이일걸 간도학회 부회장 "이 강이 오도백하이다. 이 강의 상류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토문강이고 중국 사람들은 황하중구자라고 불렀다. 이 토문강을 두고 청과 조선이 국경 분쟁을 일으켰고 지금까지 두만강과 토문강의 위치 문제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강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강줄기라고 보는 것이다."

수많은 논란의 불씨를 안은 채 토문강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송화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백두산 주변 지형을 만분의 일로 축소해서 그대로 만든 모형. 이것을 자세히 보면 천지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이 천지의 동남쪽 기슭에 백두산 정계비가 있다. 백두산 정계비에서 바로 남쪽으로 보이는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천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동쪽 기슭에서는 두만강이 시작된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 동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송화강의 상류, 토문강인 것이다. 조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토문강 동쪽의 이 지역이 모두 조선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지금 간도는 중국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오랫동안 조선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해왔고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혀 있었다. 논란 중인 한 지역이 특정국가의 영토가 되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양국의 합의가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누가 실질적으로 그 땅을 점유하고 있느냐와 실제 행정권이 미치느냐의 여부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렇다면 당시 간도는 어떠했을까? 백두산 정계비 건립 이후, 간도는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보자.

압록강은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다. 압록강 하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구려 산성으로 유명한 봉황산 아래 봉성이 있다. 봉성의 옛 지명은 봉황성, 조선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반드시 거쳐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봉성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변문이라는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변문은 곧 국경을 뜻하는 지명이다. 이곳 변문의 기차역, 지금 이 역의 이름은 일면산역(逸面山驛), 그러나 변문에서 만난 현지인은 예전에 고려문역(高麗文驛)으로 불렸다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다. 역 이름이 고려문역이었다는 것은 조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왜 고려문역이었을까?

정계비가 세워진 훨씬 후대인 19세기에 미국인 선교사가 펴낸 조선 소개서에는 봉성이 옛 조선의 국경문으로 표기된 지도가 있다. 고려문역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돈수 한국학연구소 소장 "가장 의미있는 사안은 1712년 목극동이 백두산에 와서 세운 정계비가 서양 고지도에서는 특정한 국경의 표시로 단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의 서북쪽 국경은 봉황성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록들은 벨기에의 반 데 마이렌이 작성한 지도에서도 나타나고 중국의 요동지와 18세기와 19세기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의 저술에서도 봉황성이 국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 제작에 참여했던 프랑스인 선교사 레지가 남긴 기록, 일명 '레지 비망록'에는 더 구체적인 기록이 나온다. 즉 봉황성 동쪽이 조선의 서쪽 국경선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이 아니라 봉황성을 기점으로 훨씬 북쪽이 되는 것이다.

조선 조정이 압록강 이북을 관할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봉황성(鳳凰城)의 세관(稅官)이 후시와 수레를 빌리는 일로 의주에 통보해 조선 국왕의 허락을 구했다.'는 영조실록(英祖實錄)의 기록, 조선은 압록강 이북의 봉황성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만강 이북은 어떤 상태였을까? 북관유적도(北關遺蹟圖)는 고려 예종(睿宗) 때부터 조선 중기까지 북방 개척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화첩이다. 이 책에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동북 9성을 쌓은 윤관(尹瓘)이 고려의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인데 고려지경(高麗地經) 네 글자가 뚜렷하다. 기록에 따르면 윤관의 국경비는 선춘령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춘령은 어디일까?

'서북피아양계만리지도'라는 18세기 지도에 보면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즉 지금의 간도 땅인 것이다. 또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두만강 이북에 영향력을 끼친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에도 조선 국왕은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철수를 명령하기도 했다.

김우준 박사 "당시 의주와 봉황성 사이 사신들의 왕래하는 관문은 조선의 관병들이 관장을 했고, 의주까지가 조선 영역이 아니고 봉황성까지의 길목을 조선에서 경비를 담당했고, 또 명나라 유민들이 봉금지대로 넘어온 적이 있는데 조선 관병들이 압록강에서 출병을 해서 격퇴시킨 일이 있기도 했다. 이런 지역의 치안을 조선 관병들이 담당했기 때문에 봉금지대를 사실상 조선의 영역으로 인정해도 큰 무리는 없다."

