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 내년 수능을 보는 나이의 그런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입니다.
먼저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판을 읽고 즐기실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상당히 무거운 내용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여기 찾아왔습니다.
긴 글이겠지만, 잘 읽어주세요 끝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 가족은 평범한 4인가족으로 아버지 어머니 저 동생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희 4명이 한순간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2007년도 청천벽력같던 아버지의 암선고.
그것도 희귀조직암이였습니다. 전세계인의 1퍼센트만 걸린다는 그런 암이였습니다.
그전까진 아버지는 정말 열심히 일하셨고, 한달에 400만원 정도 받으시는 프로그래머셨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면서 병원프로그램을 설계하시며 건강하게 무에타이와 킥복싱도 즐기시던 그런 멋진 아버지셨습니다. 한순간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저는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친구들과 나쁘게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집안에선 사소한 다툼을 했고, 밖에선 무거운 마음으로 애써 웃으며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첫 수술을 하실때, 전 가보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밤새워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다행이 수술은 잘 끝났다는 얘기가 전해져서 안심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신 아버진 예전의 아버지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귀 밑에 큰 흉터가 생긴 것 빼곤요..
그 흉터를 보자마자,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는 도중 가족끼리 여행도 다니고 하면서 우리 가족은 남부럽지 않게 가족애를 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들린 청천벽력같은 두번째 소식.
아버지의 암이 폐로 전이됐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좌절하시고 침울하게 계셨습니다. 기운도 못차리시고 그렇게 하염없이 계셨습니다.
그러다 다시 두번째 개흉수술을 감행하시고, 폐를 한쪽 드러내셨습니다.
입원과 퇴원.. 또 갑자기 찾아오는 고열, 숨쉬기가 힘든 고통을 견디시며 지금까지 오셨습니다.
별다른 수술없이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병행하시며 견디시길 2년, 올해.
2011년 9월 19일 저희 집앞으론 구급차가 왔습니다.
전 등교를 해야했기에 나왔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않아 가질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구급차에 타셨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하염없이 저만 쳐다보시면서 그렇게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전 그날 학교에 가면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께 케익도 손수 만들어드리고, 병원도 자주 찾아뵈면서 항상 보고 볼때마다 꼭 포옹을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스테이크도 사주시고, 제가 배가 고프다하자 씩 웃으시면서 앉은자리에서 스테이크를 하나 더 시켜 저에게 주셨습니다.
항상 많은 얘기를 해왔습니다. 아버지와 초등학생때 단둘이 갔던 안동여행, 메타세콰이어길, 양고기마을 등등..
아버지가 꼭 나아서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그러던 도중 아버지께서 애초 2007년 병원에서 판정받으실때, 5년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아버지 연세 40세이셨을때 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신것도 어떻게 숨을 쉬실수 있고 걸을수 있으신지 궁금하다고 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기적이였습니다.
매일매일 기적적으로 살아오셨고, 저희 가족은 매일매일 기적적인 하루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했던 시간이였습니다.
전 몰랐습니다.
그 후 글리벡이라는 약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시듯 드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학계에서 더 희귀한 암종을 표적치료했었던 기록이 있어 정말 기대를 걸어보고 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몸에 있는 암종은 더 강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그러던 아버지가, 2011년 11월 24일 위급하시다고 하셔서 병원에 갔습니다.
모든 친가 친척분이 뒤따라 오셨고, 아버지는 몰핀을 맞고계셨습니다.
환각상태와 의식불명상태, 의식상태를 오가셨던 것입니다.
저희의 손을 한명 한명 꼭 잡아가면서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에겐 정신차리라고.. 아버진 이제 없을거라고 하셨습니다.
모두들 그날이 마지막인줄 알았습니다.
그 다음날, 저는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아들왔어 아들. 어딨는지 보여?" 라고 말씀하시자,
"저기 자전거에있네? 저기있잖아저기! 안넘어지겠지?" 라고 말씀하시는걸 보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께선 저와 가족과 모두와 행복했던 시간을 훑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26일날 아침, 아버지가 호흡하시는게 심상치 않았습니다.
간호사들이 바빠졌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손끝으로 병실 벽을 가리키셨습니다.
