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민부(鮮民府)를 소탕하다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국민부(國民府)를 흡수하면서 자치위원회(국민부)·군사위원회(조선혁명군)·농공위원회·선전위원회를 비롯해 정치부·조직부·조사부·국제부·교육부·재무부를 구성해 관할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군사위원회는 무장단체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본래 정의부(正義府) 산하의 의용군 병력으로 모두 10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1929년 12월에 이진탁(李辰卓)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웅(李雄)은 참모장이 되었다. 또 김보안(金輔安)은 제1중대장, 양세봉(梁世奉)은 제2중대장, 이윤환(李允煥)은 제3중대장, 김문거(金汶居)는 제4중대장, 이종락(李鍾洛)은 제5중대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동시에 자치위원회는 조선인 집단거주지를 행정구역으로 구분하고, 각 현에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지방집행위원회를 두었다. 예를 들면 환인현의 조선인 지방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은 선우웅이고, 집행위원은 박창훈·김해산 등이었다. 그 밑으로 서구위원장은 김광명, 북구위원장인 김응호, 동구위원장은 김봉작, 남구위원장은 최삼제 등이 각각 맡았다. 구(區) 밑에는 둔장(屯長)이라고도 부르는 동장을 두었다. 흥경현에는 구가 비교적 많았는데 당시 제1구는 신민보(지금의 현성), 제2구는 동창구와 왕청문 일대, 제3구는 영릉 부근, 제4구는 두령 서쪽, 제5주는 홍묘자, 제6구는 향수하자, 제7구는 북사평 일대였다. 흥경현 조선인 지방 집행위원회 아래에는 구 위원장, 촌 백가장, 둔 십가장을 설치하여 조선인 행정 사무를 전문적으로 관할하게 했다. 동시에 각지에 대의원회를 두었는데, 현마다 8~9명의 대의원이 있었다. 그 밖에 유하현·통화현·집안현·관전현·본계현·해룡현·무순현·봉성현 등에도 모두 조선인 지방집행위원회를 설치하고 동시에 대의원회를 만들었다.
조선혁명당 교육부는 반일항쟁을 위한 예비군을 육성하기 위해 조선인 집단거주지에 학교도 세웠다. 촌에는 소학교를, 둔에는 서당을 세웠다. 정의부 출신의 지도자들은 왕청문에 화흥중학교와 부설 소학교를 세우고, 각지의 일류 조선인 교사를 초빙해 강의를 맡겼다. 아울러 군사 간부를 기르기 위해 남경의 군사학교와 소련 등으로 청년들을 유학보냈다. 전병균·이순호 등이 바로 이 시기에 광동성의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파견되어 군사학을 공부한 학생들이다. 양세봉은 동생 정봉을 화흥중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선전위원회는 산하에 대동보사(大東報社)를 설치하고 정의부에서 창간하였던 대동보를 계속 발행하여 동북 각지에 배포했다.
국민부는 계속 외지에서 상점이나 공장을 운영했다. 이를테면 홍묘자에 있던 서세명의 점포를 흥경현 시내로 옮겨와 ‘합성호’로 간판을 바꾸었고, 흥경현성·통화현성 등지에서도 쌀가게를 10여 군데 열어 경비를 충당하고 연락 장소로도 이용했다.
국민부의 행정·군사에 관한 경비는 모두 관할 지역에 있는 조선인 가정에서 부담했으며, 이들을 통해 조직을 발전시키고 군대도 양성했다. 국민부는 남만주에서 조선인들의 정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동변도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모두 왕청문을 수도(首都)라고 불렀다.
반면 일본의 통화영사관은 조선혁명군을 토벌하고 남만주의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영사관 경찰서를 설치하고, 관할 각 현에 영사관 사무실과 경찰분서를 설치했다. 그들이 모두 검은 옷을 입어서 사람들은 ‘검은 모자 관청’이라고 불렀다.
흥경현성 하북에 ‘희옥당 약방’이란 2층 건물이 있었는데 간판만 보면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상대하는 약국 같지만, 사실은 일본의 통화영사관이 별도로 마련한 사무실이었다. 그들은 줄곧 사회 치안을 위협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숨겨 주었다. 약방 주인인 모리타라는 일본인은 통화영사관의 직원이었던 것이다.
통화영사관의 지휘 아래 친일적인 조선인으로 구성된 선민부(鮮民府)가 창설되었다. 선민부는 통화현에 본부를 부고 현과 구에 ‘보민회 사무소’·‘예절단’·‘농민의무조합’·‘일본권업회사’ 등의 기구를 암암리에 만들었다. 이들 기구는 모두 통화영사관의 외곽 조직으로 그들의 지시를 받는 공범이었다.
선민부도 무장조직이 있었고, 흥경현에 친일학교를 세워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하수인을 배출하는 일을 추진했다.
1929년 봄에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선민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府)’를 구성하여 토벌대장에 이웅, 부대장에 양세봉을 각각 임명했다. 지휘부는 우선 특수요원들을 각 현에 파견해 조사한 후 각 지역에서 선민부에 의해 벌어진 피해 상황을 파악해 공격 목표를 정했다.