지금도 만주 지역에는 곳곳에 우리 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조선인 마을을 찾아 나섰다. 이 마을의 이름은 박보촌으로 박씨들의 집성촌이다. 현재까지도 5, 60호의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한 주민은 15대째 4백년 이상 이 마을에서 거주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박명해(朴明海)라고 했다. 그리고 가문의 돌림자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계비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 간도에 뿌리박고 살았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간도 점유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고종(高宗) 때 만들어진 간도 주민들의 호적인 변계호적안(邊界戶籍案), 이 호적의 작성자는 서변계 사무사 서상무(徐商茂), 즉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만든 것이었다. 내용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지명과 함께 실제 거주자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 미쳤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 것이다.

양태진 동아시아 영토문제 연구소 소장 "영토문제에 있어서는 거주하는 주민들의 의사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 대부분의 거주 주민들이 당시 우리 동포였기 때문에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지역내의 주민수 내지는 생활실태를 작성한 변계호적안은 지금 우리의 영토문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필수적인 자료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간도에 대한 영토인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곳곳에 남아 있다. 1662년 당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차라리 압록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건의한다. 이에 현종(顯宗)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정하면 우리 땅이 청나라로 넘어간다는 것을 밝히며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 이곳은 실제로 조선인이 점유했고, 조선의 행정력이 미쳤고, 또한 우리 영토라는 인식이 존재했던 땅이었다.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진 이후로도 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를 생활 터전으로 삼았다. 그들은 간도에서 마을을 이루며 농사를 짓고 조선 관헌에게 세금도 바쳤다. 1897년의 간도 인구를 살펴보면 청나라 사람에 비해 조선인의 수가 약 10배 정도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간도 땅의 실제 점유자는 조선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간도는 조선과 청 양국 사이에 갈등의 땅이 되었다.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과 청은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경회담을 열게 되는데, 그 당시 조선 대표로 나선 자가 안변부사였던 이중하(李重夏)였다. 당시 청나라에 비해 열세한 입장에서 국경회담을 벌여야 했던 이중하는 "나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있어도 나라의 땅은 한치도 내놓을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로 회담에 임했다.

1885년 9월 회령에서 열린 첫 국경회담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었다. 조선 대표였던 이중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회담에 임해야 했다.

노계현 전 청원대학 총장 "당시 청국과 조선은 종속관계였기에 종주국으로서의 청국이 종속국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심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인지하는 바이고..."

조선은 1882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과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때에 청나라의 힘을 빌렸다. 조선에는 이미 청나라의 군대가 진출해 있었으며 원세개(袁世凱)가 조선 국왕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을 정도로 위세를 부리던 시기였다.

회담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조선 대표 이중하(李重夏) "백두산에는 이미 성조(聖祖) 황제의 어명(御命)으로 세워진 정계비(定界碑)가 있사옵니다. 그것을 살펴본다면 모든 게 명확해질 것이옵니다."

청나라 대표 덕옥(德玉) "나는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조사하러 온 것이지 비석을 조사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중하 "정계비의 비문을 먼저 보고 토문강의 수원(水原)이 어디인지 살펴본다면, 조사는 쉽게 끝날 것이옵니다."

덕옥 "비석은 두만강의 수원에 있다고 들었다. 두만강 하류에서 거슬러 올라가 비석이 두만강 서쪽에 있으면 서위압록(西爲鴨錄)이요, 동위토문(東爲土門)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중하 "비석에서 토문강 원류까지 석토가 쌓여 있은즉, 이것만 확인한다면 토문강 남쪽은 조선의 영토란 것이 밝혀질 것이옵니다."

덕옥 "어찌하여 그대는 두만강을 놔두고 석비만 조사하자는 것인가!"

이중하 "정계비를 먼저 조사하지 않고는 모든 조사가 허사가 될 것이외다!"

국경 조사를 어디서부터 할 것이냐가 관건이었다. 청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여겨 두만강 하류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하자고 했다. 이는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겠다는 의도였다. 반면 조선은 정계비에서 가장 가까운 물줄기를 찾아가자고 주장했다. 이는 정계비에서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선을 국경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2년 후인 1887년 다시 국경회담이 열렸다. 청은 첫번째 회담 때보다 훨씬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청나라 대표 가원계(賈元桂) "조선은 임오년과 갑신년의 환란 때에 우리 황제 폐하의 은덕을 입은 것이 적지 않다. 황제의 은덕을 어찌 갚으려는가?"