전 짐작했습니다. 아버지를 데리러 온거라고..
아버지에게 모니터를 달고,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달고, 산소마스크로 바꿨습니다.
10분 지나고 20분지날때마다 아버지의 심박수는 160에서 150 140으로 떨어져만갔습니다.
산소 포화도도 처음엔 89퍼센트 였었지만, 5분이 흐를때마다 10퍼센트씩 곤두박질 쳤습니다.
결국 아버진 아픔이 없는 영원한 세계에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신 후, 양해를 구하고 병실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머니와 저만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했습니다. 동생은 심지어 택시를타고 달려오고 있었는데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똑바로 누우시면 기침이 나고 피가래가 나와서 앉아서 주무셨습니다 3년간..
그러나 편안히 똑바로 누워계셨습니다.
전 쓰다듬고 안고 또 쓰다듬었습니다. 평소 못해드렸던 많은 것들을 해드렸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5년간 저승사자가 찾아온다며, 자꾸 같이 가자고 한다며 밤에도 벌떡일어나 싸우러 가셨습니다.
어머니도 저승사자가 문에 들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간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말리셨습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기적같은 하루하루를 선물 받은 이유는 이것 때문인것 같았습니다.
곧이어 친가분들이 오시고 외가분들이오시고 아버지를 옮길 차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올라간 침상이 병실 밖으로 빠져나가고 침대의 빈자리를 보는순간 주저앉았습니다.
침대엔 아직 온기가 있었습니다. 전 온기를 느꼈습니다.
그리곤 장례식장으로 갔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입어보는 수트 세트였습니다. 그게 상복이였습니다.
전광판에 나와있는 고ㅇㅇㅇ 상주이름에 어머니, 저, 동생의 이름을 보자마자 좌절했습니다.
아버지의 영정이 나왔고, 저희는 아버지가 평소 집에 오시고 싶었다고 하셔서 영정을 모시고 집에 왔습니다.
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앉아계시던 장소, 아버지가 주셨던 저의 기타, 아버지의 사진, 가족 사진, 아버지의 글러브, 노트북 등등등..
전 처음으로 울부짖으면서 소리내 펑펑 울었습니다. 상주라서, 마지막 남은 우리가족의 남자라서 참고있었지만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편안해 지신 후에도 울었지만, 참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웃는 모습으로 보내드리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왔습니다.
상복을 입고, 향을 피우고, 영정을 올리고 과일등을 올렸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공간에 온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환한 얼굴이 저런 영정사진이 된다는게 말이되지 않았습니다.
고 ㅇㅇㅇ 이름을 한참 쓰다듬고, 영정을 한참쓰다듬었습니다.
장례식 둘쨋날엔 조문객분들께서 많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버지의 학창시절 친구분들, 회사 친구분들, 등등등..
아버지의 부재를 같이 슬퍼해주시고 같이 울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입관식이 있었습니다.
입관식을 지키러 들어갔습니다.
보통은 유리창에 건너서 보라하지만, 전 고집을 부려 같은방에서 보았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것은 차가운 쇠침대 비슷한것에 누워계시는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흰 습포제로 온몸을덮고 얼굴을 감싸신 저희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께 약속했었습니다, 입관식때는 울지 않겠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천장을 보며 참았습니다.
하나하나씩 수의를 입히는데 보이는 아버지의 창백한 두다리와 두팔..
아버지 짧은 한평생동안 저희를 지고 한걸음 한걸음 내걸으셨던..
그리고 제가 얼굴이 흔들릴까봐 잡아드렸습니다.
차가워진 얼굴, 그러나 말할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눈물을 참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있던 습포제들을 벗기고, 아버지께 수의를 입혔습니다.
다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예뻤습니다. 마치 임금님 같았습니다.
가슴엔 용을 수놓고, 가지런히 두팔을 모으신 아버지.
그리고 관에 들어가셨습니다.
제가 제손으로 마지막에 천을 아버지 얼굴에 덮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치실에 다시 옮겼습니다.
조문실로 돌아온 전 기진맥진하여 앉아서 하염없이 아버지만 보고 있었습니다.
