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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4.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서다 ⑵

대모달 |2011.11.13 18:41
조회 51 |추천 0

★ 국민부(國民府)의 성립

 

오랜 협의 끝에 1929년 4월 3부가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어 국민부가 창설되었다.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은 현익철(玄益哲), 군사부위원장인 이웅, 보위대장은 문시영이 맡았다. 산하에 무장의용군을 두었는데 제1중대장은 양세봉(梁世奉), 제2중대장은 윤환(尹換), 제3중대장은 이태성, 제4중대장은 김창헌(金昌獻), 제5중대장은 장철(張哲), 제6중대장은 안홍(安鴻), 제7중대장은 차용목, 제9중대장은 김덕국이 각각 선임되었다.

 

국민부(國民府)는 신민부(新民府)의 민정파(民政派) 세력과 참의부(參議府)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正義府)의 고활신(高豁信) 계열이 군정위원회 성격으로 조직한 기관이었다. 이들은 동북 지방 군경의 잔혹한 공격을 받는 한편, 만주 지역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공산주의 사상에도 충격을 받았다. 6월에 국민부는 근거지를 길림성 대둔에서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으로 옮기는 동시에 제1차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9월에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위원회가 왕청문에서 조직되었는데, 초대 당 주석은 이효원이 맡았다. 아울러 조선혁명당이 국민부의 집권정당으로서 무장의용군을 관할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왕청문은 동변도 지역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고 군사조직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의 하얼빈 영사관이 작성한「재만(在滿) 조선 농민의 각종 사회 조건」이란 제목의 보고서에는 동변도 지역의 특수성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들은 먼저 “현재 조선혁명군 세력이 쇠약해지고 있지만 동변도 지역이 어떻게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동변도 지역의 조선 사람들은 주로 제1단계와 제2단계에 이주해 온 사람들로 주로 농민들이다. 소화(昭和) 5년에 이러한 조선 사람이 11만명 정도였는데, 이들이 이주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있다. 그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며 동시에 반일적이다. 그들 중에는 단순히 조선 왕조의 통치를 피해 건너간 소작농도 있고, 외국 상품의 유입으로 농촌 경제가 파괴되어 유랑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또 세계대전으로 인한 농촌 파괴의 가속화와 농민 폭동 등으로 이주를 선택한 소시민들도 있었다”는 답변이 나왔다.

 

또 “동변도(東邊道)는 그들의 보수성과 반일적 태도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지만, 반대로 간도 지역은 이러한 조건을 일찍이 상실했다. 과연 동변도의 이런 특수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첫째, 자연조건이 아주 나빠서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총면적의 10%~20%에 불과하며 그나마 토지도 아주 척박하다.

 

둘째, 경작 규모도 아주 작다.

 

셋째, 토지 소유 형태가 소농 위주며 거대 지주가 매우 적다.

 

넷째, 농민들 대부분이 토지가 없거나 아주 적은 토지를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남만주 지역과 다르다. 아울러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이고 고용인이 적은 점도 중만주나 남만주 지역과 다른 점이다.

 

다섯째, 개간하지 않은 경작지가 적고 토지를 세세히 나눠 경작했으며 이미 상대적으로 인구 과잉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여섯째, 소작 형식은 이미 정한 수확량을 현물로 내는 현물 정액 지세가 지배적이다. 반면 간도 지역에서는 수확량을 일정한 비율로 나누는 이익 분할 지세가 지배적이어서, 이 지역의 조선 농민들도 대개 이 방법으로 지세를 납부했다. 이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출신인 평안북도 지역이 98% 이상이 이익 분할 지세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변도 지역은 인구 가운데 조선 사람이 불과 4%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현물 정액 지세 방법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는 형식이 다를 뿐, 양자 모두 봉건적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최근 생산량이 떨어지자 현물 정액 지세로 바뀌는 추세를 보이지만, 이런 현상은 생산량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으므로 둘 사이의 관계는 늘 유동적이다.

 

일곱째, 작은 농지에서 경작을 하지만 남만주는 노동집약화를 실행하지 못하고 밑도 있는 경영도 하지 못했다. 이는 소작인이 대부분이어서 노동집약적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은 면적의 농지는 생산수단의 개량과 발전을 더디게 한다.

 

여덟째, 외국 상품의 침투가 아주 미약했다. 이는 동변도 지역의 교통이 불편하여 세계 시장과 격리된 탓이다. 따라서 상업자본은 봉건 사회와 다를 바 없이 미미해서 오랫동안 중세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점은 간도 지역이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해 봉건적 사회 관계가 점차 붕괴되는 반면, 소농을 중심으로 노예화가 강화되면서 봉건적 착취 관계가 진행되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동변도가 보수적이라면 간도는 상업자본이 이미 소농들에게 큰 충격을 미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동변도 지역에서는 조선혁명군과 같은 반일적 단체를 구성할 수는 있지만 간도 지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홉째, 그 밖에 동변도 지역의 조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어서 토지 문제에 관해서는 조선인들간에 대립이 없었기에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동변도 지역은 정치적 특수성이 없고 교통이 불편하여 조선인들의 정치운동의 성쇠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 지역의 조선 사람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오래 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관헌은 “만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정치 세력은 점차 위축되어 결국은 흥경(興京)을 중심지로 한 작은 범위로 움츠러들었다. 흥경이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최후 근거지가 된 이유는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이민의 사회적 조건으로 볼 때에도 필연적이다”라고 인정했다. 위에 열거된 아홉 가지 사실들이 곧 그들이 인정하는 사회적 조건이었다. 일본 관헌은 또 동변도 지역 조선인들을 “근면하고 순박하며 의롭고 과감한 반면 아주 완고하고 보수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들이 말하는 ‘아주 완고하고 보수적’이라는 점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멸과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 관헌이 이처럼 주의깊게 동변도를 연구한 것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진압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 조선혁명군이 왕청문(旺淸門)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 고장이 길림(吉林)·봉천(奉天) 두 성(省)과 흥경(興京)·통화(通化)·유하(柳河)·환인(桓仁) 등 네 현(縣)의 경계에 있고, 산이 높고 숲이 깊어 교통이 불편하므로 관리와 헌병들의 통제가 그리 심하지 않은 데다 이 지역 중국인과 조선인들 사이가 다른 지역보다 융화되어 있어 활동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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