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관광도 좋지만 길 위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내가 더 행복하다.
화려한 관광지가 공개연애라면 올레길은 소박한 자연과 하는 비밀연애라고 해두어야겠다.
저들도, 나도,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비밀연애 중이다. 걷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는."
왠지 모를, 주체 못할 쓸쓸함에 TV를 켜놓고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쯤인가 일어나 TV를 끄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6시에 깼다.
‘비가 오는가?’
창 밖에서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 소리면 비의 양도 제법일 텐데...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다시 자자.’
나는 서울에서 부족했던 잠을 우리나라 남쪽 섬에서 보충했다.
다시 잠에서 깨며 충분히 잔 느낌이 들어 시각을 확인하니 8시 30분.
침대 아래에는 배낭이며 짐가방, 소지품이며 옷들이 널브러져 있는데 챙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제 밤 편의점에서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 제주우유를 꺼내 찬기를 없애려고 TV 옆에 두었다.
‘오늘 어떡 하지?’
오라는 곳 한 곳 없는 방랑자 처지.
잠깐 생각하다가 어제 저녁을 먹으며 예약한 성산포 부근 게스트하우스로 가서 짐을 놓고 1코스를 걷기로 마음 먹었다. 1코스는 지난 3월에 걷고 싶었지만 구제역으로 폐쇄되어 가지 못했던 곳이다.
꾸역꾸역 짐을 꾸렸다.
제주우유는 정말 의외로 맛있었다.
우유 특유의 잡맛이 없고 깔끔하고 고소한 게 신선함이 느껴졌다. 물맛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모텔에서 나와, 걸어 4~5분이면 맛짱김밥이 있고 구 시외버스터미널일 텐데 이상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런, 반대로 걸었다. 맛짱김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과 달리, 여기는 사람 보기가 어려워 길을 잃으면 그만큼 길 찾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겨우 한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 구 시외버스터미널로 오니 성산포 가는 버스가 마침 서 있어 맛짱김밥에도 못 들르고 바로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보는 제주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작은 상가들을 지나고 한적한 마을을 지나고 감귤 밭을 지나고 한참이 지나니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성산 일출봉은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인지 대학교 졸업 여행인지 그 때 와보고 처음이다. 그 때는 성가신 일정으로만 느껴진 일출봉이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비 오는 날 버스 안에서 보고만 있어도 당장 내려 뛰어오르고만 싶으니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지금을 살면서라도 무엇 하나 허투루 보내지 않기를,
현재를,
인연을,
대화를,
생각을.
일출봉을 지나 성산고 앞에 내렸다.
길 건너 시드 게스트하우스.
원래는 한라산 등산 후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곳.
라운지 쇼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빗속에서 걸을 준비를 했다.
등산화로 바꿔 신고 비옷을 챙기고 물병에 정수기 물을 채웠다.
다시 성산고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쯤 지나 시흥초등학교에서 내린다.
내 뒤로 여성 두 분이 내렸는데 그들은 비옷을 챙겨 입은 나를 보고 올레 시흥 안내소에서 비옷을 사려했다. 안타깝게도 안내소의 자원봉사자들은 제주올레걷기축제에 참가하느라 문을 닫았다.
안내소 길 건너편이 1코스 시작점이다.
시흥초등학교
간세야 반갑다.
올레길을 걸을 때 만나는 간세며 리본, 화살표는
어제 엉또폭포 가는 길에 본 것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어제의 그들은 단순한 행인이었다면 오늘은 동반자라고나 할까.
푸르른 당근밭
비옷을 입고 걷기는 생전 처음이다.
일상에서 비가 온다면 우산이 요긴하지만 올레길에서는 비옷이 단연 최고다.
내가 우산을 빌려 준 두 여성은 비바람과 오르막길 탓인지 우산을 접고 비를 맞으며 걷기로 한다.
잠깐 비가 그쳐 한적한 산책을 하나 싶었는데 세차게 다시 내리는 비, 거세게 부는 바람에 카메라도 휘청, 사진도 못 찍을 정도이다.
말미오름에 서서
말미오름에 서서
말미오름에 서서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말미오름에 서서
말미오름에 서서
말미오름에 서서.
멀리 우도가 보인다
화산의 영향인지 까만 흙이 인상적이다
알오름에서 바라본 우도와 성산일출봉
어제의 관광도 좋지만 길 위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내가 더 행복하다.
화려한 관광지가 공개연애라면 올레길은 소박한 자연과 하는 비밀 연애라고 해두어야겠다.
저들도, 나도,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비밀연애 중이다. 걷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는.
식당 창가 자리에 앉아 내다 본 마당
사진 가운데 보이는 길이 내가 걸어온 길이다
13시 30분, 드디어 밥 시간이다!
수다뜰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칼국수인데 무슨 칼국수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7,000원
따로 팔기도 하지만 후식으로 나온 당근쥬스
당근쥬스는 주문과 동시에 믹서기가 돈다.
당근은 월동 채소이고 11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수확한다고 주인 아저씨가 말해 주었다.
신선함과 당근의 달큰함이 확 밀려온다.
식당 창밖으로 멀리 말미오름과 알오름이 보인다
여전히 비가 내리지만 올레꾼들은 개의치 않는다.