선민부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본부가 있는 통화현으로 그들의 우두머리는 이동성과 김상림은 일본군 특무대 출신으로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환인현의 송운봉·오경주 등도 두 사람 못지않았다. 집안현의 책임자도 일본인들의 충견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고, 관전현의 책임자는 독립군 가족을 살해했다. 흥경현의 책임자인 최진규·백형림·이인수 등은 처음부터 조선혁명군이 두려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따라서 통화현·환인현·집안현·관전현 등 네 개 지역의 선민부 사무소가 토벌지휘부의 공격 목표였다.
6월초에 토벌대원들에 대한 단기간의 훈련을 끝낸 지휘부는 무력(武力)으로 선민부를 해체시키겠다는 격문을 발표했다.
9월 15일에는 양세봉이 1천여명의 조선인 농민을 인솔하여 북강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일본의 통화영사관이 지원하는 선민부가 환인현에서 자행한 조선인들에 대한 약탈과 잔혹한 학살을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집회에서 영영구(英英溝)의 농민들은 선민부의 악행을 낱낱이 폭로했다. 선민부는 해마다 외곽조직 ‘동향회’를 통해 현지 조선족 가정에서 15원씩 걷어 갔다. 올해는 7월에 받아 갔는제 춘궁기여서 돈을 내지 못한 많은 가정은 혹독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돈을 내지 못한 영영구의 한 가정은 동향회의 회원 오경주·변창죽·이구점 등 세 명에게 무참하게 폭행치사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밖에도 수백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붙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현의 조선인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민부토벌지휘부는 환인현의 국민부 소속 지방집행위원장 선우웅, 지방 조직 책임자 이동민, 황포군관학교 졸업생 김정선 등과 함께 환인현 시내에 있는 함귀윤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인들의 분노를 계기로 현청에 선민부 지도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일단 모든 조선인 가정에서 청장년 한 명씩 1천여명을 뽑아 육하(六河)와 북쪽 석합달(石哈達)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선민부 사람들을 처벌할 것과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환인현청에 희망을 건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같은 소식은 동향회의 우두머리인 송운봉에게 알려졌다. 그는 당장 편지를 써서 현의 공안국장을 통해 현청에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청은 나룻배가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천여명의 조선족 청장년들은 배가 없는 상황에서도 뱃사람이었던 한용준의 인솔로 모두 걸어서 서강(西江)을 건넜다. 소요가 일어날까 두려워한 현청은 무장한 기마경찰대 20여명을 동원하여 그들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리고 다섯 명의 대표를 뽑아 현청에 가서 협상하기로 하고, 나머지 군중은 모두 육하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자진해서 대표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몇십명이었으나 경찰의 동의를 거쳐 18명을 선발하고 협상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 대표들의 정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환인현청은 변창죽과 이구점을 구속했다. 조선인 시위대의 승리였다.
9월 19일에 일본의 통화영사관은 경정(警監)인 곤도 신조와 조선인 경위(警衛) 문영선 등 4명의 경찰관을 환인현에 파견해 현청과 교섭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 측의 압력에 굴복한 환인현청이 두 명의 범죄자를 석방하고 오히려 협상 대표였던 18명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24일에 18명의 대표를 통화영사관 산하 경찰서로 압송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은 현청의 결정에 실망하고 스스로의 힘과 행동을 통해 18명의 대표를 구출하기로 결의했다.
24일 새벽에 통화영사관이 파견한 경찰관 4명과 환인현의 경찰관 30여명이 대표자들을 마차 두 대에 태우고 통화로 압송할 때에 조선인들은 북강 부두에 집합하여 이동민과 김정선을 비롯한 대표자들을 석방하라고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러자 경찰관들은 총기(銃器)를 장전하여 맨주먹인 조선인들에게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이명구와 서상호가 목숨을 잃었고 2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양세봉은 2개 소대 병력과 함께 환인현에 들어가 육하의 조선인 농민들을 모아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일본의 영사관을 철수시키고 동향회를 해산하라!”, “선민부를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일본 경찰대와 환인현청의 군경들이 쫓아와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대로 가장한 독립군이 군중을 보호하면서 장총(長銃)과 죽창(竹槍)으로 일본 경찰대를 공격하였다. 또한 각 지역을 습격하여 선민부의 하부 조직을 파괴하고, 악명 높은 친일파 우두머리들을 단호히 처벌했다.
양세봉은 제8중대장 장도백에게 날쌔고 용감한 무장대원들을 거느리고 통화현에 있는 선민부의 본부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원들은 어둠을 틈타 선민부 수뇌들이 모인 회식 장소를 습격해서 문영선을 비롯한 일당을 모조리 사살하고 선민부의 본부를 파괴함으로써 희생된 동지들의 복수를 해주었다.
집안현·관전현에 있는 선민부의 근거지도 조선혁명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써 친일파 세력의 오만한 기세가 한풀 꺾였다.
선민부에 대한 응징으로 이 지역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은 더욱 드높아졌을뿐 아니라 조선혁명군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또한 양세봉이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