술을 따라드리고 향을피워드리고.. 생전 꽃과 자연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흰 백합사이에서 웃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발인식 당일날이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한 후, 저와 동생은 아버지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아버지의 친구분들께서는 아버지의 관을 드시고 옮기셨습니다.
시립승화원에 도착했습니다.
화로로 들어가셨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러했습니다.
입관식 때 처럼 안울겠다 다짐하였지만,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를 소리질러 부르면서 절규하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관이 화로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닫혔습니다.
마지막이였습니다. 시간이 멈춘듯 했습니다.
저 뜨거운 불속에서.. 자유로워지실까? 많이 뜨거우실텐데 어쩌지.. 란 생각밖엔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이 조문실로 영정을 다시 모시고 갔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영정을 모셔놓고 전 큰절을 했습니다.
고개를 들지못하고 울었습니다.
계속 울었습니다. 일어나 아버지의 영정을 쓰다듬으며 후회했습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었는데, 어째서 정신차리고서는 3달밖에 없었던 것일까..
조금더 잘해드렸어야 됐는데.. 항상 따듯하셨는데..
울부짖었습니다. 다음 생엔 제 아들로 태어나라고.. 아들로 태어나서 제가 받은 사랑 그대로 돌려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곤 저와 어머니는 기절했습니다.
일어나보니, 냉각이 완료되어서 보러가야했습니다.
친척들에 의지해 걸어갔습니다.
화로가 열렸고, 유골들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아버지였습니다.
키 183에 근육질이 탄탄한 몸매셨던, 그러나 아프신 후로는 갈비뼈가 가라앉는등 고생을하셨던
아버지의 몸이 이것이였습니다.
분골기로 가서 갈았습니다.
유골함에 나왔습니다.
전 그것을 안았습니다.
아직도 따듯했습니다. 아버지가 추운 바람을 뚫고 손을 잡아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서울시립 수목장으로 이동했습니다. 평소 자연을 좋아하셔서 나무에 뿌려 묻어드리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설이 정말 마음에 들지않아 하루를 아버지를 집에 모셔두고, 정하기로했습니다.
아버지와 집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였습니다.
전 그렇게 아버지의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저흰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다행이 상조에서 장지담당본부장님이 나오셔서 저희에게 많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결국 저희는 시립승화원 쪽에있는 ㅇㅇ추모공원에 모시기로 했고, 결국 모셨습니다.
그 후로 삶이 허전하고 집이 허전하고 마음이 허전합니다.
아버지가 제 꿈에 보이셨습니다. 두 번이나.
한번은, 시험을 보다 다풀고 잠이들었는데 나오셨고
한번은 전화기로 목소리만 들었습니다.
아버진 위에서도 제 안부를 묻고 저와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아버지가 너무보고싶습니다. 정말 보고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저희 아버지가 하시던 블로그가 있습니다. 비록 다음이긴하지만.
저희 아버지가 하신거라, 친구분도 없으시고 하시던 블로그를 아버지가 편안해지신후 저희 어머니께서 관리하고 계십니다.
저희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곳에 털어놓고 계십니다.
저도 어머니도 밤에 서로 몰래 우느라 바쁩니다.
어머니가 안쓰럽고, 또 기운 내시라는 차원에서 응원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 감히 부탁을 두개만 드려보겠습니다.
첫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세글자는 사랑해가 아닌,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가 지셨던 삶의 무게를 언젠간 지게 되겠지만, 저희 아버지처럼 멋있게 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족과 아버지께 잘 해드리세요.. 정말입니다. 후회하지마세요 저처럼..
둘짼, 아버지가 하셨던 블로그 링크를 걸 생각입니다.
http://blog.daum.net/roothealth/?t__nil_login=myblog
판을 보시고 여기다가 댓글을 달아주시지 마시구, 블로그에 가셔서 댓글로 어머니를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으시겠지만, 전체보기를 누르셔서 한글 한글 잘 봐주세요.
판에서 보고왔다는 말씀만은 하지마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어머니가 싫어하실겁니다.. 익명으로라도 힘내라고 전해주세요
글이 정신없고 두서없지만 제가 전달하려했던것은 아버지의 무거운 사랑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 그리고 후회.
결국 제 이야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다른 가족분들의 행복을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