길 위에는 도대체 어떠한 매력이 숨어 있기에 사람들은 비바람에 맞서며 이 길을 걷는 걸까?
나만 알고 있는 이 길 위의 행복을 저들도 알고 있는 걸까?
식당에서 나와 종달리를 지나는데 비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비옷이 바람에 날려 바지는 허벅지가 다 젖었다.
종달~시흥 해안도로의 에메랄드빛 바다 모래사장은 커녕 비바람 탓에 해안도로 위로 걷는 것조차 힘들다.
비는 내가 입은 비옷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바람은 자꾸만 자꾸만 비옷을 벗기려 들며 나를 업고 오즈의 나라라도 데려갈 모양새다.
발은 앞으로 내딛고 있는데 바람 탓에 몸은 계속 오른쪽으로 기우뚱, 도대체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바닷가에서 해안도로 위로 날아오른 새 한 마리가 이런 강풍에도 몸을 자유롭게 활개를 치는가 싶더니 방향을 틀다가 이내 몸을 갸우뚱한다.
‘푸흐흐흐흐...’
새도 제 마음대로 날갯짓 못하는 제주 바람의 힘.
내가 걸어온 종달~시흥 해안도로
비바람이 너무 거세 등산화속 양말까지 젖었다.
비도 피할 겸, 좀 쉬어갈까, 하고 멀리서도 눈에 띄는 조가비 박물관에 들어갔다. 사실 여기는 바로 앞의 시흥해녀의 집 조개죽이 저렴하면서도 맛있기로 유명하다.
조가비 박물관은 입간판이며 외부 및 내부 입구 벽면이 조가비로 되어 있는 게 눈길을 끌었다.
입장료는 2,000원
‘아, 큰 일이다, ’
시간을 너무 지체한 듯 해 서둘러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바람은 여전히 세차다.
내 뒤에 남녀가 같이 걸어오는 것 말고는 사람이 없다.
해안도로 끝에서 부터 그들보다 내가 한참 앞서자 길에는 나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성산 일출봉이 가까워지고 있다.
성산일출봉의 옆구리를 타고 도는 길에.
성산일출봉에는 그나마 사람이 좀 있다.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던킨 도너츠 가게도 보인다. 들어가서 따뜻한 까페라테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이 게으른 여행자는 이미 시간을 지체해 쉴 수가 없었다.
성산일출봉 아래에는 식당이 많다.
눈앞에서 해물뚝배기, 전복뚝배기가 아른아른 한다.
그 탓에 올레길 화살표도 놓쳤다. 식당가가 즐비한 도로를 식당 간판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본심이 발길을 그리 만든 것이리라.
성산일출봉을 지나서
2011-11-10 17.35.59 휴대전화로 찍었다.
성산일출봉을 지나서
2011-11-10 17.37.41 휴대전화로 찍었다.
성산일출봉을 지나서
2011-11-10 17.52.02 휴대전화로 찍었다.
정상까지 햐얀 점으로 찍힌 가로등이 보인다
수마포라는 곳부터는 광치기해안 모래사장을 걸어야 하는데 인적이 없는 모래사장을 걷기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도로에도 사람 머리카락 보기가 힘들 정도였으니.
잠깐 해안으로 내려갔다가 곧 도로로 올라왔다. 깜깜하니 올레길 화살표가 있어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택시며 승용차만 지나가는 이 도로도 겁이 나 포기할까 싶었지만 1코스 종점에서 맛있는 전복뚝배기를 먹어주기로 하며 참고 걸었다.
드디어 식당이 하나 보인다. 광치기 해산물촌 식당.
사실 1코스 종점명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걸었기에 막 식당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그는 아주머니에게 1코스 종점을 물었다.
여기 식당이 1코스 종점이란다.
“그럼 올레길 스탬프는 어디 있어요?”
“저기 돌아가면 있지.”
식당 코너를 돌았지만 암흑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식당 주인이 자동차 헤드라이터로 비춘, 식당 문에 붙은 올레 안내문
4시 이후에 걷기가 끝나면 픽업 해준다는 게스트하우스의 아주머니 말을 떠올려 염치없이 전화를 걸었다. 버스를 타면 게스트하우스 앞까지 단번에 갈 것임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말을 섞고 싶었으리라.
픽업 해 줄 차를 기다리며... 도로가 암흑이다.
흰점은 멀리서 보이는 불빛
승합차를 몰고 온 아주머니에게 저녁식사를 묻다가 1만원을 내면 게스트들이 모여 하는 삽겹살파티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했다.
남매가 온 것을 빼면 삼겹살 파티에는 모두 여자들만 모였다. 모두들 잘 어울려 여행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고기로 배가 두둑해졌다.
물맛이 달라 맛좋다는 한라산 도수는 21%
방으로 돌아와 스쿠터를 타고 여행 중인 처자와 서로의 여행 소감을 나눴다.
처자는 올레길은 걷지 않고 제주의 비경과 오름들을 찾아 보고싶다고 했다.
“올레길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비바람을 맞아가며 걷는 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게요? 왜 걸으시는 거예요?”
“직접 걸어보세요.”
2011년 11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