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편으로서 제일 먼저 말씀해야 하고, 항의해야 할 것은 남학생(일반 남자들까지도)들은 여자나 여학생을 희롱거리로 아는 심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토론회나 강연회에 가 보십시오. 인물과 자태로 여자는 강연도 하기 전에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자 운동가고, 여자 음악가고, 무어고 남학생들이 평가하는 데는 반드시 얼굴값, 맵시값이 제일 많이 쳐지는 것입니다.”(‘여자를 희롱거리로 아는 심정’, 『신여성』 1924.7)
최근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비키니 사건’으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객이 언급했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 사안만 놓고 보면 답도 사실 명확하다. ‘나꼼수’가 사과하는 것. 그러기만 하면 지금까지 ‘나꼼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여줄 것이다.
문제는 이번 일이 단지 ‘나꼼수’ 패널들의 사과만으로 종결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처음 ‘비키니 시위’ 건으로 논란이 되어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던 ‘나꼼수’의 지지자만이 아니라 ‘나꼼수’를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싫어하던 사람들, 듣긴 하지만 비판적이었던 사람들, 여전히 무조건 ‘나꼼수’ 편인 사람들 등이 모두 얽히고설켜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비키니 사진’이나 ‘코피’ 발언보다 더 근본적인 ‘젠더(gender)정치’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내외법이 폐지된 뒤로 한국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참여가 필요한 순간이면 어김없이 거리로 나왔다. 21세기에는 ‘촛불소녀’나 ‘유모차 부대’처럼 거리 정치에서 오히려 여성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남성중심적 사회는 여전히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역할이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단지 남성들의 정치에 대한 보조나 장식 정도로 취급한다. 이러한 편협한 사고가 소위 ‘진보적’인 남성들에게까지 많이 내면화돼 있기 때문에 이번 사태를 ‘꼴페미(강경 페미니스트)들의 히스테리’나 ‘오크녀의 열폭(못생긴 여자의 열등감 폭발)’으로 취급하는 남성도 꽤 있다.
서두의 인용문은 이처럼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 아닌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고 희롱 당해 왔던 역사 속 어느 여성의 항변이다. 여성들의 메시지, 재능, 행위는 그들의 외모나 섹슈얼리티 뒤로 감춰져 버린다. 근 백 년 전과 지금이 뭐가 다른가. 이번 일로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들에게 ‘또 따지냐? 지겹고 피곤하다’고 말하는 남성들이 있다면, 왜 여성들이 매번 같은 항변을 반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