청나라 측은 노골적으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론하며 조선 대표 이중하를 압박해왔다.

회담이 진행되던 도중 조선 측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회담에 임하는 청나라 측의 기밀문서를 입수하게 된다. 그것은 청나라의 군기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직접 내린 국경회담에 관한 훈령이었다.

그 내용은 서두수(纖水)와 토문강(土門江) 사이에서 국경을 정하라는 훈령이었다. 즉, 두만강(豆滿江)의 세 지류 중 가장 남쪽의 홍단수(紅端水)로 국경을 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청의 확고한 입장을 확인한 이중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이중하는 두만강의 가장 북쪽 지류인 홍토수(紅土水)로 국경을 삼기로 하고 회담에 임한다.

청나라 대표 가원계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귀관은 오로지 홍토수 외에는 어찌 의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가?"

조선 대표 이중하 "귀관이 주장하는 홍단수는 우리의 땅을 축소하려는 것인데, 어찌 그것을 상의하겠소이까?"

가원계 "마땅히 홍단수로 정할 것이다."

이중하 "나는 그리 정할 수 없소이다!"

가원계 "오늘 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는 산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하라!"

이중하 "나의 목을 내어줄 수는 있어도 나라의 경계를 한치도 내어줄 수 없음이오!"

목숨을 내건 이중하의 담판으로 결국 두번째 국경회담도 결렬되고 만다.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중하는 두번째 회담에서 홍토수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토문강을 포기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라 땅을 지키겠다던 이중하, 그는 왜 토문강을 버리고 홍토수로 물러났던 것일까?

그런데 최근 이중하의 토문강 포기 이유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는 조선과 청의 외교대표 사이에 비밀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키즈케 노조미 메이지대학 교수 "서울에서 중국 원세개와 조선 김윤식 양자간에 접촉과 교류가 있었고 그것을 감안해 두만강 현지에서 이중하와 청나라 측 대표 사이에 회담이 있었다. 이것이 정해회담이다. 따라서 이중하가 두만강의 경계에서 타협했다고 하는 것은 서울에서의 원세개와 김윤식 사이의 비밀회담의 결과를 감안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조선과 청의 외교수장이었던 김윤식(金允植)과 원세개 사이에 있었던 비밀회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홍장의 문집에 남아있는 원세개가 이홍장에게 보낸 비밀 통신문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김윤식과 원세개의 비밀 국경회담. 그 핵심은 차지안민(借地安民)이었다.

이키즈케 교수 "차지안민이란 국경문제에서는 청나라 측의 주장에 타협하지만 두만강 북쪽의 조선 이주민에 대한 조세권이나 재판, 관찰권 등에 대해서는 조선 측이 권한을 행사한다는 내용이다. 바꿔 말하면 토지의 영유권과 사람에 대한 통치권을 별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차지안민은 애초 원세개가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청 역시 간도에 대한 조선의 실질적인 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비밀회담은 김윤식의 유배로 결렬되었고,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즉 조선 조정은 이전의 모든 국경회담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조선과 청, 양국은 간도에서 치열한 행정권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일본은 간도로 진출했고, 마침내 불법적인 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100여년, 이 간도협약이 간도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것이다. 이중하의 회담 이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단 한차례의 국경회담도 열리지 않았다. 백두산 너머 간도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경에 대한 논란을 종결짓지 못한 채 미해결의 땅으로 남아있다.

이중하의 회담이 결렬된 지 22년 후, 간도는 당사자인 조선이 배제된 채 청나라와 일본 간의 일방적인 간도협약으로 청나라로 넘어갔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르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국과 체결했던 모든 조약은 무효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강제 체결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과 1910년 경술한국병합늑약(庚戌韓國倂合勒約)은 물론이려니와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 역시 법적 효력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간도를 둘러싼 아무런 회담도 열리지 않았다.

물론 지난 1962년에 북한과 중국간의 조중변계회담(朝中邊界會談)이 있었지만 이 조약은 국제연합(國際聯合)에 등록되지 않은 비밀조약이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간도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간의 갈등은 협상이나 조약이 종결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간도는 잊혀진 고토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미해결의 땅인 것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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